인류는 ‘5장 6부’가 아닌 ‘5장 7부’로 하나의 인공장기를 새로 장착해 살고 있다. 간 밑에 쓸개, 쓸개 밑에 스마트폰이 있다(최재붕, 2019).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스마트폰 없이 살기 어려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시대가 됐다고 평가했다.
온라인에서 ‘심심(甚深)한 사과’ 논란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청년세대의 문해력이 이슈로 부상하며 어휘력·문해력 관련 신간이 전년보다 두 배 늘었다고 한다. 한 인터넷서점 통계에 따르면 2022년 1~8월 교재류를 제외한 어휘력·문해력·글쓰기·맞춤법 관련 인문서 출간은 116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3.21% 늘었고, 이 흐름과 함께 교육부는 12월 문해력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초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을 34시간 늘린다는 내용의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발표했다.
‘심심한 사과’의 나비효과는 대륙 건너편까지 번지는 태풍이 될 수 있었음에도, 문자언어 중심의 문해력 교육 강화라는 내수용 열풍으로 축소되는 듯 보인다. 이는 한 시대에서 통용되는 문해력 정도의 의미, 이를 규정하는 주체와 권력, 변화하는 문해력의 양태까지를 드러내는 간단치 않은 논쟁임에도 결과적으로 ‘요즘 애들은 말이야~’의 확장판이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문해력의 의미는 다 다르다. 고대에는 ‘문학에 조예가 있는 학식 있는 사람’으로, 중세시대에는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으로, 종교개혁 이후에는 ‘모국어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됐다(윤준채, 2009). 또 신의 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문자언어 세계로 이행한 것을 근대성의 핵심 성격으로 꼽기도 한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는 시대 전환기에는 말과 글의 비중과 쓰임새, 이로부터 파생되는 삶의 양식이 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같은 텍스트라 해도 종이책으로 읽을 때와 휴대전화로 웹소설을 읽을 때 텍스트를 읽는 순서와 속도, 눈의 움직임,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달라진다. 미디어가 바뀐다는 건 미디어를 통해 세계를 만나는 감각과 방식, 의미를 구성하고 대하는 방식 전체가 바뀌는 것이다. 현재 포노 사피엔스는 인공장기를 가진 새로운 신체와 함께 문해력의 의미를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아직 한글을 모르는 4~5살 아이가 유튜브에서 음성으로 검색해 ‘콩순이’를 시청하고, 그 나이대 아이들이 자신만의 방송을 송출하는 시대다.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는 최초로 접하는 매체가 동영상이고 텍스트 학습은 그다음이다. ‘동영상 문해력’이 먼저 발달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세상은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빠르게 변해가니 문자 앞에서 주춤하는 것이 당연하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텍스트에서도 전체의 텍스트를 통독하는 것보다 필요한 부분만 검색해서 발췌독하고 그것으로 전체를 파악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이 훨씬 탁월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응용언어학자 김성우는 세계를 ‘읽는’ 세대는, ‘보는’ 세대를 향해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과연 사실일까를 묻는다. 오히려 문자·학력에 기반한 40~50대가 리터러시(문해력)를 정의하는 권력을 가지면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본다. 지금의 40~50대는 고등교육을 받은 텍스트 기반 교육 대중화의 수혜로 문자언어 중심의 문해력이 핵심이라 보고 그 밖의 것은 하찮은 일, 딴짓, 공부를 방해하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10~20대는 삶에서 늘 접하는 미디어가 동영상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의 이미지인데, 이것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어른들에게 평가받는 처지라 할 수 있다. 매뉴얼화된 읽기와 쓰기, 교육과정과 평가체제가 작게는 시대에 맞는 문해력을 키우지 못하게 하고 크게는 의견을 가진 시민으로서 개인, 개인으로서 시민의 형성을 방해한다는 것이다(김성우·엄기호, 2020).
결과적으로 문해력의 정의는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방향(↓)이 아닌 양방향(↔)적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심심(甚深)한’과 같은 한자어 공부로 해법을 찾는 방식은 세대 간의 상이한 문화자본과 문해력 형성 배경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익숙하고 오래된 교육의 반복으로 메우려는 것에 불과하다. 문해력(文解力)이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텍스트가 나와 타자를 이해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므로, 능력(力)의 과시가 아니라 이해(解)의 확장에 방점을 둬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말과 글과 삶의 민주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문해력의 평가 방식을 정하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누가 활용하는가, 문해력은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과 기회를 만들어내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이해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공성에 기반한 문해력의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할 때다.
국회는 시대의 변화를 얼마나 준비하고 있을까. 바로 1년 전인 2022년 1월,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촉진함으로써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산업디지털전환 촉진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산업 디지털 전환 정책 수립과 산업 데이터 활용 생태계 조성, 산업 디지털 전환 선도사업의 지원, 산업 디지털 전환 기반 조성과 활성화 등에 관해 규정하는데, 디지털 안전 및 권리에 관한 내용은 없다. 국회에서 디지털사회에 대한 준비는 아직 산업·기술 측면에서만 다뤄진다는 의미다. 디지털사회에서의 안전과 시민들의 권리를 규정한 ‘디지털포용법안’이 제출됐지만 발의된 이후 장기간 한 번도 논의되지 못한 채 계류되어 있다. 국외 법안을 살펴봐도 디지털사회에서의 안전과 권리가 통합되기보다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온라인 콘텐츠의 유해성에, 일본은 디지털사회에서의 국가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정도다(표 참조).
사실 국회에서는 어떤 피해사건이 발생하면 이를 사후적으로 인지해서 구제 절차를 마련하는 방식의 입법이나 구체적인 이해관계 조정을 필요로 하는 입법이 주를 이룬다. 피해자이든 이해관계자이든 각각의 당사자성이 명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고로 누군가가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돈과 권력을 가지고 로비 잘하는 집단이 있는 경우에만 법이 만들어진다는 자조 섞인 얘기를 동료들과 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일은 해당 법안 심사와 처리에 속도가 붙기 어렵다. 모든 국민이 당사자이기에 역설적으로 필요성과 시급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제1388호 ‘북극곰과 에코백이 가리는 세계’에서 언급한 ‘2050 탄소중립법’ 또한 미래를 내다보는 법안이자 모든 사람이 당사자라는 의미에서 이 법과 같은 맥락이지만, 탄소중립법은 입법권자와 정부의 의지와 시민들 염원의 힘으로 제정됐다. 참고할 만한 선례다.) 국회는 가쁜 호흡을 고르고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모든 국민의 디지털 시민성과 민주주의의 문해력을 함께 학습하고 이를 통해 공공의 장이 확대되도록 하는 시야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디지털은 기술일 뿐만 아니라 공기 같은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10~20대의 말과 글과 사유의 방식, 기성세대의 말과 글과 사유의 방식을 서로 외국어 배우듯 익혀야 하고, 이로써 서로 이중언어자(Bilingual)가 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제 막 인공장기를 갖춘 사람과 태어나면서 5장 7부를 갖춘 사람은 다른 종(種)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시대 전환기에는 이질적인 종들이 한 사회에 사는 셈이므로 함께 잘 살기 위해 상대의 언어를 학습하는 태도가 공존에 유리하고 공생에 유익하다. 외국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보디랭귀지까지 총동원해서 다가가는 것처럼. 그것이 우리 사회가 ‘심심한 사과’ 논쟁을 통과하는 보다 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이보라 국회 보좌관
*법 만드는 법: 국회 10년차 보좌관이 국민 생활에 밀착한 법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이보라씨는 국회여성정책연구모임 대표와 경찰청 사이버성폭력 수사자문단 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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