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명제는 너무 옳은 나머지 오히려 거짓에 가깝다. 사람은 자연(自然)이 아닌 이상, 저절로 이뤄질 수 없다. 스스로 사람일 수 없다. 존엄하게 대해야 존엄해지고 사람으로 대해야 사람이 된다. 존엄하게, 사람으로서 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공동체에서 성원권을 인정하고 그 인정이 모두에게 고르게 배분되도록 하는 일, 그 과정과 결과에서 누구도 뒤처짐이 없도록 하는 일이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났다. 사회적 참사(慘事)라는 사건은 없어지고 참담(慘澹)이라는 감정만 남았다. 사건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감정은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하여 참사의 ‘사회적’ 의미는 한 번도 발현되지 못한 채 사적 영역의 감정으로만 환원돼버렸다. 이 불행한 공동체 안에서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2014년 어느 날,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이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아스팔트 바닥에 앉았다. 유가족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다 끝내 경찰에 막혀 그 앞에서 주저앉았고 몸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행진 대열 속에 있던 나는 그 울음소리를 곁에서 들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울음소리였다. 유가족들이 세찬 눈비를 맞으며 거리의 싸움꾼이 돼갔다. 따뜻한 집밥과 위로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한뎃잠을 자게 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같은 울음소리를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장에서 들었다. 세월호의 상흔이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는데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또다시 유가족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장이 끊어지는 듯한 울부짖는 소리에 나도 몸 어딘가 베인 듯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이상민 장관은 참사 같은 다중밀집 인파 사고 예방은 물론이고, 대형 재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과 운영을 하지 않았다. 참사 발생 이후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 부여된 임무를 제때,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사 예방과 대응에 책임 있는 장관으로서 부적절한 언사를 반복해 고위공직자에게 기대되는 최소한의 품위마저 저버렸다는 것이 탄핵 사유다.
무엇보다, 가장 견딜 수 없는 대목은 참사 당일 2022년 10월29일 밤 11시20분께 이 장관이 자택에서 참사 발생을 인지했음에도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는 차량 기사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까지 올 때까지 85분 동안 기다리다가 뒤늦게 참사 현장에 갔다는 사실이다. 의전의 습벽이 직무의 우선순위도 잊게 했는가. 골든타임, 사고 발생 뒤 환자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적 시간. 책임자가 현장에 있었다면 그 시간은 단 1~2분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을.
이상민 장관은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서도 신속한 재난 대응을 위한 구체적인 지시나 조치 없이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새벽 2시30분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됐고 사고수습본부는 구성조차 되지 않아서 그사이 호흡과 맥박이 있던 환자들이 방치돼 끝내 숨을 거뒀다는 의혹도 여전히 남아 있다. 희생자들이 제대로 분류되지 않아, 자식 잃은 부모들이 자식을 찾아 수십㎞ 떨어진 영안실을 전전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책임 회피, 타 부처에 떠넘기기, 정부·여당의 회의 불참과 비협조가 자식 잃은 부모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는 형국을 만들었다. 권한과 책임은 비례할진대 권한은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 공직자들로 인해 그 책임이 고스란히 다시 피해자에게 전가됐다.
세월호 사건과 함께 ‘사회적 참사’로 명명된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시작부터 피해자들이 내동댕이쳐졌다. 우리 의원실이 그 사건을 알게 된 건 2012년 제19대 국회 개원 직후,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분들로부터였다. 점심시간 국회 앞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국회 정문에 계시는 그분들을 만났다. 당시는 무슨 사건인지조차 잘 몰랐기에 한참을 서서 시위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었다. 이분들은 분명 가습기살균제로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은 피해자임에도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회한에다 ‘내가 산 가습기살균제로 가족이 숨졌다’는 죄책감까지 더해 갖고 계셨다.
사건 직후 정부는 피해 사고에 대해 소송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구제에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법정 소송이 길어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데 그런 고통의 가중 또한 정부는 알 바 없다는 입장이었고,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했는데 그야말로 가족 잃은 고통을 누구도 덜어주지 않는 자력구제 방식이었다. 그래서 시작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사회적으로 알리기 위해 국회 토론회와 피해 사진 전시회를 열었고, 전문가들과 함께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 사례의 제품별 정밀분석 보고서’를 발표하고 뒤이어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을 발의했다.
불명확한 사실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할 때, 확정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증명을 누구에게 부담시키고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불이익과 책임을 누구에게 돌아가게 할지의 문제를 다투는 것이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의 의미다. 일반적으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인과관계 증명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피해자 쪽에 책임이 있으나 그 불법행위에 대한 원인 규명이 어렵거나 적절한 구제를 받는 것이 어려울 경우, 법을 통해 피해자들이 겪는 입증책임의 부담을 덜어낸다. 그 부담을 국가가, 사회가 같이 지겠다는 선언이다. 법을 통한 보호, 법을 통한 위로와 연대다.
한국 사회에서 이 개념은 잘 쓰이지 않다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사회적 참사를 겪으며 적극적으로 인용됐다. 법률 제·개정으로 정부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대상을 확대하고 소송에서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요건을 완화해 장기간 가습기살균제로 아픔을 겪는 피해자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했다. 이는 사실상 입증책임이 기업에 전환된 것으로 지금까지 환경소송에서 대법원 판례와 비교하면 획기적 진전이 이뤄진 것이었다. 이후 환경분쟁과 제조물책임 소송에도 입증책임의 전환이 법률 개정으로 이뤄졌다.
피해자가 가진 짐을 덜기는커녕 나 몰라라 하거나 오히려 정부의 책임을 면책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2013년 당시 가습기살균제 판매 실태 등의 조사 필요성을 이유로 야당이 요구하던 가습기살균제 청문회가 여당 쪽 반대로 열리지 못했는데, 당시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는 “수사해서 처벌할 사안이지 국회가 정치적으로 갑론을박할 사안인가”라고 일축했다. 이후 여야가 간신히 합의해 가습기살균제 사용에 관한 과정과 피해 사례 등을 조사하기 위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공청회가 열렸지만, 여당 의원들은 대부분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의 기획재정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에 대해 가해 기업과 소비자 간의 문제라고 선을 그으며 반대의견을 내어, 이 법안은 3년이나 국회에 계류됐다. 권성동 당시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장은 “환경성 질환 사고만 정부에서 선 보상 후 구상권을 행사하면 교통사고, 범죄행위 등 다른 피해 국민들과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해 물의를 일으켰다. 책임 회피, 떠넘기기, 회의 불참과 비협조. 제목을 가리고 보면 이것이 가습기살균제 사건인지 세월호 사건인지 이태원 사건인지 구분 안 될 정도로 행태가 똑같다.
국가와 사회가 피해자의 고통과 부담을 나눠 지면 이 참담은 비로소 참사가 된다. 개인적 감정이 사회적 연대가 된다. 사람을 존엄하게 대해야 존엄해진다. 크나큰 사건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어깨에 올라탄 짐을 나눠 지는 것이 사람을 존엄하게 대하는 방법일 것이다. 책임 있는 자는 책임으로 나눠 지고, 의무 있는 자는 의무로 나눠 져야 한다.
‘사ː람’이라는 장음으로 발음되는 사람. 스스로 사람일 수는 없는, 그리하여 취약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 위로와 연대라는 시간과 과정을 통해 비로소 존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보라 국회보좌관*이보라 국회 10년차 보좌관이 국민 생활에 밀착한 법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담았던 ‘법 만드는 법’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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