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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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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처벌법 이후로도 4명이 희생된 이유

스토킹처벌법 제정 뒤에 발생한 신당역 살인사건, 약자가 평범한 일상을 살도록 하는 법은 어디에
등록 2022-10-15 02:39 수정 2022-10-15 09:04
2022년 9월24일 김상범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스토킹 살인사건 현장인 서울 중구 신당역 여성 화장실의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찾았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은 ‘법의 실패’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연합뉴스

2022년 9월24일 김상범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스토킹 살인사건 현장인 서울 중구 신당역 여성 화장실의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찾았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은 ‘법의 실패’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연합뉴스

사람이 자기 존재가 증명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자신이 이룬 개인적·사회적 성취에 의해,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계에 의해, 또 혹자는 휘두르는 권력과 폭력에 의해…. 그 무엇이든 삶의 방식으로 존재 의미가 만들어질 테다. 한편 죽음을 통해야만 존재가 증명되는 사람들을 본다. 죽어서야 비로소 살았을 때의 고통에 대한 관심과 공감의 찰나가 만들어진다. 애달프게도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존재가 그러하다.

2022년 9월14일 밤, 서울지하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인 9월15일 정부는 일제히 원인규명, 재발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관계 부처는 철저히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강력한 대책을 수립하라.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효과적이고 단호한 대응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경찰과 검찰 등 관계 기관은 범죄 예방 활동과 치안 확보 노력에 총력을 기울여달라.”

윤희근 경찰청장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청장으로서 피해자와 유가족들께 깊은 애도의 말씀을 드린다.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수사할 것이다. 다시는 비슷한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법 제도 개선 등에 관해 범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린다.”

이원석 검찰총장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과 안전을 지켜드리지 못한 점에 깊은 책임감을 갖는다.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겠다.”

김상환 법원행정처장 “비극적 상황에 놓여 있는 고인이나 유족들에게 무척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기가 막히고 의아했다. 지금은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고 1년6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법 통과 직후 정부가 준비할 시간 6개월도 부여했다. 그러면 형사사법기관과 사법부는 새로운 법 시행에 맞춰 수사 매뉴얼 재정비, 범죄유형 분석, 통계관리 등 후속 절차를 마련했어야 한다. 법 공포 뒤 시행 시기는 정부가 고의로 지연할 의도가 없는 이상 대부분 정부의 요청 사항을 반영한다. 새로운 법 제·개정에 맞춰 하위 법령을 만들고 그에 맞는 직제 개편이나 인원 충원 등을 주무기관이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간에 관계기관은 무얼 했나. 왜 이리 스토킹처벌법을 처음 다뤄본 양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을까. 그래놓고 이제 와서 이렇게 텅 빈 사과를 할까.

가벼운 범죄

피해자로부터 최초로 스토킹 사건을 신고받은 경찰은 1차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가 기각되자, 피해자가 2차 신고한 뒤에는 영장 신청을 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에 대해 “영장 신청하면 기각될 것 같아서”라고 답변했지만, 변호사 자문 결과 “수사 중 재범은 반드시 구속 사유에 해당되는데도 경찰이 영장을 미신청한 것은 형사사법 실무를 전혀 이해 못한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예로, 스토킹 범인이 피해자 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몇 차례 눌렀는데 그것만으로도 ‘수사 중 재범’으로 구속됐다고 한다. 따라서 경찰은 스토킹이 신고될 때 반드시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했고, 설령 기각되더라도 사정변경(피해자에 대한 위해 우려)을 통해 영장을 재신청했어야 한다.

의원실에서 자료를 받아서 확인해보니 경찰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한 범죄 중 1위는 바로 스토킹이었다.(‘2022년 1~8월 신변보호를 요청한 범죄 총 1만8806건 중 스토킹 4266건, 성폭력 3899건, 가정폭력 3443건, 데이트폭력 2143건’, 출처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이 데이터의 원출처는 경찰청이다. 법 시행 직후 2021년 10월21일부터 ‘스토킹’ 유형이 통계에 들어왔는데, 통계에 잡히자마자 1위가 됐다. 이런 상황을 누가 봐도 심상찮게 여겨야 했다. 더구나 알려진 것처럼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피의자 전주환의 혐의는 불법촬영 및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을 동반한 스토킹이었기 때문에 촬영물 유포를 막기 위해서라도 가해자 인신구속은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경찰이 영장을 신청하지 않은 것은 스토킹을 여전히 가벼운 범죄로 봤기 때문이라는 것 이상의 해석은 불가능하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스토킹 범죄가 피해자 위해 위험성이 크고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범죄임이 밝혀지는데,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고 지금까지 법 해석과 집행에 법원의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전주환은 지난 3년간 피해자에게 350여 차례나 연락하고 불법촬영물 유포 협박을 지속했음에도 법원은 ‘거주지가 일정하고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영장을 기각했다.

왜 법원은 전주환의 거주지가 일정하다는 것만 보고, 피해자의 거주지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스토킹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약 75%로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여성신문> 2022년 10월9일치) 가해자는 피해자의 집·회사·전화번호뿐 아니라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가족관계, 가족의 동선까지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스토킹 범죄의 특성을 법원이 학습하고 이해했다면, 일정한 피해자의 거주지를 가해자가 정확히 안다는 것만으로도 형사소송법 제70조의 구속사유 중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를 구속영장 인용의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구애행위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법은 1999년 법안이 처음 발의될 때부터 “스토킹은 단순한 애정표현이나 구애와 구분하기 어려우며, 심각한 스토킹은 형법상 폭행죄, 협박죄, 강요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으므로 별도 법률을 제정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2020년 7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검토보고서)는 이유로 내내 반대에 부딪히다 22년 만인 2021년 10월, 어렵게 통과됐다. 법 통과 전까진 피해자가 신고해도 경범죄로 벌금 8만원 처분이 전부고, 법의 보호를 받으려면 피해자가 맞거나 협박과 강요를 당해야만 가능하다는 논리만 반복했다.

피해자가 숨지기 직전까지 가야 국가 공권력이 작동될 수 있다는 편견 섞인 가혹함이 비례의 원칙·과잉 금지 원칙이라 불리는 법의 본래 속성인 듯 전도되는 순간이다. 이 원칙은 목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사이에 합리적인 비례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대로 적용하면 스토킹처벌법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건강한 사회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하는 목적의 실현에서 경범죄 이상의 처벌은 과하다는 의미였다. 왜? 구애 행위와 구분하기 어려우니까. <죽어야 사는 여자>(Death Becomes Her)라는 영화 제목이 저절로 떠오른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한 서울시의원이 시의회에서 했던 발언(“좋아하는데 그걸 안 받아주고 하니까 여러 가지 폭력적인 대응을 남자 직원이 한 것 같은데요. 31살의 청년입니다, 서울시민이고. 서울교통공사 정도를 들어가려면 나름대로 열심히 아마 사회생활과 취업 준비를 했었을 우리 서울시민의 청년일 겁니다”)과 정확히 일치하는 세계관이다.

피해자 책임

김상범 서울교통공사 사장 “역 근무 제도를 사회복무요원을 재배치하고 특히 여직원에 대한 당직 폐지를, 줄이는 그런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근무 제도를 바꿔나가겠습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제가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살해된 피해자가 여성가족부의 다양한, 상담이라든가 주거나 여러 가지 법률 지원을 받고 자기 자신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충분한 상담을 받았다면, 자신에 대해서 보호하는 조치에 대해서 훨씬 더 강화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9월20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스토킹 피해자 보호 체계 점검을 위한 현안보고’ 자리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공직유관단체는 해당 기관에 성폭력 관련 범죄가 발생했을 때 여성가족부에 통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울교통공사는 통보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내놓은 ‘재발 방지’ 대책은 ‘여직원에 대한 당직 폐지’였다. 미투운동의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펜스룰’이다.

젠더폭력 피해자 보호의 주무부처인 여가부 장관은 피해자가 마치 자신을 보호하는 조치를 하지 않아 생긴 일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상임위 현장에서 이 얘기를 듣고 내가 맞게 들었는지 의심스러워 그날 저녁 속기록을 뒤져봤다. 이제까지 보수 진영에서 피해자 권리가 아닌 피해자 보호주의만을 강조해서 문제된 적은 있었어도 피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건 처음 봤다. 제발, 피해자를 두 번 죽이지는 말자. 법상 주어진 역할, 직무, 책임, 공직자 윤리 다 떠나서 그냥 이제는 부탁하고 싶다.

가벼운 범죄 + 구애행위 + 피해자 책임 = 구조적 성차별

여성을 동료 시민이 아니라 소유물 또는 성적 대상으로만 보고, 수사기관은 폭력을 애정으로 합리화하며, 그마저도 피해자 여성에게 문제의 원인을 찾고 책임을 전가하는 인식. 이게 바로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이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퍼져 있다. 윤석열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한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는 입장은 눈앞에 벌어지는 폭력적인 현실조차 외면해도 괜찮다는 시그널을 줬다. 윤석열 정부는 구조화된 차별을 더욱 악화하고 있다.

스토킹 관련법은 가해자 처벌 근거를 담은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과, 피해자의 보호조치를 담은 스토킹 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스토킹피해자보호법) 이 두 체계로 나뉘었다. 전자는 법제사법위원회에, 후자는 여성가족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스토킹처벌법은 피해자들이 오랫동안 바랐던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하는 안 중심으로 심의될 것이고, 스토킹피해자보호법은 아예 없던 법이라 이번에 제정된다. 특히 피해자보호법에는 스토킹 범죄의 실태 조사, 범죄 예방과 방지를 위한 국가기관 등의 교육이 포함된다. 이 법이 통과되면 스토킹처벌법 시행 9개월 만에 5400여 건 처분된 스토킹 행위가 비로소 국가 공식 실태조사로 분석되고 예방자료로 쓰일 것이다. 두 법 모두 2022년 10월 말 국정감사가 끝나면 심의될 예정이다.

인화성이 큰 사안은 휘발성도 강해 금세 공중으로 흩어진다. 이미 종합일간지 정치면과 사회면에서 스토킹 사건은 사그라지고 있다. 여야가 정치 이슈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와중에도 국회에서 스토킹을 비롯한 젠더폭력을 반드시 다루고, 관계기관이 제대로 이행하는지 들여다보는 일, 그게 피해자를 죽지 않게 하고 죽음을 통해서만 존재증명을 하지 않게 한다고 믿는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가 평범한 일상을 살게 하는 시간은 바로 지금부터다.

이보라 국회 보좌관

*법 만드는 법: 국회 10년차 보좌관이 국민 생활에 밀착한 법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이보라씨는 국회여성정책연구모임 대표와 경찰청 사이버성폭력 수사자문단 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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