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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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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여기는 한라산!”

1993년 동해 바다, 남한이 북한 어선을 구조한 현장

“고맙다” “통일되면 만나자”… 파도도 삼키지 못한 마음 남아
등록 2017-06-13 20:11 수정 2020-05-03 04:28
바다에선 남과 북이 조우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2013년 6월 동해 해상에서 진행된 해군 해상기동훈련 모습. 맨 앞이 광개토대왕함이고 두 번째가 부산함이다. 한겨레

바다에선 남과 북이 조우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2013년 6월 동해 해상에서 진행된 해군 해상기동훈련 모습. 맨 앞이 광개토대왕함이고 두 번째가 부산함이다. 한겨레

“고맙습…. 통일되면 꼭 다시 만나….”

두 손을 입에 모아 간절히 외치는 소리마저 거친 파도가 삼켜버렸다. 손을 내밀어보지만 잡기엔 너무 멀었다. 그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이미 짙은 어둠 속에 희미해지는 표정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가슴에 전해졌다. 그렇게 어선은 북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지난 6월2일과 3일 동해상에서 표류하던 북한 선박 2척과 주민 4명을 구조해 조사 중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5월에도 표류한 북한 어선 1척과 어민 6명이 조사받고 31일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그냥 그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24년 전 동해상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불과 6시간여 만에 휴전 이후 처음 남북이 해상에서 북한 어선을 구조하는 합작 다큐 한 편을 완성했다.

손 내밀어 잡을 수 없었다

조심스레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본다. 1993년 12월3일, 그날도 동해엔 파도가 적잖게 일었다.

동해 최북단 북방한계선(NLL) 근처 해상 경비를 위해 출동한 지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너울과 함께 파도가 점차 높아졌다. 당시 해군의 최신 호위함(FF)인 부산함이었지만 겨울 바다의 거센 파도에 한낱 추풍낙엽일 뿐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상황실과 통신실을 거쳐 함교로 올라갔다. 중위 1년차 전투정보관이 8년 선배인 소령 작전관과 진행하는 당직 교대에 늦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단 몇 분이라도 일찍 교대하는 것이 후배의 도리이다.

“필승, 작전관님, 수고하셨습니다. 식사하십시오.”

“일찍 올라왔네. 날씨가 안 좋으니 접촉물도 없고, 북쪽은 조용한데…. 대신 조함(배의 조종)을 신경 써야겠다. 대원들 힘들지 않게.”

“예, 너울과 파도 방향이 달라 쉽지 않겠습니다. 몇 도 잡으셨습니까?”

“지금은 080도(나침반의 각도로 북쪽이 0도, 동쪽이 90도다)인데 새벽 내 계속 바뀌었어. 배가 너무 흔들린다고 함장님이 두 번이나 전화하셨다. 조함 똑바로 하라고.”

바다는 흰색 파도로 가득했다. 해상 상태가 이 정도면 나올 남쪽 어선도 없고 북쪽도 조용했다. 북한 해군은 우리 해군 함정과 비교해 소형이라 내파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파도와 너울의 방향, 주기를 고려해 배가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침로를 잡았다. 그렇다고 계속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와 너울을 계산해 반대로 변침해야 한다. 그렇게 당직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접촉물 보고드립니다. 방위 ○○○도 거리 ○○NM, 레이더상 소형 한 척.”

전투상황실 전탐 하사가 당직 3시간 만에 첫 보고를 했다. 위치가 북방한계선에서 너무 가까웠다. 일반적인 어선 조업 구역이 아니었다. 함교 레이더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니 레이더가 돌아가는 서너 번에 한 번꼴로 미세하게 하얀 점이 깜박거렸다.

‘원산’이라는 글씨

“펄스(허위 표적) 아니야?”

“10분 동안 지켜봤습니다. 우리 배가 움직이는데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정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펄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새내기 전탐 하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일단 육지 레이더 기지에도 접촉 여부를 확인해보고 인근 항구에 출항한 어선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제야 지상 레이더 기지에서도 뭔가 잡힌다는 연락이 왔다.

“함장님, 접촉물 확인차 이동하겠습니다. 북쪽이라 배가 많이 흔들릴 거라서….”

“대원들에게 함 요동이 있을 거라고 방송해주고 일단 함교와 전투상황실, 41포(40mm포의 한 종류)만 전투 배치 붙이도록. 가스터빈은 준비만 하고.”

접촉물 방향인 북으로 뱃머리를 돌리자마자 100m 넘는 호위함이 휘청하고 기울었다. 아마 점심식사 준비 중인 식당의 식판이 날아다녔을 것이다. 7km 전까지 접근. 가까워질수록 레이더의 표시는 선명해졌지만 육안으론 여전히 식별되지 않았다. 함장님이 함교로 올라왔다.

“혹시 잠수함은 아니겠지? 이 정도 거리면 보여야 하는데….”

“함장님, 총원 전투 배치를 시키는 것이 어떨지요. 식사 시간이긴 하지만….”

그 순간 쌍안경으로 앞을 살피던 조타 중사가 손가락으로 파도 사이를 가리켰다.

“당직사관님, 배가 보입니다.”

흰 파도 사이로 무엇인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주 작은 어선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에서 동쪽으로 60여km 떨어진 공해상이었지만 북방한계선에서 불과 9km 남쪽이었다.

“뚜~뚜~ 총원 전투 배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 전원이 정위치했다. 불과 며칠 전 서해에서 간첩 침투 사건이 있었던 터다. 북한의 경우 어선이라 하더라도 무장하고 있어 과거 우리 함정을 공격한 적도 있었다. 어선 뒤쪽으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원산’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북한 선박이 분명했다. 해군과 공군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들은 귀순 의사가 없었다
1993년 12월3일 발생한 원산호 사건은 해방 이후 남북이 처음 북방한계선(NLL) 남쪽으로 표류한 북한 어선을 구조한 사례로 역사에 기록됐다. <한겨레>도 이튿날인 12월4일치 기사에서 “국방부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 동쪽 58.5 해상에서 연료가 떨어져 표류 중이던 북한 어선 원산호(10t급)를 해군 호위함 부산함이 발견해 이날 오후 3시10분께 쌀·음료수·연료 등을 공급한 뒤 북한 쪽 해역으로 되돌려보냈다”고 보도했다. 김동엽 제공

1993년 12월3일 발생한 원산호 사건은 해방 이후 남북이 처음 북방한계선(NLL) 남쪽으로 표류한 북한 어선을 구조한 사례로 역사에 기록됐다. <한겨레>도 이튿날인 12월4일치 기사에서 “국방부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 동쪽 58.5 해상에서 연료가 떨어져 표류 중이던 북한 어선 원산호(10t급)를 해군 호위함 부산함이 발견해 이날 오후 3시10분께 쌀·음료수·연료 등을 공급한 뒤 북한 쪽 해역으로 되돌려보냈다”고 보도했다. 김동엽 제공

어선을 중심으로 몇 바퀴 돌았다. 남자 4명이 겨울임에도 햇볕이 드는 뱃전에 모여 앉아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적대 의사는 없어 보였다. 1명이 일어서 가라는 것인지 와달라는 것인지 손짓을 했다.

조심스레 접근했다. 배에 탄 이들은 가자미 조업차 원산항을 출항했다가 악천후와 연료 부족으로 8일간 표류 중이라고 했다. 군함과 어선 간에 현측 높이의 차이가 너무 커서 배를 붙일 수 없었다. 가까이만 가도 높은 파도 때문에 부딪쳐 자칫 어선이 침몰할 수도 있었다. 높은 파도를 뚫고 작은 함정이 나오기를 마냥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갑판중사가 겁도 없이 밧줄을 연결해 자양강장제를 넘겼다. 연결된 줄을 통해 물과 먹을거리가 전달됐다. 그제야 북한 어민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사라져 보였다. 고속정과 해경정이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그들은 귀순 의사가 없었다. “연료와 조금의 쌀만 주면 알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어찌됐든 북방한계선을 넘어온 북한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야 할지는 현장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경우가 없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를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들의 뜻대로 바로 돌려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연료와 쌀, 라면, 김치 등을 안겼다. “쌀과 기름을 좀더 달라”고 부탁하는 그들의 목소리엔 이미 남북 간 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미리 나와 있던 북한 경비정 2척이 어선을 좌우로 호송하듯 차고 북으로 향했다. 가지 말라고 말릴 것을, 하는 후회가 순간 들었다. 그래도 원산으로 돌아갔을 북한 어부들은 가족을 재회한 기쁨과 함께 구조에 고마워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다. 그동안 남북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도 있었지만, 현재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다.

지난 5월31일 구조된 북한 어민 송환을 위해 남쪽 당국은 북한에 연락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결국 해경은 북한 어선과 어민을 북방한계선까지 예인한 뒤 풀어줬다. 어선은 자력으로 북으로 귀환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남북 연락 채널이 끊긴 상황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한라산’이 ‘백두산’을 불러주었을 때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모습. 한겨레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모습. 한겨레

2004년 6월4일 남북 군 당국은 양쪽 함정이 해상에서 조우할 경우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약속했다. 남쪽 함정은 ‘한라산’, 북쪽 함정은 ‘백두산’이다. 한라산이 백두산을 불러주고, 백두산이 한라산을 불러주었을 때 남과 북은 서로 오해하지 않고 충돌을 방지할 수 있었다. 우선 남북 간 체결된 군사 합의 사항의 복원이 시급한 이유이다.

이따금 부산함에 올라 다시 동해 바다로 나가는 꿈을 꾼다. 그때는 북한 어선을 구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바다에서 남북한 어선이 함께 고기 잡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중국 어선이 우리 바다에 얼씬도 못하도록 말이다. 물론 그때가 온다면 아마 현장 관리를 하는 것은 해군이 아닌 해경이 되겠지만 말이다.

“백두산, 여기는 한라산, 중국 어선 한 척이 그쪽으로 진입했다. 확인 바란다.”

“한라산, 여기는 백두산, 확인했다. 퇴거 조치 중이다. 수고….”

사족이지만,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 후의 이야기다. 이런 일들이 있고 나면 늘 뒤따르는 것이 논공행상이다. 군인이 공을 세우고 상을 받는 것은 마땅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정말 받아야 할 사람이 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군에서 진급 심사를 앞두고 상은 중요한 점수이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휴전 이후 해상에서 북한 어선을 구조한 최초의 일이라는 점에서 적잖은 포상이 내려왔다. 포상은 북한 어선 구조 작전에 참가한 부대에 분배됐다. 당시 주인공이던 부산함에는 가장 높은 급인 해군참모총장상과 함대사령관상이 주어졌다.

함장님이 부르셨다. 이제 갓 중위를 단 나에게 참모총장상을 주시겠다며 ‘공적조서’를 쓰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서 상은 진짜 공을 세운 사람이 받아야 한다며 함장님께 두 사람을 천거했다. 원산함을 처음 발견한 조타 중사와 전탐 하사였다. 함장님이 웃으시며 그렇게 하자고 하셨다.

시간이 지난 뒤 담당 기무사요원이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왜 상을 양보했는지 물었다. 그는 “혹시 누가 받을 것인지를 두고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냐”고 했다. 진급 대상자도 아닌 중사와 하사가 큰 상을 받은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배 분위기를 보고 판단하라며 돌려보냈다.

다음해 2월 내 앞으로 국방부 장관상이 전달됐다. 공적조서 한 장 쓰지 않고 받은 것이다. 기무사요원을 부두에서 또다시 만났다. 그는 웃으며 엄지를 쳐들었다. “전투정보관님, 부산함은 사랑의 구축함입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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