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사관학교 생도 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을 꼽으라면 분열 연습이었다. 분열은 부대나 무기 차량 등이 대형을 갖춰 단상 앞을 행진하면서 경례하는 의식으로 통상 ‘군사 퍼레이드’라고 한다. 반면 열병은 지휘관이나 귀빈이 직접 정렬한 군대의 앞을 지나면서 검열하는 의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열병식에는 열병과 분열 의식이 포함된다. 먼저 도보나 차량을 이용해 열병을 실시하고 마지막에 참가한 부대가 사열 단상을 통과하는 분열식을 선보인다.
인민군 창건일 원래 4월25일열병식에는 다양한 무기들이 나와 눈길을 끌지만 행사의 꽃은 단연 자로 잰 듯 오와 열을 맞춰 행진하는 절도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다. 이는 하루이틀 만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관생도였을 때는 거의 매주 한 번씩 분열 연습을 했다. 졸업식 같은 큰 행사를 앞두고는 열 일 제쳐두고 연병장을 수없이 돌았다. 국군의 날 행사 때는 2개월 전에 상경해 성남비행장에서 연습했다. 박자감이 없었던 탓인지 아래위로 흔드는 나의 팔은 늘 반 박자씩 늦었다. 그 탓에 내가 속했던 열은 늘 늦게까지 남아 연병장을 더 돌아야 했다. 물론 나와 같은 열에 속한 선배들의 ‘꼭지’도 함께 돌았을 것이다.
역대 최강 한파 속에 평양 인근의 미림 비행장에서는 많은 북한 군인들이 활주로를 돌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가오는 2월8일은 조선인민군 창건일 70주년이다. 이날 북한 군인들은 ‘북한판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와 달리 이번 동계훈련 기간에 북한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군 훈련 현지 지도 관련 보도가 잠잠한 것도 평창겨울올림픽이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영향 때문이 아니라, 창군일 행사 준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북한군의 정식 명칭은 ‘조선인민군’(朝鮮人民軍· Korean People’s Army)이다. 조선인민군은 1948년 2월8일 만들어졌다. 북한은 정권 수립 7개월 전인 2월8일 기존 ‘인민집단군’을 ‘조선인민군’으로 개칭하고 정규군 창설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29년 동안 김일성은 5년마다 한 번씩 2월8일에 인민군 창건을 축하하는 연설을 했다. 김일성은 1952년 12월24일 인민군 고급군관회의에서 행한 ‘인민군대를 강화하자’라는 제목의 연설에서도 “1948년 2월에 조선인민군을 창건하였습니다”라고 언급한 적 있다.
그러나 북한은 1978년 들어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만들었다는 1932년 4월25일에 맞춰 조선인민군 창건 46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북한은 자신들의 군대인 조선인민군의 모체가 항일 무장투쟁 시기에 김일성이 조직해 활동했다는 항일 빨치산 부대,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선전해왔다. 이러한 날짜 변경이 이뤄진 까닭은, 김일성의 후계자이던 김정일의 주도로 북한 역사를 ‘김일성 중심 주체사관’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백두산 혁명의 정통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2012년 펴낸 저서 에서 “김일성은 1932년 봄, 만주 안도현에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부대였다. 북한에선 그 발적날인 4월25일을 조선인민군의 창건일로 축하하고 있다”고 적었다.
‘선당후군’ 역사를 확고히 하다그로부터 40년 만인 지난 1월23일,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2월8일을 ‘조선인민군창건일’로 기념할 것을 결정했다. 대신 4월25일은 ‘조선인민혁명군창건일’이라고 명칭을 변경했다. 선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한 것을 일정 부분 유지하면서 1978년에 소급한 역사를 다시 되돌렸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자신이 아버지 김정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 젊은 김정은답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길을 가겠다는 자신감이랄까?
북한은 정부보다 당이 우선이 되는 ‘당 국가’(Party State)다. 군은 국가가 아닌 ‘당의 군대’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노동당은 1945년 10월10일 만들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은 1948년 9월9일이다. 1932년 4월25일이 창군일이라면 군이 당보다도 먼저 생겨난 셈이다. 공식적으로 북한 정부 수립 이전에 군대가 먼저 창설됐으니 국가 군사기구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없다. 실제 북한군은 1948년 2월8일 만들어질 때도 당이나 국가와는 별개였다.
지금껏 북한은 당 우선 노선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김정일 시기 ‘선군시대’를 거치면서 군의 역할과 위상이 강화됐다. 당의 군대인 조선인민군이 실제로는 수령 개인의 군대라는 점을 더 크게 부각했다. 김정일 스스로 1964년 당 사업에 참여한 것보다 4년 일찍 1960년 선군혁명 영도를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 모든 것을 당 중심으로 복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1980년 제6차 조선노동당 당대회를 개최한 뒤 36년 만인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를 열며 선군정치를 통한 비정상적 국가 운영 방식에서 탈피해 ‘당 국가 체제’에 맞게 노동당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2월8일로 돌려놓은 것도 ‘1945년 당 창건, 1948년 군 창건’이라는 역사적 순서를 공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노동당의 기원은 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으로 보고 조선인민군의 뿌리를 1932년 항일 빨치산 부대로 정리하면서 ‘선당후군’의 역사를 확고히 하고 있다.
북한이 조선인민군 창설일을 1932년 4월25일에서 1948년 2월8일로 되돌린 것을 단순히 당 우선의 역사를 현실화한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김정일과 차별화된 김정은의 현실적 감각으로 역사를 정상화한 것이란 측면이 강하다.
‘투 트랙’ 전략 해석도 과대망상2018년은 북한이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2월8일로 복원한 첫해다. 그런 의미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이날을 의미 있게 기념하겠다고 했으니, 창군 70주년 기념 군사 열병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한다면 핵무력 완성 선포 뒤 첫 퍼레이드라는 점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 14형과 15형을 끌고 나와 과시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 공개한 적이 없는 신형 무기를 끌고 나올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바로 다음날인 2월9일이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일이란 점이다. 공교롭게 날짜가 겹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악영향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역사를 수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의 조선인민군 창건일 행사를 평창올림픽과 무리하게 연결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또 이번 행사를 북한이 북핵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대외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획했다고 보는 것도 곤란하다. 북한이 핵과 남북관계를 분리해 ‘투 트랙’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림픽 개막식 하루 전에 군사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투 트랙 전략의 하나로 보는 것은 우리 중심적 해석이고 과대망상이다.
2016년 제7차 당대회 이후 김정은이 인민에게 보여준 것은 ‘핵무력 완성’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은 한반도 정세에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언젠가 제8차 당대회도 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북한의 열병식은 내부적 의미가 크다. 어쩌면 북한에는 올림픽 참가보다 창건일 70주년 열병식과 9월9일 열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이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밝힌 ‘민족적 대경사’일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이 혹한에서도 북한군은 미림 비행장을 돌고 또 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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