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국씨의 출생지인 충남 연산(連山)에서 씨가 다섯 살 때에 씨의 진 아우 사민군과 24세 된 어머니를 남겨두고 가장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로부터 씨의 가정에는 눈물의 바다를 이루기 시작이다. 어머니 안국당씨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눈물겨운 상청 앞에서 3년간이나 보냈다.” ①
두 형제의 불행한 어린 시절에 대해 뒷날 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전했다.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형은 5살이고 동생은 이제 막 갓난아기 때였다. 두 사람은 인생의 첫 출발점부터 커다란 결핍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아버지 김경수(金慶秀)가 어린 아들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주였다. 떵떵거리는 대지주는 아닐지라도 한 해에 수백 석의 소작료를 거두는 유족한 집안이었다. 거주지인 충남 연산에는 물론이고 강원도에도 땅이 있었다.②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범상치 않은 이름을 남겨주었다. 큰아이에게는 생각 사(思)에 나라 국(國)자를 붙였고, 작은아이에게는 백성 민(民)자를 지어줬다. 국가와 민중을 생각하면서 살라는 뜻이었으리라. 가운데에 위치한 생각 사(思)자는 항렬이었다. 그의 본관은 연안 김씨였는데, 그 22세손의 항렬자는 ‘○수(秀)’이고 23세손은 ‘사(思)○’였다. 젊은 아버지는 문중의 항렬에 따라 자식들의 이름을 짓되, 그 속에 바람직한 삶의 규범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 약소국 조선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절이었다. 어린 아들들이 공동체의 선과 정의를 위해 살기 바랐던 아버지의 강렬한 내면의식이 느껴진다. 그는 의병 봉기에 공감하는 위정척사파 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근대화 정책을 지지하는 소장 개화파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젊어서 요절한 김경수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기가 막힌 이는 젊은 아내였다. 20대 중반 새파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된 안씨 부인의 처지는 참으로 딱했다. 평생을 남편 없이 홀로 지내야 할 뿐 아니라 어린 두 자식을 키워야 했다. 그녀는 당대의 일반화된 규범을 따랐다. 어린 자식들을 거두는 한편, 남편 삼년상을 치렀다. 사후 2주년에 지내는 제사인 대상(大祥)까지 마쳤다.
삼년상을 마친 안씨 부인은 시댁을 떠나 친정에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붙이가 사는 충북 충주로 이사했다. 친정 부모와 오라비, 자매에게 의지하면서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두 아이는 이제 그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었다.
두 아이는 병치레가 잦았던 것 같다. 진맥을 위해 한의원들이 자주 출입했다고 한다. 더러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들도 다녀갔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안씨 부인은 불길한 말을 듣곤 했다. 형제가 둘 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요절한다는 말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안씨 부인은 이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두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실행에 옮긴 것을 보면 말이다. 그녀는 절대자에게 귀의해 그 가호를 빌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멀리 떨어진 금강산의 유명한 사찰 유점사(楡岾寺)를 택했다.
안씨 부인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입산했다. 자신은 머리를 깎고 장삼을 몸에 둘렀으며, 아이들에게는 독선생을 붙여서 한학 교육을 했다.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호적부에 기재된 ‘안국당’이란 그녀의 이름은 아마 유점사 시절에 불리던 당호인 듯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영특했다. 부처님의 도움이 있었던지, 두 아이는 몇 번만 일러주면 곧 돌아앉아서 줄줄 외울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아픈 데 없이 건강히 잘 자라주었다.
아비의 뜻대로 3·1혁명 참가한 형제어머니 안국당은 분별 있는 여성이었다. 산중에서 한학만 배우다가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서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신교육을 이수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보성학교에서 수학했다. 보성학교란 1906년에 신입생 240명을 모집해 개교한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수송동 44번지 오늘날 조계사 자리에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친 뒤 한때 함경도 덕원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요동반도에 위치한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 들어가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중국어를 배운 것도 이때였다.
김사민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 소학교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조선보병대란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조선조 왕가 경비를 위해 잔존시켰던 조선인 군대의 명칭이었다. 1931년까지 존속했는데, 해산 당시 병력은 200명이었다. 무기와 탄약, 인사관리 등을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장했다. 그는 기질적으로 무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부대에서 3년간 근무했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망해버린 조국의 해방을 위한 길에 기꺼이 나섰다. 두 사람은 1919년 3·1혁명의 참가자였다.
3·1혁명 당시 학생대표를 지낸 강기덕(康基德)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사국이 입국해 학생층의 독립선언문을 따로 기초했다고 한다.③ 그뿐만이 아니다. 3·1혁명의 한 전환점인 한성정부 수립의 계기를 만든 이도 김사국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13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 사건을 가리켜 ‘국민대회 사건’이라고 한다. 김사국은 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고,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이 투옥 중일 때 아우가 새로운 투쟁을 조직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내방했을 때, 그에 호응해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대 시위운동을 기획했다. 김사민은 이 사건으로 동료 15인과 함께 체포됐다. 그 결과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외딴섬 덕적도에 1년간 거주 제한 명령을 받았다.
두 형제는 민족독립운동 투사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라는 점에서도 공통성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었다. 비합법 영역에선 공산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합법 공개 영역에선 노동·청년·사상단체 운동의 확장을 꾀했다. 두 사람이 참여한 비밀결사는 조선공산당(약칭 중립당)과 고려공산청년회였다. 특히 김사국은 중립당의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한(金翰)과 더불어 양대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김한이 사회주의운동의 ‘책사형’ 지도자라고 한다면, 김사국은 ‘투사형’ 지도자라고 평가받았다.④
김사국·김사민 형제는 1922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5인 간부진에 나란히 취임했다. 국제공산청년회 가입 단체로서 조선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최초 사회주의 재판, 신생활사 사건합법 공개 영역에서 두 사람의 활동 거점이 된 단체들이 있었다. 청년운동에선 서울청년회가, 노동운동에선 노동대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두 형제는 이 단체들을 거점으로 하여 사회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거점 역할을 한 사회단체 가운데 서울청년회가 두드러진 활동성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서울파’라고 불렀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바로 서울파 공산그룹의 유력한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김사국은 동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군의 머리는 천하에 가장 밝아서,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비평은 듣는 자로 하여금 경탄케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⑤
김사국은 1922년 말부터 2년 동안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이른바 ‘자유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경찰의 추적을 받은 그는 좁혀오는 체포망을 피해 해외 망명길을 택했다. 망명지는 북간도와 연해주였다. 한 글자씩 따서 ‘해도’라고 묶어 부르던 곳이다. 일찍이 에서 ‘해도’로부터 진인이 출현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사람들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구원할 근거지가 바로 북간도와 연해주라고 생각했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들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이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 속에 배태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서구에서처럼 노동운동의 한 갈래로 사회주의가 발전돼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특징은 식민지를 경유해 근대사회로 진입한 광범한 비서구의 각 민족과 국가의 사회주의운동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마는, 사람들은 일단 불행에 빠지면 과거의 불길한 예언을 곧잘 상기하는 법이다. 우연일지언정 외견상 어쩜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 놀라울 때가 있다. 두 형제의 운명이 그랬다. 마치 예언이 적중한 것만 같았다.
아우 김사민이 먼저 화를 입었다. 그의 나이 26살 되던 1923년 2월1일이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는 지목을 받던 ‘신생활사(新生活社)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은 터였다. 죄목은 “자유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 취지서를 기초했으며, 그 취지서를 잡지에 게재”한 혐의였다.⑥ 자유노동조합이란 1922년 10월29일 창립한 노동단체로서, 서울의 지게꾼과 막벌이꾼 200여 명을 회원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었다. 그즈음 다른 노동단체들이 주로 지식인 출신자로 구성된 데 비하면, 이채롭고 본격적인 노동자 단체였다. 일제하 노동운동 역사 속에 획기적 의의를 갖는 조직이었다. 그 단체의 설립을 김사민이 주도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단체를 불온하게 여겼다. 김사민을 비롯한 간부들을 체포해 재판에 부쳤다. 간신히 체포를 피한 다른 간부들은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코뮤니스트김사민은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불법 감금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옥중 규칙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2월1일 그날도 그랬다. 유죄판결을 받은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옥중 규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간수장에게서 ‘단단히 설유(말로 타이름)’를 받아야 했다. 아마 가혹한 징벌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 뒤 간수 두 사람의 감시가 붙은 상태에서 구치감 문을 들어설 때였다. “김사민은 용맹하게 간수의 칼을 빼어 문턱에 섰던 간수 요코오 마사이치(橫尾政一)의 머리를 찍었”다고 한다.⑦ 간수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호송됐다. 이 사건은 김사민의 꺾이지 않는 기개와 거센 기질을 잘 보여준다.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조선인 사회에서 큰 주목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반항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총독부 쪽의 판단과 보도 통제로 인해 다시는 신문 지상에 거론되지 못했다. 가혹한 보복을 당하지 않았을까, 몸은 무사한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무려 석 달이 지난 뒤에야 겨우 가족 면회가 허용됐다. 그해 5월3일 둘째아들을 면회하고 나온 어머니 안국당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면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사민은 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앞뒤로 간수 3명의 부축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머니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겨우 눈을 한 번 들어보았을 뿐 아무 소리도 없이 멍하게 허공만 쳐다봐다고 한다.⑧ 정신이상 증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가혹한 보복과 폭력을 가했기에, 그처럼 자긍심 높던 정신이 끝내 파괴되고 말았을까.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렸다.
김사민은 이후 온전한 정신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다. 1924년 7월 만기 출옥했지만, 노동운동 일선에 복귀하지도 못했고 정상적인 사생활도 영위하지 못했다. 물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그를 가엾게 여기는 옛 동료들의 호의로 청년총동맹 회관 한쪽에 자그마한 숙소를 마련했지만, 종신토록 어머니 안국당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깎지 않은 채 서울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했다. 그 때문에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사회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신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은 26살 때 죽고 말았던 것이다.
아우의 삶을 파괴한 것이 식민지 통치 기관의 폭력인 데 반해, 형 김사국의 삶을 파괴한 것은 질병이었다. 1924년 5월 해외 망명지에서 서울로 되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폐결핵에 걸려 있었다. 중증이었다. 폐결핵이란 몸 안에 잠복해 있던 결핵균이 신체의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발병하는 질환이었다. 그는 해외 망명지에서 이 병을 얻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불안정한 숙소, 끊임없는 업무 스트레스와 피로 누적이 그의 면역력을 약화했던 것이다.
김사국은 귀국 뒤 가족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내이자 동지인 사회주의자 박원희(朴元熙)의 병구완을 받았다. 병세가 오르락내리락 변동이 있었다. 증상이 혹은 더하고 혹은 덜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 시절 폐결핵은 치사율이 높은 위험한 질병이었다. 게다가 김사국은 투병 중에도 일손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때에는 단일한 전국적 전위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기 위해 여러 비밀 공산주의 그룹이 밀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내지 중심론을 표방하며 이 논의를 주도했다.
35살 폐결핵으로 사망한 김사국이러한 긴장과 과로가 그의 병세를 악화했음이 틀림없다. 급기야 귀국 2년째 되던 때 걷잡을 수 없이 병이 깊어졌다. 1926년 5월 초 입원 치료를 위해 관립 총독부병원을 비롯해 여러 사립병원의 문을 두드렸으나 어디서도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병이 너무 깊어서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김사국은 1926년 5월8일 사망했다. 향년 35살이었다.
어머니 안국당은 오래 살았다. 71살까지 살았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섭섭한 나이지만, 그때만 해도 환갑을 넘기면 장수했노라고 축복받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만년은 궁핍했다. 수중의 재산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생활의 방도는 탁발이었다. 머리 깎고 장삼을 갖춰 입은 그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경문을 읽어주고 얻는 탁발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녀는 맏아들 김사국을 보낸 이후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그날그날 밥때를 챙기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맏아들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노모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국이 제사나 한번 지냈으면…. 노인의 탄식은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노라고,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던 신문기자는 그렇게 썼다.⑨
①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2)’, 1928년 1월8일치
②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 1933년 5월4일치
③ ‘3·1절을 앞두고 떠오르는 피의 기록, 당시의 전국학생대표 康基德氏談’ 1950년 2월26일치
④ 조봉암, , 1957년 2·3·5월호. , 세명서관, 344∼345쪽, 1999년
⑤ ‘소식’, , 1922년 2월15일
⑥ ‘인쇄기 1대도 몰수’ 1923년 1월17일치
⑦ ‘재옥 중의 金思民, 看守의 검으로 看守를 斫傷’, 1923년 2월2일치
⑧ ‘김사민의 위독설’ 1923년 5월9일치
⑨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 1933년 5월4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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