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장님, 죄송합니다. 출동 중인 ○○함이 캐스렙(CASREP·Casualty Report·장비고장보고)을 쳤습니다. 대신해서 A구역 경비차 나가셔야겠습니다.”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켰지만 전화기 너머 목소리엔 위엄이 있었다.
“입항한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김 대위, 우리밖에 없는가?”
“△△함은 지난번에도 긴급 출항을 한지라….”
1998년 초여름, 강원도 양양에서 북한의 유고급 잠수함 침투 사건이 있었던 때라 동해를 지키는 해군 1함대에선 유난히 함정들의 해상 출동이 많았다. 함정 대부분이 한 달 중 25일 이상을 바다에 떠 있었다. 저녁이면 동해항으로 들어와 밤새 기름과 음식을 채우고 아침에 다시 나가야 하는 함정도 있었다.
해군력 보여주는 함정운용계획화대위 시절 1함대 함정운용계획(EM·Employment Schedule)을 수립하는 장교였던 당시, 나는 사무실에서 거의 먹고 자야만 했다. 그날도 다른 ○○함의 엔진 결함으로 운용 계획이 급작스럽게 바뀌어, 쉬고 있어야 할 함 승조원과 함장에게 출항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안타깝고 미안할 노릇이었다.
“내일은 함 승조원들이랑 축구도 한번 하고 승조원들에게 고기라도 구워주려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김 대위가 왜 죄송해. 다들 힘들고 고생하는데. 출항 시간은?”
“함대에선 빠르면 빠를수록…, 언제 가능하시겠습니까?”
함장님은 “허허” 웃었다.
“기름과 식량은 이미 채워두었으니 영외자들 비상소집해서 준비되는 대로 바로 나가도록 하지.”
“함장님, 감사합니다.”
새벽 3시, 그렇게 함정 한 척이 또 긴급 출항했다. 나는 부두에 나와 마지막 홋줄을 걷어주었다. 출항을 알리는 기적 소리에 묻혔지만 함장님과 대원들을 향해 경례와 함께 이리 외쳤다.
“필승! 안전 항해를 기원합니다.”
해군의 모든 함정은 매년 그해 작전 소요를 고려해 언제 어디서 어떤 작전 임무를 수행할지 사전에 함정운용계획을 수립해둔다. 통상적으로 한번 작전을 나가면 수리 등 정비 시간을 거쳐 훈련한 뒤 다시 작전에 투입된다. 작전-수리-훈련이라는 삼교대로 운용되는 것이다.
일정 기간 작전 임무를 수행한 함정은 수리를 해야 한다. 함정 엔진의 운전 시간에 따라 수리가 결정되기 때문에 언제쯤 수리에 들어갈지 함정별로 순서와 기간이 거의 정해져 있다. 수리 기간 중에 함정 대원들은 돌아가며 달콤한 휴가를 즐긴다. 수리와 휴식을 마치면 다시 작전에 투입되기 전 훈련해 팀워크를 다진다. 출동을 나가면 대원들은 다음 수리를 기다리며 힘을 낸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함정운용계획에 따라 동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는 수척의 전투함이 떠 있고, 많은 고속정이 전방기지에 전개해 있다. 심지어 구축함 중 한 척은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에서 해양안보 작전을 수행하는 청해부대로 약 6개월씩 나가 있어야 한다. 2009년 이후 현재까지 24번째 파견된 함정이 지금도 아덴만에 있다. 매년 사관생도들의 해외 순항 훈련에도 2척이 차출되고 림팩(RIMPAC·환태평양해군훈련) 등 해외 연합훈련에도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
전투함뿐 아니다. 상륙함이나 여타 지원함들도 빡빡한 일정이긴 마찬가지다. 6척밖에 없는 상륙함은 해병대 상륙훈련과 함께 해상 물자 이동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함정운용계획의 집행은 바로 해군의 움직임, 해군력을 보여주는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은 분 오면 불려나가는 ‘행사배’함정운용계획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긴다는 점이다. 부득이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고장으로 경비함정을 바꾸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고장 나서 신세를 지게 된 함장이 나중에 그만큼 상대 함장 몫의 해상경비를 품앗이하면 된다. 그럴 때면 두 함장 사이에서 함정운용계획을 수립하는 장교는 능청스러운 중재자 역할도 한다.
과거 내 함장 경험에 비춰보면, 함장 처지에서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함정 수리 기간이다. 수리 시기를 놓치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승조원들도 수리 기간에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기에 휴가 순번을 정해 그날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수리가 예정 없이 뒤로 밀리면 여지없이 승조원들의 가족으로부터 협박(?)과 함께 항의가 빗발친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함정운용계획을 수립하는 장교에게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최초 계획에 맞춰 함정들을 불러들여 수리받을 수 있게 하냐는 거였다. 이때 가장 난감한 일이 예정에도 없던 ‘행사 차출’이다. 함대에 높은 사람이 온다고 하면 이른바 ‘행사배’라는 최신 함정을 차출해 내보내기 일쑤였다. 심지어 전방 해역에서 경비 중인 최신 함정을 불러들이고 다른 함정을 내보내는 일도 있었다. 해군 홍보라는 미명 아래 경비 공백은 물론 함 승조원들의 사기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런 폐단 때문에 행사에 함정을 차출하거나 동원하는 걸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올해는 제69주년 국군의 날 행사가 9월28일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다. 처음엔 계룡대에서 열 계획이었다가 행사를 20여 일 남기고 갑작스럽게 장소를 변경했다. 변경 이유는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불안해하는 국민의 염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다. 육·해·공군 합동 전력이 참가 가능한 해군기지에서 실시해 국민이 신뢰하는 국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국민에게 임전필승 의지를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국군의 날 행사는 1956년 시작돼 1978년까지 매년 대규모로 실시해왔다. 1979∼90년 3년 주기로 행사를 실시해오다, 1993년부터는 5년 주기로 대통령 취임 연도에 맞춰 실시해왔다. 2013년에는 서울공항에서 실시했다. 대규모 행사를 제외한 중간 소규모 행사들은 모두 3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에서만 실시해왔다.
대통령 취임 연도인데도, 올해 행사는 소규모로 치러질 예정이다. 대신 앞으로 3군의 전력을 골고루 보여주는 현장 위주의 장소를 찾아 개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첫 시도가 2함대 사령부가 있는 평택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노력임이 틀림없다.
운용 계획 변경시 양해 구하는 미군계룡대에서 평택항으로 장소가 변경되면서 행사 내용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공개된 행사 내용을 보면 기념식 시작 전 함정 사열만이 추가됐을 뿐이다. 항내라서 함정 퍼레이드 같은 함정 기동을 보여줄 수 없다. 단지 부두에 정박된 함정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 외 열병, 3축 체계 영상, 고공 강화와 항공기 기동, 무술 시범, 전략무기 공개 등은 계룡대에서 행사를 할 때보다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없다. 평택항에 없는 행사 단상을 계룡대 규모로 새로 만들려면 계획에 없던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2천여 명의 행사 병력이 묵을 곳이 없어 해군에 단 1척뿐인 다목적 상륙함 독도함과 상륙함 2척이 숙소용으로 투입됐다. 또 부두 정박 함정 사열을 위해 해군의 최신 함정을 종류별로 집결할 예정이다. 결국 행사에 투입된 함정뿐만 아니라, 나머지 함정들의 사전 계획·운용까지 모두 조정해야 한다. 결국 도미노처럼 해상 작전이나 훈련, 수리 등 일정 변경이 불가피해진다.
해군사관생도 3학년 때 미 해군 순양함 CG-52 벙커힐(Bunker Hill)에 승조해 약 2개월간 지낼 기회가 있었다. 파견 기간 중 출동 임무를 마치고 일본 요코스카항에 들어가려다 갑작스러운 임무 부여로 입항이 며칠 늦어졌다. 다가오는 7월4일은 미국 독립기념일이고 입항하면 바로 수리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함장이 직접 함내 방송을 통해 승조원들에게 알렸다. 그 모습을 당시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다.
올봄 미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도 한반도로 재출동하면서 출동 기간이 연장됐다. 이때 칼빈슨호를 지휘하는 미 해군의 제임스 킬비 준장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이런 글을 남겼다.
“장병들이여, 우리 (칼빈슨함의) 배치가 30일 연장됐으며, 이는 한반도 인근 해역에 지속적으로 머물기 위해서다.”
예기치 않은 급작스러운 재출동과 관련해 장병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배려한 메시지였다. 이런 알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경우, 국군의 날 행사 장소를 평택항으로 변경하면서 숙소로 차출된 독도함과 2척의 상륙함, 그리고 함 행동이 변경된 다수의 함정 승조원에게 누가 어떤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을까.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지 못한 가족들과 여행계획을 잡아놓은 부사관 가장과 첫 휴가에 들떠 있을 신병과 이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그 가족들이 TV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어떻게 볼지 자못 궁금하다.
또 행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장소를 급작스레 변경한 것이 국민에게 이번 행사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계룡대를 벗어나 해군에서 처음 하는 의미 있는 국군의 날 행사임에도 무리한 행사 추진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해군 출신 장관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할 수 있다.
왕비 모시기에 급급한 원님처럼옛날이야기가 떠오른다. 남쪽 바닷가 고을에 임금이 왕비와 함께 봄놀이를 가게 됐다. 왕비가 조개 줍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마을 원님이 듣게 되었다. 때이른 3월인지라 갯벌에 조개가 있을 턱이 없었다. 걱정이 늘어진 원님은 생각다 못해 마을 어부들을 풀어 먼 남쪽 섬에 가서 조개를 잡아와 마을 앞 갯벌에 뿌렸다. 실제 왕비가 조개를 잡으며 즐거워했는지 전해오지 않는다. 이후 원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다. 크게 출세했든 백성들의 원성으로 쫓겨났든, 개인의 상상에 맡기겠다.
촛불을 들었던 국민이 군에 바라는 것은 국군의 날 행사가 아니다. 국민이 원하는 건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라 우리 군이 환골탈태한 모습이다. 군은 뼈를 깎는 각오로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자세를 보여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대규모이든 소규모이든 국군의 날 행사는 그다음에 보여줘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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