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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사랑의 불꽃

남편 김사국과 조선 독립운동 근거지인 북간도에 사회주의 기지 건설한 혁명가 박원희…

프롤레타리아혁명 위해 명멸한 삶
등록 2017-06-29 15:08 수정 2020-05-03 04:28
이번호 역사극장의 주인공인 박원희의 남편 김사국과 그 동생 김사민의 사연은 제1165호(2017년 6월12일치) 역사극장 ‘혁명으로 살다간 붉은 형제’에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_편집자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스틸컷. (주)쇼박스 제공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스틸컷. (주)쇼박스 제공

박원희(朴元熙)는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회령의 한 여관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26살 나던 1923년 7월4일 아침 8시의 일이었다. 더운 때였다. 전날 최고 기온이 섭씨 31.5℃까지 올랐다. 아침나절이라 선선했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회령경찰서로 압송됐다. 국경 너머로 잠입해 들어오는 반일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적발해내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경찰서였다.

북간도 최초 사회주의 탄압 사건

혼자가 아니었다. 셋이 함께 붙들렸다. 젊은 여성이 둘이고, 남성이 하나였다. 모두 북간도의 중심 도시 용정에 소재하는 중등학교 동양학원 관계자였다. 박원희는 그 학교의 영어 교사였고, 32살의 건장한 남성 김정기(金正琪)는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서무주임이었다. 그는 북간도를 기반으로 조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의 아들로도 유명했다. 그간 경영해오던 용정 지국 경영을 접고 동양학원 설립과 운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나이 어린 진규(陳奎)는 그 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 세 사람은 동양학원이 파견한 강연단 멤버였다. 군중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능란하게 연설할 수 있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강연이 예정된 날이었다. 동양학원이 기획한 여름방학맞이 조선 내지 순회강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회령을 필두로 청진·함흥·원산 등 함경남북도의 큰 도시들을 돌아 서울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참이었다. 7월 한 달 내내 12개 도시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강연회 수입을 모아서 학교 확장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해 4월 설립된 신생 학교 동양학원은 북간도 조선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학년 204명, 2학년 54명이 등록해 학생 총수가 258명에 달했다. 설립 첫해 첫 학기가 지났을 뿐인데도 이미 학생들이 차고 넘쳤다. 학교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들었다. 북간도 동포들의 기부에 힘입어 새 학교 부지 4천 평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건축비가 모자랐다. 이 난관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학교 관계자들은 순회강연을 고안해냈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동양학원의 존재를 선전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었다.

경찰은 무슨 혐의로 강연단을 체포했는가? 사람들은 강연 내용이 불온할까봐 미리 검속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경찰의 목표는 강연회를 봉쇄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박원희 일행은 체포된 이튿날 첫 열차편으로 용정의 간도총영사관 경찰서로 이송됐다. 이른바 ‘동양학원 사건’이라고 하는 북간도 최초의 사회주의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양학원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북간도 망명 생활의 한 결실이었다. 부부가 해외로 뛰쳐나간 것은 1922년 11월 서울에서 발발한 자유노동조합 사건 때였다. 임박한 체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더욱 적극적인 목표를 수립했다. 조선 독립운동의 전통적 근거지인 ‘해도’(연해주와 북간도)에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3·1운동 출소자와 인텔리 여성의 결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박원희. 전명혁 제공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박원희. 전명혁 제공

부부는 용정 시내에 은밀하게 거처를 마련했다. 행정구역상으로 ‘중국 간도 용정촌 제4구’였다. 용정은 북간도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수도라고 불러도 좋은 곳이었다.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데는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부부는 서울에서 조직한 것과 동일한 유형의 두 가지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하나는 공산당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청년회 조직이었다. 전자는 조선공산당(중립당) 지부에 해당했다. 달리 말하면 서울파 공산그룹의 북간도 지방조직이었다. 후자는 1923년 4월 결실을 맺었다. ‘간도공산청년회’라는 명칭의 비밀결사를 창립 멤버 13인으로 처음 출범시켰다.

부부는 합법적 공개 영역 활동도 중시했다. 용정에 설립한 동양학원과 영고탑(寧古塔)에 세운 대동학원이 대표적 보기였다. 이 학교들은 서울파 공산그룹이 사실상 주도하는 합법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동양학원은 급진적 학생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지 역할을 했다. 1923년 5월 이 학교 학생회의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현대의 모순을 어이할까’ ‘현대와 종교’ ‘지상천국’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맡은 세 학생이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뒷날 이 강연회는 북간도 사회운동의 효시라고 평가받았다.

용정 생활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바쁘고 긴장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혼기에서 벗어나지 않은 젊은 부부에겐 두 사람만의 달콤한 생활이기도 했다. 결혼 뒤 둘만의 오붓한 공간이 주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둘이 결혼한 때는 1921년 7월이었다. 3·1혁명에 참가했다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랑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마치고 교사로 재직 중인 인텔리 여성의 결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신문에까지 보도됐다. 는 ‘김사국씨 결혼식, 금 30일에 거행’이라는 제하에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결혼 뒤 두 사람이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신부의 친정집이었다. 당시 행정구역 명칭에 따르면 ‘경성부 계동 125번지’였다. 말하자면 신랑이 처갓집에 얹혀살았던 것이다. 서울 북촌에 위치한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일찍 사망했으므로 그 집의 호주는 신부의 큰오빠 박광희(朴廣熙)의 몫이었다. 입학난구제기성회,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 등의 활동에 참여한 것을 보면 큰오빠도 사회주의자이거나 그 운동에 공감하는 동조자였다.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사상적 유대가 둘 사이를 더욱 가깝게 했을 것이다.

용정 시절은 젊은 부부에게 자유롭고 오붓한 둘만의 사적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진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젊은 새댁 박원희는 용정 시절에 첫아이를 잉태했다.

박헌영 부인 주세죽과 조직 결성

동양학원 사건은 김사국·박원희 부부가 북간도에서 쌓아올린 공든 탑을 허물어뜨렸다. 합법과 비합법 공간을 교차하면서 양성했던 젊은 혁명가들이 대거 투옥됐다. 3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간도총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고 그중 16명이 예심에 회부됐다. 박원희도 그 속에 포함됐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용정 감옥에 투옥됐다. 임신 중이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옥고가 더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박원희의 적극성과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옥중에서 미국인 여성 사회주의자이자 시청각 장애인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번역했다. 영어 교사를 해내고, 영문 저술을 번역할 만큼 그녀의 영어 능력이 출중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행히 박원희의 투옥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그녀는 예심 종결과 더불어 방면 처분을 받았다. 수감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고, 게다가 임신 중이었음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석방된 박원희는 귀국길에 올랐다. 남편은 경찰 수배망을 피해 지하로 잠행 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용정, 영고탑을 오가며 비밀결사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출산을 앞둔 임신부임을 감안했을 것이다.

서울로 되돌아온 박원희는 친정집에서 기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4년 4월29일 아이를 출산했다. 다행히 순산이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을 잃지 않았다. 아이는 딸이었다. 이름은 ‘사건’이라고 지었다. 역사 사(史)에, 세울 건(建)자를 썼다. 아마 출산 전에 작명을 해두었던 것 같다. 성별과 상관없이 그 이름을 부여하자고 부부가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자라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엿보인다. 자식의 이름을 ‘조국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 ‘민중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의 동생 김사민)이라고 지었던 할아버지의 뜻이 다음 세대에도 꿋꿋이 계승됐음을 알 수 있다.

“생각 깊고 성적 좋고 연설 재주”
1928년 1월10일 거행된 박원희 장례식 행렬(위).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원 안국당 무덤 옆 박원희 묘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임경석 제공

1928년 1월10일 거행된 박원희 장례식 행렬(위).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원 안국당 무덤 옆 박원희 묘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임경석 제공

박원희는 혁명가의 아내이자 그 자신이 견결한 혁명가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5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14인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고, 창립 집행위원 3인 가운데 1인이었다. 창립 집행위원의 면면을 보면 흥미롭다. 박원희, 허정숙(許貞淑), 주세죽(朱世竹)이 그들이다. 셋 다 배우자가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허정숙의 남편은 임원근(林元根)이었고,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朴憲永)이었다. 다시 말해, 여성동우회 창립 집행부는 커플 사회주의자들로 이뤄져 있었다.

박원희는 여성운동의 조직자였다. 각종 여성단체와 사회단체의 설립에 참여했고, 그 임원진에 취임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1925년에만 서울청년회 집행위원, 노동교육회 대회준비위원, 경성여자청년회 집행위원, 경성청년연합회 집행위원, 국제청년데이 기념식 준비위원을 역임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여자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취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인 근우회 설립에 참여해 집행위원에 선임됐다.

박원희는 강연회의 단골 연사였다. 강연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응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1924년 러시아혁명 7주년 기념 사상단체 연합강연회에서 ‘러시아혁명과 무산계급’이란 제목으로 연단에 섰다. 이듬해에는 서울청년회 춘계 강연회, 국제무산부인데이(여성의 날) 기념 강연회에 출연했다. 특히 여성문제가 중점 분야였다. 그녀의 강연 제목을 보면 ‘현대사회와 부인의 사명’ ‘국제무산데이의 유래’ ‘자유결혼 문제에 대하여’ ‘각국 부인운동과 조선 부인운동’ 등이었다. 서울과 지방도 가리지 않았다. 요청이 있으면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북 이리, 평남 진남포, 평양, 안주, 함남 원산 등이 그녀가 다녀온 출장지였다.

일찍이 오빠 박광희가 젊은 시절 여동생의 인물됨을 평하되, “생각이 제법 깊고, 공부 성적도 좋으며, 연설 재주가 있다”고 했음이 인상적이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언변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단체 임원진 내에서 역할을 분담할 적에는 으레 교양부를 맡았다. 회원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교육·선전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어린 딸의 육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린 사건이는 몸이 약했다. 고열이 나고 앓는 경우가 많았다. 박원희가 딸을 업고 서둘러 병원에 가는 모습을 목도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목격자에 따르면 “흰 저고리 흰 치마에 어린 아기를 절구통같이 들쳐 업고, 부스스한 트레머리로 더풀더풀하며 재동 네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원희도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 김사국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잃었다. 1927년 12월 초에 시작된 몸살감기가 그녀를 중병으로 몰아갔다. 전혀 예기치 않게 급속히 병세가 악화됐다. 이듬해 1월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살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뿐이랴. 그 가족에게 거듭 몰려오는 불운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홀로 남은 어린 딸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철모르는 사건이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나는 조문객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엄마 온다고 부르며 울었다. “이 애를 보는 사람 누군들 눈물을 참을 수 있겠는가?” 비극이 꼬리를 무는 이 집안의 가족사를 취재하던 신문기자는 이렇게 썼다.

혁명가 부모 죽음 뒤 ‘사건’이의 삶

박원희의 장례식은 1928년 1월10일 거행됐다. 근우회를 비롯한 34개 사회단체가 합동으로 장례식을 주관했다.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 고 박원희’라는 명정이 덮였다. 그녀는 2년 전에 먼저 간 남편 김사국의 수철리 묘지에 함께 안장됐다.

사건이의 운명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부모 없이 자라야 할 아이의 미래가 안쓰러웠다. 북간도 용정에서 박원희와 함께 일했던 옛 동지들이 그녀의 1주기가 되던 날 추도회를 열었다. 용정의 여자청년회 주최로 열린 추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어린 사건이에게 위로금 10원과 저고리 하나를 만들어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28년 4월8일치 지면에 고 박원희의 어린 딸에게 전달할 돈과 물건이 도착했다는 보도 기사가 자그맣게 실렸다.

사건이는 잘 자랐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양육을 맡았다. 박원희의 친정어머니가 일찍 가버린 딸을 대신하여 어린 피붙이를 길렀다. 박원희가 사망한 지 5년 뒤에, 한 신문기자는 9살로 성장한 사건이가 서울 북촌의 재동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보도했다.

참고 문헌
① ‘동양학원 巡講, 의외의 禍로 중지’, 1923년 7월15일치
② 재간도총영사 鈴木要太郞, ‘기밀 제271호, 동양학원 학생 조사에 관한 건’ 1923년 8월27일/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③ ‘간도 동양학원, 내지 巡講 계획’ 1923년 7월5일치
④ Ким-Хобан(김호반), Доклад(보고), 1923년 10월30일, с.6,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83 л.108-114
⑤ 새밝, ‘고 박원희 여사 회상’ 3-12, 18쪽, 1931년 12월
⑥ 1921년 7월30일치
⑦ 김사건, 장묘시설사용허가신청서, 1993년 12월18일
⑧ ‘여성동우 창립’ 1924년 5월11일치
⑨ 車相瓚, ‘想像과 印象記, 만나보기 前과 만나본 後: 朴元熙氏’ 3, 43쪽, 1927년 1월
⑩ ‘路上의 人’ 4, 39쪽, 1927년 2월1일
⑪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3)’, 1928년 1월9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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