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1941년 11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했다. 대한민국 헌법이 굳이 ‘법통’이라는 논란 많은 단어를 쓰면서까지 임시정부 계승을 강조하므로 건국강령은 우리 헌법의 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건국강령은 새 나라의 기초로 ‘혁명적 삼균제도’를 제시했다.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해 정권을 균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해 이권을 균하고, 국비 교육으로써 학권을 균한다”는 것이었다.
‘균등’이란 곧 ‘평등’이다. ‘삼균’은 정치, 경제, 교육 세 방면에서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이다. 여기에는 건국강령 기초자인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 소앙 조용은(조소앙)의 신념이 반영돼 있었다. 그가 1920년대 말부터 줄곧 주창해온 독립운동 이념이 ‘삼균주의’였다. 이 구상을 좌우 연립정부인 태평양전쟁 시기의 임시정부가 공식 정책 기조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조소앙과 삼균주의는 단순히 사상사 연구자의 관심거리일 수만은 없다. 대한민국 건국정신을 논하려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조소앙, 민족주의자인가 사회민주주의자인가
조소앙과 삼균주의는 논쟁적 주제이기도 하다. 혹자는 삼균주의가 한국적 사회민주주의라고 평가한다. 의회제를 바탕으로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추진하자고 한 게 사회민주주의와 가까울 뿐 아니라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직접적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소앙이 제2인터내셔널(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국제조직) 대회에 참석했던 일화나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서려고 신당을 결성하면서 당명을 ‘사회당’이라 한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다. 조소앙이 남긴 글들을 보면, 독립운동가 중에서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지독한 한문투 문장에다 유학적 사고방식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젊은 시절에는 한때 단군,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무함마드를 모두 기리는 ‘육성교’를 창시하려 했다. 게다가 중국에 있을 때나 해방 직후 이승만과 김구를 지도자로 따랐기에 그 시절 기준으로는 ‘우익’이었다.
조소앙은 이렇게 여러 얼굴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다성적 사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단지 지나치게 마당발에다 잡식성이던 그의 개성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조소앙의 항일투쟁과 사색의 역정을 짚어봐야 한다.
조소앙은 1887년 경기도 파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은’이었지만, 커서 스스로 ‘소앙’을 이름으로 택했다. 그가 1880년대생이란 사실은 이후 그의 사상이 취한 형태와 색깔을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이들은 대개 1900년 즈음에 태어났다. 조소앙은 이들보다 연배가 한참 위다. 이런 세대였기에 조소앙은 10대 후반을 조선 성균관의 마지막 학생으로 보냈다. 서구 사상에 눈뜨기 전에 그는 청년 유학자였던 것이다. 조소앙의 고색창연한 문장에는 이런 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문체가 고루하다고 내용까지 고루한 것은 아니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인 1918년 11월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이 발표됐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과 구별해서 ‘무오독립선언’이라 불리는 이 문서의 집필자는 어느덧 망명 독립투사가 된 조소앙이었다. 그런데 이 선언문은 ‘기미독립선언’과는 달리 새 나라의 이상을 선명히 제시했다. 한문투 문장을 고쳐 옮기면 다음과 같다.
“군국주의 전제체제를 쓸어버리고 민족 간 평등을 전 지구에 실현하는 게 우리 독립의 첫 번째 뜻이며 (중략) 모든 동포에게 평등한 부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남녀빈부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 (중략) 우리 건국의 깃발이다.”
3·1운동을 준비하면서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이미 독립 이후 최대 과제가 평등의 실현이라 내다봤던 것이다. 성리학 언저리를 맴돌던 지성은 이렇게 불과 10여 년 만에 놀라운 속도로 진보하고 있었다.
3·1운동보다 앞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조소앙이었지만, 막상 만세 시위가 시작되자 민중의 힘에 새삼 감격했다. 이후 그의 사상은 더욱 거침없이 전진했다. 마침 세계 곳곳이 격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여진이 여전히 거셌고, 중국 혁명도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사회주의·아나키즘 통합한 ‘한살임 강령’이런 분위기 속에 조소앙은 ‘한살임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한살임(韓薩任)은 ‘한살림’의 한자 표기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전설적인 항일투사 김상옥(영화 에도 나왔다)이 중국에 체류할 무렵 한살임당에서 함께했다고 한다.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뒤 조소앙은 을 집필했는데, 여기에 ‘한살임당 강령’이 부록으로 실렸다.
‘한살임당 강령’은 당연히 일제에 맞선 민족혁명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었다. 독립전쟁은 1단계일 뿐이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나면 한살임당은 제2단계로 계급혁명에 나선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주인 되는 공생(共生)을 실현한다. 계급혁명을 완수하면 다음 단계로 아시아 전체에서 사유재산제와 정부를 철폐해서 아시아 한살림, 더 나아가 세계 한살림으로 나아간다. 국가도 없고 전쟁도 없는 무치(無治)의 세상이 한살임당의 궁극 목표였다.
‘한살임당 강령’은 독립전쟁에는 30년이 걸리고 계급전쟁에는 50년이 걸린다고 내다봤다. 시야가 한 세기 앞을 향했던 것이다. 실천 강령으로 신분 차별 철폐, 사적 소유 폐지, 남녀평등, 노동자 민병대(상비군 폐지), 전쟁 금지, 민족 간 연맹, 세계 한살림을 내세웠다. 일제를 몰아내는 일만도 벅찬데, 조소앙은 실로 어마어마한 궁극 목표들을 제시했던 것이다. ‘한살임당 당규’가 규정한 당원의 권리 중에는 ‘세계혁명의 권리’까지 있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돈키호테식 이상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정세를 감안해야 한다. 중국 혁명의 기대 속에 온갖 급진적 사조가 범람하던 시기였다. 조소앙은 한살임당 강령을 통해 이들 이념, 즉 민족주의·사회주의·아나키즘을 통합하려 했다. 그래서 항일 혁명가들의 대연합을 구축하려 했다.
1920년대 말 중국 혁명이 난조를 보이자 조소앙의 사상도 변화했다. 한살임당 시기의 장대한 비전 대신 삼균주의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절이라기보다 진화였다. 당시로선 먼 미래의 목표인 공생과 무치 대신 민주독립국가 수립과 함께 즉각 수행해야 할 과제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선거와 지방자치,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의 국유화, 계획경제, 무상보통교육을 주로 이야기했다. 특히 무상보통교육은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더욱 강조하게 됐다. 이렇게 항일운동 경험들이 조소앙 사상의 자양분이 됐다.
결국 삼균주의의 다성적 특성은 항일운동의 다양한 흐름과 경험을 포괄한 결과였다. 조소앙은 코민테른(각국 공산당들의 국제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구미 유학파도 아닌 독학풍 사상가였기에 오히려 이런 다양성을 가장 꾸밈없이 반영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토대가 된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30여 년간의 투쟁과 모색을 통해 독립운동의 여러 흐름이 도달한 결론과 합의의 정식화였던 것이다.
촛불 이후 과제는 ‘정치·경제·교육 평등’1945년 환국 이후 조소앙은 한국독립당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그래서 김구를 따라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지만, 김구와 달리 그는 좌우합작에 적극적이었다. 5·10 선거를 앞두고는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바람에 제헌의회에는 불참했다.
하지만 조소앙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제헌헌법에는 삼균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공공성을 가진 기업의 국유화를 명시한 조항이나 농지개혁 관련 조항, 기업의 이익을 노동자가 균점해야 한다는 조항이 그러했다. 조소앙의 글들을 직접 참고하지 않았더라도 독립운동가들이 도달한 결론이 대체로 삼균주의와 같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소앙은 2대 국회에는 직접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단정 불참 입장을 고수하던 한국독립당을 탈당해 사회당을 창당했다. 그는 서울 성북 선거구에서 한국민주당의 거물 조병옥과 맞붙어 전국 최다 득표로 압승을 거두었다. 당선되자마자 그는 신익희, 안재홍 등과 창당을 모색했다. 2대 국회에 진출한 좌우합작파, 남북협상파의 정당을 건설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기회의 문은 무참히 닫혔다. 조소앙은 국회의원으로 채 활동도 못해보고 납북됐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북한 정권에 항거해 단식투쟁을 하다 숨졌다고 한다. 남한에선 한동안 그의 이름이 금기시됐다. 삼균주의 내용을 계승했던 제헌헌법의 진보적 내용도 거듭된 개헌을 통해 삭제되거나 탈색됐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21세기에 박근혜 정권의 헌정 유린에 맞서 주권자들이 다시 들고일어났다. 지금 촛불 시민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원상 복구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조소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이미 70여 년 전에 그 답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이 해법을 실행하길 미루고 또 미뤄왔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조소앙, ‘한국독립당의 당강 및 당책’, 1945)하는 일이다. 평등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20세기 사람들’ 연재를 마칩니다. 우석영, 장석준 두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http://bit.ly/2neDM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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