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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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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계급 역사는 희극의 역사

억압자와 저항자 기록으로 본 역사의 속살… 한국 근현대사 사료로

지배자의 희극적 서사와 혁명세력 비극적 서사 형상화할 예정
등록 2017-05-18 06:23 수정 2020-05-02 19:28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연출되는 극장이다. 강자의 입장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희극이었지만 대다수 약자의 시선으로 보면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 비극은 어쩌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 삼아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교직하는 이유다. 우리가 잊고 있던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을 드러낼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3주마다 개봉한다. _편집자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제공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제공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성균관대 사학과의 임경석 교수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3주에 한 번씩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근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입니다. 사료를 들여다보는 게 직업이지요. 오래된 옛날 기록을 뒤져서 유용한 정보를 캐내는 일을 합니다. 수집한 정보가 많아지면 적절히 분류도 하고요, 그것을 분석해 역사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지루하기도 하지만, 맛을 들이면 꽤 재밌습니다. 작으나마 새 지견을 얻을 때는 보람도 느낍니다.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우리 공동체가 걸어온 길입니다. 특히 가까운 과거의 궤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최근의 궤적에 주목하냐고요?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좌표를 알아야 항로를 설정할 수 있는 법입니다.

역사 본질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

콜럼버스 이래 세계는 하나로 통합돼왔습니다. 지구의 여기저기에 분산돼 있던 여러 문명과 민족이 연계를 맺게 되었지요. 그 과정은 평화롭거나 수평적이지 않았습니다. 서구는 우월한 힘을 이용해 비서구 지역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으로 통합해나갔습니다. 세계 어느 지역, 어느 민족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속에서 한국은 유감스럽게도 약소국 위치에 놓였습니다. 자립적으로 근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식민 시기를 경과해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망국,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한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영웅적 분투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쯤 전에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 역사를 ‘고통’과 ‘피’의 역사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는 와 를 썼습니다. 우리 역사의 본질을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을 구사했던 거죠.

저는 박은식의 문제의식을 배우려 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고난과 분투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구 주도의 위계적인 세계 체제는 지금도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체제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력하고 안정화돼 있는 듯 보입니다.

이 현실을 감안해 저는 두 종류의 사료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하나는 억압자들의 기록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식민지 통치 기록, 옛 일본제국 외무성이 생산한 해외 한국인에 대한 자료가 그것이죠. 다른 하나는 저항자들의 기록입니다.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문서가 대표적 보기입니다.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 풍부하게 보관돼 있습니다.

정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비교하면서 읽어왔습니다. 양자를 교차시키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불꽃이 튑니다. 두 개의 시선이 충돌하는 것이죠. 관찰자의 시선이 어떠한가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 완전히 상이한 이미지를 띠고 나타납니다. 이 불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실 추구의 사명을 지닌 역사학자는 모순에 찬 기록을 비교하고, 엄정한 사료 비판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신뢰할 만한 역사적 지식이 생산될 가능성이 주어지는 거죠.

이제 제가 어떤 일에 종사해왔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근대사를 연구해왔습니다. 이 연구 분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료의 분량이 방대하다는 점입니다. 총독부 문서가 그러하고, 코민테른 문서가 그러합니다. 외무성 기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오래도록 이 분야 연구에 집중해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사료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추 계산해도 벌써 30년이 넘었군요. 꾸준한 작업 덕분에 적잖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맘먹고 한번 헤아려봤습니다. 그간 8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4권의 단행본을 간행했더군요.

역사 대중화에 맞춤한 글쓰기

이 지면을 통해 ‘역사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에세이 장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산문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빌려 역사에 대해 쓰겠습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다채로운 글쓰기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합니다.

오늘날 역사학의 주된 글쓰기 장르는 논문입니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논문 작성에 전념합니다. 그 이유는 논문이 역사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논문은 형식과 규범이 고정화된 역사 글쓰기의 한 양식입니다. 문제 제기를 명백히 해야 하고, 기존 연구에 비춰 독창적인 입론을 세워야 하는 글입니다. 학술지에 기고할 때는 분량도 일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학계 내부의 소통에 최적화된 장르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논문 집필에 몰입하는 이유에는 학문 외적인 것도 있습니다. 취업과 승진, 연구 프로젝트 수주 등이 연구논문 실적과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논문 실적을 두텁게 갖추지 않고서는 안정된 연구 여건을 보장하는 직장을 갖기 어렵습니다. 취업한 뒤에도 승진과 재임용의 문턱을 넘으려면 논문 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논문은 시민사회와 폭넓은 소통을 목표로 하는 글쓰기 양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문가 내부의 소통에 목적을 둔 글이라서 역사 대중화에 필요한 덕목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학이 시민사회와 소통하려면 논문을 벗어나 다른 장르를 개척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역사의식 형성을 돕고 정체성 통합을 도모하는 데 적합한 글쓰기가 요구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자기 확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코카서스 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다. 그러나 자기해방의 확신으로 제우스와 타협하길 거부했다. 한겨레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코카서스 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다. 그러나 자기해방의 확신으로 제우스와 타협하길 거부했다. 한겨레

역사 에세이가 그 요구에 부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는 이야기를 담기에 적합한 글쓰기 양식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제가 전하려는 것은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들입니다. 사료를 대하다보면 더러 감정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가슴 뭉클하고, 눈물겹고,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이야기를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논문을 쓸 때는 이런 풍부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논문은 논리적 짜임새를 중시해서 이런 이야기가 배제되기 일쑤입니다. 논문의 논리적 짜임새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에세이 장르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정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논문에는 담기 어려운 이야기를 에세이에는 쉬이 담을 수 있습니다.

역사 에세이를 통해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특히 비극과 희극을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가 가득 차 있습니다.

비극은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비극이 단순히 슬픈 얘기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를 볼까요. 그리스 비극의 특성은 신이 부여한 객관적 질서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투쟁을 그리는 데 있습니다. 이 투쟁은 인간의 패배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신의 질서는 엄연하고 객관적인 것이므로 그에 맞서는 인간의 행위는 실패하기 쉽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패배와 좌절의 원인은 항상 자기 내부에 있습니다.

위대한 비극은 단지 패배만을 그리는 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클라이맥스는 인간이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해방을 향한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인간상을 형상화하는 것이 비극적 서사의 핵심이며, 또한 이 ‘역사 에세이’의 목표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신이 부여한 운명을 거역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그들의 좌절과 고뇌를 재현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코카서스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를 한국 역사에서 형상화하려 합니다.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습니다. 13세대의 역사가 지난 뒤에는 제우스도 파멸에 부딪힐 것이며, 그때 자기는 해방될 것을 확신하노라고. 그러한 내면의 확신 덕분에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와 타협하기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그 확신을 역사 에세이에 담고 싶습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하다

역사 속에서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들은 식민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면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유관순(왼쪽)과 이완용은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의 상징적 인물로 꼽을 만하다. 한겨레

역사 속에서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들은 식민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면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유관순(왼쪽)과 이완용은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의 상징적 인물로 꼽을 만하다. 한겨레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선한 사람입니다. 도덕성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을지라도 보통 사람들보다 다소 더 선한 사람입니다. 평균 수준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다릅니다. 그는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려 합니다.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식민지 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예견되는데도 그랬습니다. 합법적 공개 영역의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을 때, 그들은 수배망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신분을 감추고 비밀리에 생활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의치 않을 때는 감옥 가는 것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험준한 산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불운하게도 혹독한 고문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공동체 구성원은 그렇게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할 의무가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인가요.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습니다.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비극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평균 수준보다 더 낮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희극은 도덕적으로 저열한 군상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을 우선시한 사람, 대의를 저버린 사람,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 외세를 추종해 민족적 이익을 훼손한 사람이 그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극은 보통보다 못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인간의 온갖 악에 관련됐다고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결함과 창피스러운 점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의 특권적 지배계급의 뿌리는 식민지 시대 관변 유력자층에 잇닿아 있음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들은 식민 체제가 종언된 뒤에도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외세 밑에서 지배 시스템을 갱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힘은 오늘날 거대하게 성장했지만, 그 본질이 우스꽝스러운 것임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지배계급 역사는 희극의 역사로 그려야 합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합니다. 현실을 변혁하는 직접적 무기가 될 잠재력이 있습니다. 현존 지배질서를 전복할 가능성을 내포하므로, 희극은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속 역사적 통찰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소설 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14세기 중세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희극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망실된 것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그 수도원에 비밀리에 소장돼 있고, 그것이 세상에 유포되는 걸 막기 위해 살인이 저질러진다는 얘기이지요. 희극론이 세상에 나오면 교회와 기득권층이 누리는 기존 권력과 영향력이 위태로워질까 염려했던 거지요. 희극이 현존하는 권력과 지배질서에 대해 얼마나 강력한 전복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희극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돋보입니다.

제 의도는 역사 에세이에서 비극과 희극 서사를 전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소재로 비극적 혹은 희극적 형상화를 도모하겠습니다. 더러 그에 못 미치는 이야기도 있겠지요. 그저 재미로 읽는 이야기에 머물지도 모릅니다. 설혹 그렇더라도 관대하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비극적 혹은 희극적 서사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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