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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는 서점

한 달 동안 책 한 권만 파는 심리 인문 서점 ‘림’
등록 2017-04-07 09:12 수정 2020-05-02 19:28

“사람들은 책에 자신의 병을 쏟아버린다. 자신의 감정을 반복해서 겪고 또 그것을 드러내면서 어느새 감정의 주인이 된다.” -D. H. 로런스의 편지 중에서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자하문길을 따라 걷다보면 체부동이 나온다. 체부동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길이 있다. 600여 년 전 서울의 옛 지도와 겹치는 폭 2~5m의 좁은 골목이다. 골목은 두터운 시간을 나지막이 품었다. 먹자골목, 개량 한옥과 낮은 담, 작은 카페들 앞을 자박자박 걷다보면, 어느 집 앞에 놓인 화분과 마주한 심리 인문 서점 ‘림’의 입간판이 나온다. ‘림’ 서점은 3월 초 이 공간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3월22일 찾아간 서점 내부는 ‘이달의 책’으로 뽑힌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으로 꾸며져 있었다. 책꽂이가 빼곡한 일반 서점과 다르다. 카페처럼 다인용 탁자가 있고, 전시공간 같은 여백이 돋보인다. 한 달에 한 종류의 책만 파는 ‘한책 서점’ 콘셉트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서점 ‘림’은 정보의 홍수를 겪는 도시인들에게 가치 있는 책을 골라주고, 그 책을 긴 호흡으로 깊게 읽자고 권한다. 천천히 정직하게 마주하자는 제안.

“워낙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니까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책을 골라도 주마간산식으로 허겁지겁 읽어내기 급급한 경우가 많다. 한 권만 제대로 읽자, 그러면 한 달은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이승욱 ‘림’ 공동대표)

북 테라피스트의 감정 치유

한책서점 콘셉트는 일본 ‘모리오카 서점’의 ‘하나의 방, 하나의 책’ 프로젝트에서 따왔다. 도쿄 긴자 뒷골목에 자리한 모리오카 서점은 ‘한 권의 책이 있는 한 공간’이란 슬로건 아래 일주일마다 책 한 권을 선정해서 판매한다. 책이 바뀔 때마다 공간의 모습도 바꾼다. 책에 나오는 꽃을 진열하거나 책이 다루는 주제의 그림을 전시하는 식이다.

중국 서점 ‘단향공간’도 참조했다. 베이징시 차오양구에 위치한 ‘단향공간’은 2006년 언론·출판계에서 일하는 젊은 지식인 13명이 만들었다. 카페와 책방을 겸하면서 ‘함께 책 읽는 공간’ ‘모여서 담론하는 공간’으로 운영하려고 매주 지적·문화적 살롱 행사를 열었다. 따로 광고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중국 전역에서 청년들이 서점을 찾았다. 문을 연 지 10여 년, 살롱의 누적 참가자가 10만 명을 넘겼다. 서점이 사상과 이론을 창출하는 매체가 된 것이다.

‘림’도 책을 매개로 다양한 온·오프라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3월에는 전문가가 진행하는 강독회, ‘꿈 분석 워크숍’을 각각 주 1회 2시간씩 열었다. 상시 프로그램으로 ‘테일러드 북 테라피’와 ‘이달의 책’ 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모임이 마련됐다. 이순주 정신보건전문요원이 진행하는 북 테라피는 테라피스트가 예약자와 미리 주고받은 질문지를 토대로 소설이나 수필, 그림책 등을 선정하고 이를 토대로 40분~1시간 정도 상담한다.

‘심리 인문 전문’을 표방한 이유는 간단하다. 서점 대표 두 사람의 전공 분야다. 이승욱 공동대표는 정신분석가다. 그는 상담의 공공재화, 공공치유를 표방하며 상담심리 전문 팟캐스트 (이하 )를 6년째 이어가고 있다. 황정치 공동대표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청년 예술인이다. 두 사람은 이승욱 대표와 (문학동네 펴냄)를 공저한 김은산 작가를 통해 인연을 맺고, ‘책을 매개로 한 문화 플랫폼 만들기’에 의기투합했다.

“정신분석에서는 프로이트가 제자들과 함께한 ‘수요세미나’가 중요했다. 일반인이 모여서 정신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분석 클리닉이 1대1로 운영되는 폐쇄된 공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공간이라면, 팟캐스트 은 1 대 불특정 다수로서 쌍방향 소통이 쉽지 않은 공간이다. 서점은 그 중간지대로서 의미 있다.”(이승욱 공동대표)

“지역에서 서울로 이주한 문화예술인으로서 편안한 공간에 대한 갈망이 늘 있었다. 책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커뮤니티를 이루고, 이 커뮤니티들이 서점 밖 세상과도 대화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보고 싶었다.”(황정치 공동대표)

대표는 두 사람이지만 ‘이달의 책’ 선정과 프로그램 기획·운영은 지인 여럿과 함께 토론해서 결정한다. 다른 서점 이용자에게도 이런 운영 과정을 공개하고 참여 기회를 열어두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4월의 책, 세월호
인문서점 ‘림’의 공동대표인 이승욱씨(오른쪽)와 황정치씨.

인문서점 ‘림’의 공동대표인 이승욱씨(오른쪽)와 황정치씨.

4월의 책은 서점 문을 열기도 전에 미리 정해져 있었다. (416 단원고 약전 작가단 지음, 경기도교육청 엮음, 굿플러스북 펴냄)이다. 심리 인문 서점이라고 해서 꼭 해당 분야의 책만 선택하는 건 아니다. 심리 인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면 어떤 분야라도 ‘이달의 책’이 될 수 있다. 꼭 신간일 필요도 없다. ‘좋은 책인데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책’도 물망에 많이 오른다.

“세월호 사건 관련 감정이 한국 사회에, 계속 고여 있다는 생각을 한다. 3년이 다 되도록 진상 규명이 되지 못한 채, 하나도 해결되지 못한 채, 그래서 어떤 감정인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잊지 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처럼 죄책감과 관련한 말을 쓸 때가 많다. 그 외의 다른 감정들도 있을 텐데,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잘 소화하거나 애도하지 못한 상태로 보인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무엇을’ 잊지 않겠다는 것인지 목적어를 생각해봤다. ‘우리가 이 아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이 아이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리 스스로 세월호 사건의 공동정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약전은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을 담은 좋은 책이라고 판단했다. ‘잊지 않겠습니다’가 표어로, 감정으로 머물지 않을 방법은 약전을 읽으면서 감정을 들여다보고 헤아려보는 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이승욱 공동대표)

작가단에게 책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듣는 ‘18살 인생, 남겨진 이야기’, 강독회 ‘우리 마음 속으로 사라진 304개의 우주: 약전을 읽는 밤’, 유가족을 초대해 3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함께 할 일을 이야기하는 관련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감정 점검 돕는

서점 ‘림’은 회원제로 운영된다. 일일회원, 한달회원, 보통회원으로 나뉜다. 일일회원 회원권이 5천원인데 음료를 무료 제공하므로 카페 공간과 비슷하게 쓸 수 있다. 일일회원은 을 받을 수 있다. 은 나/친구/사랑 등 12가지 영역으로 나뉜 질문을 읽고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상과 심리, 감정을 점검할 수 있는 책이다. 관련 워크숍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소설 에서 책을 “당신이 무척 궁금해서 책을 통해 그 세상의 차원을 늘이고 확장하고 싶어 (…) 세상으로 짓는 다리”라고 표현했다. ‘림’은 그런 당신을 위한 안락한 숲(林)을 꿈꾼다. 서점 이용 문의는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bookstorelim)나 전자우편(forestvolume@gmail.com)으로 하면 된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글에서 ‘단향공간’ 부분은 ‘김언호의 세계 책방 기행’ 베이징 단향공간 편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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