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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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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확인한 북한의 ‘니즈’와 ‘원츠’

올림픽 참가로 얻으려는 것과 원하는 것…

체제 안정 발판 삼아 남북관계 개선 기대
등록 2018-02-13 14:16 수정 2020-05-03 04:28
조명균 통일부 장관(왼쪽)이 2월9일 인천공항에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오른쪽)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명균 통일부 장관(왼쪽)이 2월9일 인천공항에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오른쪽)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연합뉴스

군문을 나와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시작해 처음 담당한 과목이 ‘마케팅’이었다. 북한학 전공자가 마케팅을 가르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이 학교 저 학교 떠도는 ‘보따리 장사꾼’ 시간강사였다. 이것저것 가릴 것 없는 상황에서 학부(해군사관학교) 때 전공이 경영학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겁도 없이 강단에 섰다. 그렇게 네 학기 동안 마케팅을 강의한 게 아니라 공부를 했다. 그렇지만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강의 내내 북한을 비유로 들어 여러 얘길 했던 기억이 난다.

북한 나름의 필요와 간절함

한번은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니즈’(Needs)와 ‘원츠’(Wants)를 설명할 때였다. 통상 니즈는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음식이나 음료수를 욕구하는 것이다. 원츠는 그래서 뭘 먹고 마시고 싶은지 구체적인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배고픔을 해소하려는 음식이 밥일 수도 있고 빵일 수도 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원한 생수를 마실 수도 있고, 얼음을 동동 띄운 콜라를 찾을 수도 있다. 이 정도 설명을 하면, 대개 니즈와 원츠의 차이를 이해한다.

나는 여기서 만족을 못하고 신이 나 북한의 니즈는 정권 생존을 위한 ‘안전 보장’이고, 이를 위해 선택한 원츠는 ‘핵’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학생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난 그리 좋은 마케팅 선생은 아니었나보다.

북한이 2월9일 개막한 평창겨울올림픽에 참가했다. 선수단만 온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남한을 찾은 인사 가운데 최고위급 대표단이 꾸려졌다. 응원단과 함께 예술단과 태권도시범단도 내려와 공연했다. 내려오는 방식도 한 가지가 아니라 육·해·공 입체였다. 북한 예술단은 만경봉92호를 타고 묵호항으로 들어왔고, 응원단과 태권도시범단은 판문점을 거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친동생인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포함된 고위급 대표단은 평양을 떠나 서해 항로를 따라 인천공항으로 입경했다. 그동안 꽉 막혀 있던 한반도의 혈맥이 동시에 뚫린 것 같은 기분이다.

북한이 평창겨울올림픽 참가를 결정한 것이 순수하게 올림픽 정신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명 나름의 니즈와 원츠가 있을 것이다. 북한이 무슨 꼼수를 부린다는 음모론적 얘길 하려는 게 아니다. 북한에는 나름의 필요와 간절함이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올림픽 참가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올바른 대북 전략을 짤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1월1일 신년사에서 밝힌 것처럼, 2018년은 김정은 정권에 중요한 한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2016년 5월 초 36년 만에 제7차 조선노동당 당대회를 열어 실질적인 김정은 시대를 열어젖혔다. 시기를 명문화하지는 않았지만 ‘경제핵무력병진노선’으로 과학기술 강국, 경제 강국, 문명 강국이라는 ‘강성국가’를 완성하고 제8차 당대회를 열어야 한다.

원래 노동당 당대회는 5년 주기(당 규약에는 삭제됨)로 연다. 그렇다면 벌써 2년이 지났다. 지난해 김정은 정권은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지만, 미국은 ‘코피 작전’을 언급하는 등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적 옵션을 선택할 수 있음을 언뜻언뜻 흘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인민을 안심시킬 만한 대내외 여건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여러 경제제재가 겹치면서 경제나 인민생활 등에 어려움이 생겨나고 있다.

핵과 올림픽 참가 분리 ‘투 트랙’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음에도 2018년에 지금과 같은 불안정한 안보 환경이 이어진다면,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 매진하도록 주민들을 다그칠 명분을 잃게 된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김정은 위원장의 영도력에 금이 가고, 정권 안정성에도 부정적 영향이 생겨날 수 있다. 2018년은 김정은의 시험대이자 돌파구이고, 정권 유지에 중요한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큰 해다. 지금 김정은 정권에 필요한 것은 ‘안정’이다. 2018년 북한의 니즈는 인민들을 안심시키는 대내외적 안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관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한여름 해병대 유격훈련을 받으며 시냇물을 마시면서 갈증을 풀던 기억이 난다. 갈증 해소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면 최고이지만, 이를 구할 수 없다면 차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없다고 참다가 죽을 수는 없다.

북한의 니즈가 안정이라면 이를 달성하는 최고의 해결책은 북-미 관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는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2월7일 일본 도쿄에서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며 북핵 문제 해결에 무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북한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2018년을 포기해야 할까. 올림픽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통해 남북관계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현재 북한이 택할 만한 최선이자 차선일 수 있다. 남북대화로 북-미 관계가 개선된다면 좋고 아니어도 무방하다. 이를 통해, 북한이 2018년 ‘안정’이라는 니즈를 위해 북-미 관계를 대신해 선택한 원츠가 ‘남북관계’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어야 한다”고 특별한 표현을 쓰고 있다. 지금의 대화 국면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이 말이 실현될 수도 있다. 그만큼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는 북한의 간절함이 배어 있다.

필자는 제1195호(1월15일치) 기고에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나란히 있다. 2월 평창엔 그렇게 평화의 눈이 내린다”고 예측했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올림픽 참가를 언급했지만, 북한 고위급 대표단에 누가 포함될지는 알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았다. 그리고 희망은 사실이 되었다. 나머지 고위급 대표단에는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선전선동부로 추정)이 포함됐다.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 주석의 혈육이 남한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1월9일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공식 결정한 뒤 지금까지 오직 올림픽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핵문제를 포함해 외교·안보·정치적 문제와 올림픽 참가를 분리하는 ‘투 트랙’ 전략을 쓰고 있다. 북한의 고위급 대표단 구성 역시 국가 간 중요한 국제행사인 올림픽에 참가하는 대표단이라는 점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김 상임위원장이 올 거라 예측했던 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2018년 신년사에 감추어진 김정은 정권의 니즈와 원츠를 읽었기에 가능한 예측이었다. 남쪽 행사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대표로 온다는 점은 다소 꺼림칙한 측면도 있다. 김 상임위원장이 북한 헌법상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인사라서, 북한이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닌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보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김 상임위원장은 올림픽이라는 국제행사에 북한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위 인물임이 틀림없다. 북한이 그만큼 평창올림픽 참가와 남북관계 개선에 큰 기대를 한다는 방증이다.

김영남·김여정 방남의 상징성
2월8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열병식. 연합뉴스

2월8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열병식. 연합뉴스

북한은 당이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인 김영남을 전면에 내세우며, 올림픽이라는 체육문화행사에 맞춰 최휘 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을 대표단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남북관계 차원에서 리선권 위원장이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올림픽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돼야 할 필요를 북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김 상임위원장과 최휘 위원장, 리선권 위원장의 방남은 예상했다. 그러나 김여정 제1부부장보다는 리수용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이 올 가능성을 더 크게 봤다. 북한이 북-미 관계 개선에 신경 쓰지 않을까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최소 이번 올림픽 기간에 북-미 접촉을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북한은 2월7일치 에서 조영삼 외무성 국장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 명백히 말하건대 우리는 남조선 방문 기간 미국 측과 만날 의향이 없다”고 선언했다. 올림픽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게 북한에 더 큰 이익이라는 점을 분명히 아는 셈이다. 북한 대표단과 마주치지 않으려 동선까지 고민한 미국 대표단이 머쓱해진 형국이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1월23일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1932년 4월25일에서 1948년 2월8일로 되돌렸다. 9월9일로 다가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과 함께 70주년을 강조하고 있다. 2018년에 그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올림픽 개막일을 하루 앞둔 2월8일, 북한은 예정대로 열병식을 진행했다. 국제사회의 우려 때문인지 외신 기자들을 부르지 않았고, 생중계도 없었다. 추운 겨울 행사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전과 비교해 규모가 축소되고 행사 시간도 단축됐다. 김정은 위원장의 부인 이설주까지 나온 것으로 봐, 올림픽과는 무관한 내부 행사였음을 강조하는 모양새다. 북한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준 거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열병식엔 눈에 띄는 새 장거리탄도미사일은 없었다. 이미 발사한 고체연료 엔진의 중거리미사일 북극성 2형과 지난해 연속 발사했던 화성 12·14·15형이 전부였다. 그러나 미국령 괌에서 본토 전역이 사거리인 미사일을 한자리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핵무력 완성’에 방점을 찍은 열병식이었다. 규모와 시간이 줄고 생중계도 안 했지만, 허술한 행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이번 열병식이 올림픽과 무관하다는 점을 알리면서도, 인민에겐 핵무력 완성을 분명히 알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니즈와 원츠를 파악 못하면…

얼마 전 아내와 백화점에 갔다. 아내가 몇 군데 옷을 구경하는 것을 보고 주말에 따로 백화점에 가 옷 한 벌을 사서 안겼다. 아내는 당황하며 ‘내 옷이 아니라 친구가 어떤지 보고 평가를 해달라고 해서 봤다’고 답했다. 좌절한 나는 다시 백화점으로 가 환불을 해야 했다. 아내의 니즈와 원츠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보이는 것만 봐서는 북한의 니즈와 원츠를 알 수 없다. 또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북한만이 아니다. 미국도 있고 중국도 있다. 이 가운데 무엇을 우선순위로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1순위로 생각해야 할 것은 북한의 니즈와 원츠가 아닐까?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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