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국생명 김연경. 한국배구연맹 제공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는 찬사를 받아온 김연경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영원히 배구 코트를 떠난다. 종목 불문, 스포츠 스타들은 늘 가슴에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격언을 품고 살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극소수였다. 김연경은 2025년 2월 “정상급 기량을 갖췄을 때 은퇴하는 게 맞는다”라며 시즌 도중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37살이지만 김연경은 여전히, 한국 최고의 배구 선수다. 이번 시즌 정규리그 공격 부문에서 득점 7위(585점), 공격 종합 2위(46.03%)에 올랐다. 득점 1~6위는 모두 외국인 선수인데다 1~10위 중 1980년대생은 김연경이 유일하다. 참고로 득점 6위 메렐린 니콜로바(637점·한국도로공사)는 2003년생이다.
배구계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사실 속이 탄다. 소속팀 흥국생명은 대체 불가능한 선수의 공백을 채워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한국배구연맹 역시 슈퍼스타의 빈자리를 채울 흥행 요소를 찾지 못했다. 그의 은퇴는 프로배구 여자부 전체 관중 감소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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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구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친 김연경이지만, 그를 화려한 수상 실적, 득점과 같은 수치로만 추억해선 안 된다. 오히려 그가 남긴 흔적과 유산은 코트 밖에서 더 빛났다.
2005년 출범한 브이(V)리그의 샐러리캡(각 팀이 선수들에게 지불할 수 있는 연봉 총액의 상한선)은 남자부의 경우 10억3500만원, 여자부는 6억원부터 시작했다. 출범 원년 남자부 팀(6개)이 여자부(5개)보다 많았고, 리그 규모와 경기당 관중 수, 선수의 시장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격차는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배구 흥행은 여자부가 주도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끝으로 본선 문턱도 밟지 못한 남자 배구와 달리 여자 배구는 2012년 런던올림픽(4위), 2016년 리우올림픽(8강), 2020년 도쿄올림픽(2021년 개최·4위)에서 잇따라 선전했다. 이때는 외국 리그에서 뛰던 김연경이 대표팀에서 맹활약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올림픽 열기에 올라탄 여자부는 평일 오후 5시에 경기를 시작했지만, 2017~2018시즌부터 평균 시청률과 관중 수에서 저녁 7시에 시작하는 남자 배구와 비등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추세로 봤을 때 추월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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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샐러리캡 격차였다. 배구연맹은 2018~2019시즌 남자부 샐러리캡을 25억원으로 정하고, 3년 동안 매년 1억원씩 늘려 2020~2021시즌까지 27억원이 되도록 조처했다. 반면, 2018~2019시즌 여자부 샐러리캡(14억원)은 다음 시즌까지 동결하기로 했다. ‘여자부 샐러리캡 2년 동결’은 V리그 출범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사이 중국 리그에서 뛰던 김연경이 입을 열었다. 그는 2018년 3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자부와 여자부 샐러리캡이 너무 차이가 난다. 좋아지는 게 아닌 점점 뒤처지고 있다. 이런 제도라면 나는 한국서 못 뛰고 해외에서 은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샐러리캡 격차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이다.
김연경의 발언에 배구계는 들썩였고, 배구연맹 이사회는 2020년 4월 2020~2021시즌 여자부 샐러리캡을 14억원에서 18억원으로 올리고 별도로 옵션캡 5억원을 신설하기로 의결했다. 여자부 선수가 받는 연봉 상한선은 3억5천만원에서 최대 7억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배구연맹 관계자는 “김연경 선수가 소신 발언을 하기 전까지 다른 선수들은 샐러리캡 관련한 얘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이사회에 참석하는 각 구단 대표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맞는다”라며 “연맹이 특정 선수의 말만 듣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다만, 김연경 선수가 앞서서 말하는 사안은 분명히 영향력이 있고 연맹도 많이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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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부와 남자부가 동일하게 평일 저녁 7시에 경기를 시작한 2018~2019시즌부터 여자부 평균 관중 수(2517명)는 남자부(2440명)를 추월했다. 여자부 샐러리캡 역시 꾸준히 상승해 29억원(2024~2025시즌)으로 늘었다. 남자부 샐러리캡(58억1천만원)에 견줘 여전히 적지만, 배구연맹은 여자부 샐러리캡은 유지하고 남자부 샐러리캡은 4년에 걸쳐 10억원가량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김연경은 한국 배구 선수 최초로 장학금 지원 사업을 펼친 선수였다. 2009년 일본에 진출한 뒤 일주학술문화재단과 함께 가정 형편이 어려운 배구 꿈나무들에게 매달 20만원씩 2년간 장학금을 지원했다. 2011년까지 3년간 이어진 이 사업을 통해 총 20명의 학생 선수가 ‘김연경 장학금’을 받으며 운동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커서 프로 무대에 데뷔해 현역 선수로 뛰고 있거나 은퇴했다. 특히 2024~2025시즌 김연경과 함께 V리그 여자부 연봉 1위로 등극한 강소휘(한국도로공사), 2018~2019시즌 신인상 수상자 정지윤(현대건설), 2022년 항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 주장 박정아(페퍼저축은행)는 여자 배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해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정지윤과 박정아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김연경과 함께 뛰며 4강 신화를 일궜다.
김연경은 “이 나이에 득점 등 지표에서 상위권에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어린 선수들을 키울 방안이 필요하다”며 배구판을 키울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2024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는 “V리그에 2군 제도가 빨리 도입돼 학생 배구 선수들이 설 자리가 많아졌으면 한다. 2군 제도 도입으로 우리 배구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본인이 설립한 스포츠 사회공헌 재단인 케이와이케이(KYK)파운데이션은 2025년 3월부터 ‘1기 배구 유소년 장학생 선발’ 사업을 시작했다. 해당 사업 역시 배구를 향한 열정과 재능을 갖췄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유소년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기획된 사업이다. 재단은 한국중고배구연맹의 추천을 받은 중·고등학생 중 심사를 거쳐 10명을 선발해 총 460만원의 장학금과 맞춤형 훈련, 심리 상담 및 멘탈 코칭, 배구 캠프 및 대회 참가 기회를 제공한다.
코트 밖에서도 배구를 위해 뛴 김연경은 2020~2021시즌 V리그에 복귀한 뒤 아직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지난 시즌 은퇴를 생각했지만 우승을 위해 미뤘는데, 이제는 “성적과 관계없이 은퇴하겠다”고 선포했다. 아쉽지만 모두가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김연경의 라스트 댄스는 3월31일 인천 삼산체육관에서 막을 올린다.
한겨레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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