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의료는 한갓 기술의 범주로 축소된다. 의사가 입시기술 서열순으로만 수급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또한 한국의 의료는 오롯이 시장경제로 환원된다. 기술자와 자본은 별의별 상품을 쉼 없이 개발해 시장을 부풀리지만, 돈이 되지 않는 분야는 납작하게 시늉만 낸다. 시장 환경이 탐탁지 않게 흘러가면 공급마저 비정하게 차단한다. 그렇게 ‘응급실 뺑뺑이’는 상례가 되고, ‘의료대란’은 때마다 반복된다.
‘돌봄이 이끄는 자리’(반비 펴냄)는 한국의 의료 현실에서 아득히 먼 곳으로 독자를 이끈다. 타이 치앙마이 근교에 있는 ‘반팻’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공병원이다. 책은 두 중환자와 곁을 지키는 가족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문화인류학자인 지은이는 그렇게 이 병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계 행위를 오래도록 깊이 관찰해 문화기술지(Ethnography·현지 조사에 기초한 연구 결과물)로 작성한다. 의료진과 환자, 환자 가족, 마을 공동체가 어떻게 서로돌봄의 다중적 관계망과 역동적 힘을 끌어내는지를, 생생한 등장인물과 서사로 끈기 있게 엮어나간다.
치료부터 하고 진료비는 뒷전인 에피소드는 소소하다. 하지만 타이의 의료 철학이 ‘사회의 필요에 따른 공급’임을 생각하면, 큰 이야기다. 타이는 2002년 의료보험 개혁을 단행해 전 국민에게 포괄적인 혜택을 주기 시작하고, 빈곤층의 의료 접근성을 크게 개선하는 등 공공의료 체계를 탄탄하게 구축했다.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가 여전할 때 시작했으니, 의지로 일군 결과다. 타이 의료 체계에도 적지 않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한국과의 큰 경제력 격차에도 필수·보편의료에서 훨씬 앞서 있는 사실은 휘황한 우리 의료 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지역의 공공병원은 (…) 돌봄의 다른 회로망들과 깊이 연결돼 있다. 따라서 병원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은 (…)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생겨나는 여타의 층위들, 특히 가족과 종교적 믿음에 관한 서사로 확장됐다.” 지은이(서보경 연세대 교수)의 이런 인식에는 못 미치더라도, 기술적 의료 행위가 병원의 기능, 존재 이유의 극히 일부일 뿐임을 아는 순간 우리의 인식 지평은 드넓게 확장된다. 이 책이 한국어 독자 앞에 당도한 경로도 제법 긴 서사를 이룬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이가 타이어 발화자들과 교감해 얻은 것을 영어로 펴낸 뒤 다시 한국인(오숙은)이 번역했다. 돌고 도는 돌봄의 메타포처럼. 376쪽, 2만3천원.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윤서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7천원
열세 살에 조현병을 진단받은 자녀가 서른 살이 되기까지 18년이라는 시간을 담았다. 발병, 반복되는 입퇴원, 학업과 취업, 자립 등 아들 ‘나무’씨의 삶과 더불어 그 곁 가족의 삶도 보여준다. 조현병은 100명 중 한 명이 걸릴 수 있는 비교적 흔한 정신질환이지만, 여전히 사회적 이해와 제도적 뒷받침은 부족하다.

아퀼라의 그림자
듀나 지음, 요다 펴냄, 1만6800원
에스에프(SF) 작가 듀나의 연작소설.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초능력 아이돌’의 치열한 생존 전투를 그린다. 2033년 12월13일, 대구 도시철도 지하 공사장에서 진홍색 젤리로 가득 찬 정체불명 생태계가 발견된다. 그 여파로 남한 인구 3분의 1이 피를 토하며 죽는 적사병이 돌고 초능력자가 등장하는데….

어떤 패배의 기록
김항 지음, 창비 펴냄, 2만원
전후 일본 사상사를 ‘비평’ ‘민주주의’ ‘혁명’ 세 가지로 나눠 해석한 연구 성과를 모았다. 저자가 탐색한 전후 일본의 모습은 ‘패배’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저자는 1945년 이후 다양하게 얽힌 장치가 근대 일본의 존립을 가능케 했던 폭력을 잔존시켰다고 본다. ‘제국일본의 사상’(2015)에 이은 후속작.

자연으로 향하는 삶
이소영 등 지음, 가지출판사 펴냄, 3만2천원
식물 세밀화가 겸 원예학 연구자 이소영, 조류 세밀화가 이우만, 환경·생태 분야 작가 최원형, 동물권 활동가 희복까지 4명의 저자가 자연으로 향하는 삶과 세계관에 대한 네 가지 시선의 생태 에세이를 썼다. 네 개의 이야기를 작은 소책자 형태로 분철했기 때문에 각 이야기를 분리해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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