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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바보’ 미키17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일까, 아닐까

등록 2025-03-14 21:13 수정 2025-03-17 09:58
배설물과 쓰레기를 재료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익스펜더블’(소모품) 미키 17과 미키 18.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배설물과 쓰레기를 재료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익스펜더블’(소모품) 미키 17과 미키 18.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이 글은 영화 ‘미키17’의 주요 장면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에서 가장 돋보이는 설정은 단연 익스펜더블(소모품)이라는 ‘직업’이다. “~해도 일해야지”라는 포스터 문구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듯 자본주의는 인간의 죽음마저도 노동으로 삼아 제 몸집을 효율적으로 불리는 데만 골몰한다. 이는 익스펜더블인 미키가 죽을 때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몸이 쓰레기를 재활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제품 구성품을 줄이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 친환경이라는 말을 쓰는 아이티(IT) 기업들처럼 미키의 몸은 단지 비용 절감을 위해서만 친환경적이다.

쓰레기가 재활용된 ‘익스펜더블’

다른 한편으로, 미키의 몸은 부식토로서의 인간(Human-As-Humus) 개념을 필두로 하는 인류세에 관한 일련의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는 인류가 기후와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 형성된 새로운 지질시대를 뜻한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영구적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사이보그 선언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더 나아가 인류세를 변형한 자본세를 제안한다. 자본세는 자본주의가 생태계에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를 강조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우리는 퇴비(Com-post)이지,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자원화할 권리를 가진 자본주의적 주체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자 유기물 순환의 재료에 불과하다. 배설물과 쓰레기를 재료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미키는 이러한 개념이 문자 그대로 현현한 인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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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 영화의 주인공 미키 17은 크리퍼를 잡아오는 임무에 홀로 투입된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미키17’ 영화의 주인공 미키 17은 크리퍼를 잡아오는 임무에 홀로 투입된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그런 미키에게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다. 미키는 지구를 떠나 니플헤임을 개척하는 우주 개척팀의 일원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17번째 미키, 미키17. 행성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성 대원 제니퍼가 니플헤임에 사는 징그러운 생물 크리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키17은 크리퍼를 잡아오는 임무에 홀로 투입되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의외로 바로 그 크리퍼들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간신히 우주선에 돌아와보니 이게 웬걸, 이미 미키18이 만들어져 있다. 이는 행성당 단 한 명의 익스펜더블만 허용한다는 규칙을 위배하는 ‘멀티플’ 상황이다. 미키의 연인 나샤와 미키에게 연심을 품은 카이까지 얽혀 두 미키와 어떻게 비밀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가운데, 우주선에 어린 크리퍼 두 마리가 나타나는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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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플헤임 탐사팀을 이끄는 독자재 케네스 마셜과 그의 부인 일파 마셜이 팀원들의 식사자리에 나타나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니플헤임 탐사팀을 이끄는 독자재 케네스 마셜과 그의 부인 일파 마셜이 팀원들의 식사자리에 나타나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대원들은 크리퍼 하나를 사살하고 한 마리는 포로로 잡는다. 어린 크리퍼의 비명을 들은 니플헤임의 크리퍼 무리가 우주선을 포위한다. 탐사팀을 이끄는 독재자 케네스 마셜은 크리퍼들과 전쟁을 벌여 행성을 청소하고자 한다. 미키들은 고군분투하여 살아남은 어린 크리퍼를 크리퍼 무리의 대장 마마 크리퍼에게 돌려보낸다. 그 과정에서 미키18은 마셜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이후 나샤는 개척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더는 익스펜더블이 아닌 ‘미키 반스’와 함께 늙어갈 수 있음에 기쁨을 표하는 연설을 한다. 연설의 클라이맥스로 미키17은 기폭장치를 눌러 자신을 복사하던 프린터를 파괴한다. 전형적인 해피엔딩 같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저 너머’로 가지 않는 것은 어떤 기분이야?

영화가 초반부의 (미키가 익스펜더블로서 니플헤임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긴 회상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질주하기 시작할 때, 카이는 미키에게 이렇게 묻는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앞선 논의에 따라 미키의 ‘퇴비성’을 받아들인다면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충돌을 감지할 수 있다. 카이가 횡설수설하며 곧바로 이렇게 덧붙이기 때문이다. “너는 죽어도 저 너머로 가지 않잖아.” 해러웨이를 비롯한 소위 신유물론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저 너머는 없다. 죽은 이는 퇴비가 되고 변기 물은 하수처리장을 거쳐 강이나 바다로 방류된다. 인간 삶의 숭고함을 수호하는 초월적인 힘 역시 없다. 인간은 (다른 생물 그리고 무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에 불과하다. 즉,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크리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카이의 절친한 친구 제니퍼, 그의 주검은 수습됐을까? 수습됐다면 장례는 어떻게 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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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의 육신이 소각됐다고 믿을 증거는 의외로 적지 않다. 우주 개척팀은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선원들은 철저히 계산된 양의 식사만 할 수 있다. 죽은 미키의 육신들은 에너지를 회수하기 위해 모두 소각됐다. 현재 미국에서는 매장 대신 주검을 자연 분해하여 퇴비용 흙으로 만드는 ‘인간 퇴비’ 장례가 확산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인 2054년이라면 해당 장례법이 꽤 보편화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인간 퇴비 장례의 우주선적 변용은 다름 아닌 소각이다. 그렇다면 제니퍼는 미키의 몸이 된 셈이다. 카이가 영화 중반부에 들어 적극적으로 미키를 유혹하는 것은 어쩌면 미키의 몸에 남은 제니퍼의 흔적이 카이를 끌어당긴 결과일 수도 있다.

 

탐사팀을 이끄는 독재자 케네스 마셜과의 저녁식사에 초청된 카이와 미키17. 이런 자리에서도 미키17에게 제공된 음식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체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탐사팀을 이끄는 독재자 케네스 마셜과의 저녁식사에 초청된 카이와 미키17. 이런 자리에서도 미키17에게 제공된 음식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체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미키의 퇴비성은 작품의 메인 플롯이라 할 수 있는 크리퍼와 인간의 대립에서도 중요하게 작동한다. 미키와 크리퍼 사이의 유대가 인간과 크리퍼 사이의 갈등을 끝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미키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저 너머’로 보내져야 하는 인간이었다면, 그래서 작품 초반에 미키가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가 구출됐다면, 미키는 크리퍼들이 친절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퍼들이 우주선을 포위하고 어린 크리퍼를 내놓으라고 위협하는 작품 후반부의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키가 인간이었지만 숭고한 대접을 받지 못한 덕분에.

그런데 만약 정말로 전쟁이 벌어졌다면 어느 쪽이 멸망했을까? 아마 크리퍼였을 것이다. 곧 설명하겠지만, 크리퍼 진영에는 정말로 인간 진영을 멸망시킬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적인 정리이기는 하지만 미키들이 정말로 해낸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용 절감에 불과했다.

도나 해러웨이는 2016년 이렇게 썼다. “지금 현재, 지구는 피난처도 없이 난민(인간이든 아니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브뤼노 라투르가 말하듯 우리가 지구에-묶인 자들(the Earth-bound)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발화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화 속 황폐해진 지구에서 탈출하려는 인간들은 모두 자본세(稅)의 탈세자들로 볼 수 있다. 독재자 마셜이 강조하는 “낙원” 니플헤임은 실상 “세금 낙원”(Tax Haven)이다. 니플헤임으로의 여정은 다시금 손쉽게 오염시킬 수 있는 행성을 얻기 위함이며 자본주의가 지구보다 넓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영생하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

결말부에서 영화는 나샤가 지도자가 된 뒤의 일을 보여주면서 인간과 크리퍼가 공존하게 된 니플헤임을 비춘다. 겨울이 끝난 듯 초록빛이 된 행성. 연구원들은 크리퍼들을 품에 안고 친밀하게 교감을 나누며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다. 미키는 마마 크리퍼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소리로 공격하는 건데 왜 고막이 아니라 눈알이 터지는 거야?” 마마 크리퍼의 반응으로 보건대 크리퍼들에게는 (대치 상황에서 단체로 비명을 지르는 공격을 가하며 미키를 위협한 것과는 달리) 인간들을 모두 없애버릴 힘이 없었다. 이미 갈등은 모두 해소된 뒤였기에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에) 해당 장면은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얼핏 보면 흐뭇한 공생과 유대의 현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셜은 영화 내내 니플헤임 행성을 “순백의 행성”이라고 부른다. 이동에 5년 가까이 걸렸으며 그 이전부터 행성을 관찰하고 인간의 거주 가능성을 따져봤을 것을 고려하면 이는 니플헤임 행성의 일반적 특성에서 기인한 명칭일 것이다. 즉, 본래 니플헤임은 항상 겨울인 행성이라는 뜻이다. 봄이 오고 초목이 우거지는 일은 니플헤임의 본래 생태가 아니다. 이는 마셜이 죽고 나샤가 지도자가 된 뒤에도 예정된 테라포밍(지구 외 다른 천체에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인위적으로 조성해 지구 생물이 원활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계속돼 행성의 기후가 인간이 거주하기 적합하도록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드디어 ‘익스펜더블’(소모품)이 아니게 된 미키 17.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드디어 ‘익스펜더블’(소모품)이 아니게 된 미키 17.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다시 영화 결말부를 떠올려보자. 크리퍼들과 교감하는 것은 ‘연구원들’이고 그들은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다. ‘연구원들’은 크리퍼들을 품에 안고 친밀하게 교감을 나누며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다. 크리퍼가 바뀐 기후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개조하기 위해서다. 독재자들이 죽고 미키가 더는 익스펜더블이 아니게 됐음에도 인물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본주의라는 막후의 힘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다. 인간들은 여전히 자연을 입맛대로 오염시키며 자원화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영화가 그런 기미를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면과 사운드, 미키17이 미키 반스로 바뀌는 마지막 타이틀 장면까지 영화는 의심할 여지 없는 해피엔딩이라고 이야기의 끝을 자축한다. 하지만 이런 연출은 전적으로 영화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바이다. 내레이션을 미키17이 맡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듯 영화는 미키17의 시선을 채택하고 있다. 영화가 지난 세기 에스에프(SF) 소설들에서 흔히 보이던 근거 없는 낙관주의와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키17은 선한 바보(Idiot)다. Idiot은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 또는 가족에게만 관심이 있고 공동의 세계에 관심이 없는 판단력이 흐리고 어리석은 존재를 뜻했다. 미키17 개인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므로 영화도 해피엔딩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바보이므로.

 

박멸 대신 지배를 선택한 거야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미키17이 영화 말미에 꾸는 꿈이다. 그는 프린터를 폭파할 기폭 버튼을 누르기 전, 여전히 소스에 집착하는 일파 마셜이 케네스 마셜을 프린터로 되살리는 환상을 본다. 그것이 헛것임을 깨닫고 몽상에서 깨어나긴 하지만, 그 꿈은 미키가 스스로의 퇴비성에 의해 도달하게 된 화면이다. 해피엔딩이 아니야. 크리퍼와 인간의 관계는 대등한 동료 관계가 아니야. 박멸당하기보다는 지배당하기를 택한 거지. 인간은 또 하나의 행성을 착취하고 있어. 우리는 행성을 갈아 소스를 만들게 될 거야. 달콤한 냄새에 입안이 침으로 가득 차면 비명을 지를 수 없어…. 미키17의 몽상이 일파 마셜의 ‘소스’에 도달하는 것은 스스로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이와 같은 연쇄를 거친 결과일 것이다. 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키17’은 공포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정말로 공포스럽다고.

 

서윤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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