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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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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자 김정숙씨의 자부심

방직공장 노동조합원의 이야기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
등록 2017-08-30 16:27 수정 2020-05-03 04:28

노동이란 밥벌이를 위해 육체적·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모든 행위를 통칭한다. 요즘은 상대방의 직업을 물을 때,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를 따져묻거나 어느 기업을 다니는지 캐묻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취업 자체가 삶의 질을 판가름하는 척도로 작용하는 사회구조 탓이다. 육체적·정신적 노력을 들일 기회를 얻기 위한 시도 자체가 가장 힘든 노동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싶다.

지난해였다. 동생이 직장을 그만두고 내게 연락해왔다. 누나, 아무래도 사무직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좀 쉬었다가 공장에 다니려고. 30대 중반의 동생은 두 아들의 아빠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회식에 넌덜머리가 난다고 했다. 나는 말리지도, 부추기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으나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걱정이 더 컸다. 동생이 원하는 대로 공장에 취직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었다.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대기업 공장들이 해외로 이전한 뒤 빈 공장이 많아졌다는 소리를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드문드문 남은 공장의 인력 또한 동남아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을 싫어해서 그리 되었다고 말하지만, 지방의 젊은 사람들은 남아 있는 공장마저 해외로 옮겨갈까 걱정과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동생 친구들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몇몇은 마땅한 직업을 찾기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날 궁리를 오랫동안 해왔으나 딱히 살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1970∼­80년대처럼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지금의 젊은이들은 돈을 벌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사실, 아무도 모른다.

1970년대 ‘이 땅의 자랑스러운 산업전사’가 되기 위해 서울로 가는 완행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의 목적은 대동소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 장남에겐 성공의 숙제가, 맏딸에겐 부양의 의무가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아픈 큰오빠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부모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오빠의 학비를 벌어오라는 부모의 권유에 떠밀려, 장남의 책임감을 떨치지 못해, 충남 논산에서 전북 진안에서 전남 여수에서 상경한 그들은 막 중학교를 졸업한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다. 은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던 방직공장 원풍모방 노동조합 조합원 7명의 노동자 시절 이야기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1961년생 김정숙씨, 그녀는 열아홉 살 되던 해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여수 앞바다의 외딴섬 송도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도시를 동경했다. 고층 빌딩 사이로 질주하는 자동차들, 네온 불빛이 반짝이는 거리를 걷노라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섬마을에 살던 그녀에게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고 텔레비전을 맘껏 시청하는 기숙사는 호텔이나 진배없었다.

입사하던 해, 광주에서 큰일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사회 초년생인 그녀와 동기들에겐 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신군부정권은 노동계 정화 조치를 빌미로 전국의 노조지부장을 수배했다. 계엄사 소속 군인들이 공장 내부를 순찰하는 일이 잦고 회사 간부들의 감시도 나날이 심해졌다. 연행된 지부장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전경버스가 공장을 둘러싸는 일도 허다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가 원풍노조 해산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1980년 5월 광주 희생자 돕기 모금을 전달한 것이 컸다.

엄혹한 압박 속에서도 정숙씨는 행복했다. 임금 인상을 위한 집회에서 투쟁가를 부르며 디스코를 출 줄 아는 그녀였다. 하지만 입사 2년 만에 원풍노조는 강제 해산되고, 정숙씨는 “들을 귀가 뚫리고 의식이 막 깨려다가 그만 도로 귀가 막혀버리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녀는 형사에게 붙잡혀 끌려가다시피 고향 섬으로 보내졌다. 동네 사람들은 정숙씨를 두고 “서울 가서 수돗물을 먹더니만 간첩이 되어서 잡혀왔다”고 수군댔다. 사람들의 말이 옳다는 듯, 그녀는 몇 년 동안 경찰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정부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녀가 다른 곳으로 취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별수 없이 정숙씨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틈틈이 가정집 파출부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요약하자면 그녀는 삶의 대부분을 빨갱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안고 ‘해고자’로 살았다.

‘그녀들’이 기억하는 2년의 호시절

세상은 ‘자랑스러운 산업전사’로서 정숙씨가 품은 자부심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사회는 그녀에게 돈을 벌어야 성공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녀를 비롯한 조합원들이 한마음으로 바란 것은 다른 성공이었다.

“직장을 잃고 생계에 위협을 받으며 거리를 헤매는 사회가 아니고, 회사도 살찌우고, 진실하게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지 않고 근심 걱정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정숙씨와 그녀의 동기들이 탈춤을 추며 노래하듯 기도했던 내용 중 일부분이다. 끈질긴 오명과 사회적 차별에도 그녀는 원풍모방에서 근무한 2년여 시간을 호시절로 기억한다. 나머지 6명의 대답 역시 비슷하다. 자신이 존중받았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만 했던 날들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의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던 날들, 성공을 바라며 살던 날들이 아니라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바라며 기도하던 날들, 그녀의 남은 삶도 호시절이길 나 역시 기도한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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