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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꿈꾸는 자유로운 존재의 이야기, 데이비드 밴 <아쿠아리움>
등록 2017-07-06 19:01 수정 2020-05-03 04:28

세점박이씬벵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주로 바닥에 파묻혀 있으며 얼핏 봐선 물고기 같지 않다. 한마디로 못생겼다. 반점으로 얼룩덜룩한 피부, 둥글게 휘어버린 등허리, 퉁퉁 부은 눈두덩과 처진 눈, 사람으로 치면 노인 같다. 문득 궁금하다. 물고기도 인간처럼 늙을까? 얼굴에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자라고, 허리가 휠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닌 것 같다. 대체로 인간보다 수명이 짧은 물고기에게 늙음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늙음이란, 죽음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진화 같은 것일까? 그러니까 늙는다는 건 아주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물고기처럼 유연하고 자유로운 존재 말이다.

케이틀린 톰슨에게 자유란 가족이 많아지는 것이다. 가족이 많으면 친구가 없어도 덜 외로울 것 같고, 바쁜 엄마 대신 다른 가족이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케이틀린은 아쿠아리움에서, 빈집에서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외로운 물고기와 다를 바 없다. 기껏해야 둘, 대부분은 혼자서 수조를 헤엄치는 물고기. 다른 점이 있다면 케이틀린은 바다를 꿈꾸는 물고기라는 것이다.

케이틀린의 첫 번째 친구

의 저자 데이비드 밴의 고향 알래스카에 사는 케이틀린은 엄마와 둘이 산다. 초등학교 6학년인 케이틀린의 하루는 이렇다. 2시30분에 하교하면 곧장 아쿠아리움에 들른다.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아쿠아리움의 수조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세점박이씬벵이에 관심을 쏟지만, 내일은 알을 지키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빨강부치를, 그 다음날엔 작은 별자리 같기도 하고 나뭇잎 같기도 한 고스트파이프피시를, 유독 기운이 없는 날에는 수달을 바라본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다. 세점박이씬벵이를 꼭 닮은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너무나 못생겼다는 이유로 “어떻게 얘를 물고기라고 불러요?”라는 케이틀린에게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건 마치 내가 어떻게 사람이냐고 묻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러고는 되물었다. 나이 들어 달라진 자기 얼굴을 두고 “나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놀라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전에 불리던 대로 불릴 수 있을까?”라고.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다. 케이틀린의 첫 번째 친구.

문제는 엄마이다. 엄마는 다른 가족을 원하지 않는다. 남자친구랑 결혼하는 것도 싫어한다. 남편이 되어주기를, 아빠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순간 그는 떠나버린다는 게 엄마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이전보다 외롭게 살고 싶지 않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엄마의 장점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 미래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국 엄마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케이틀린은 엄마가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엄마는 케이틀린을 낳기 전 어디에서 살았는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엄마의 삶을 망가뜨렸고 그걸로 충분하다는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에 화가 나 있다.

과거는 느닷없이 쳐들어온다. 뱃전으로 물고기가 난데없이 튀어 올라오듯이. 케이틀린에게 세상은 포식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바다와 같고, 지상에 들어찬 집들은 모두 아쿠아리움의 수조 같아서 밤에 혼자 잠잘 때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가 이 수조를 들여다보는 걸까? 부디 좋은 사람이어야야 할 텐데 말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이 수조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엄마의 분노도 되살아났다. 엄마에겐 나쁜 아버지였으나 케이틀린에겐 그저 좋은 할아버지. 세점박이씬벵이를 함께 봐주던 할아버지. 그가 얼마나 나쁜 아버지였는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가 어린 딸을 두고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엄마는 지금과 아주 다른 삶을 살았으리라. 적어도 병마에 시달리다 죽은 엄마를 침대에 내버려두고 며칠씩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엄마는 할아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완강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케이틀린은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하루라도 빨리 함께 살고 싶을 따름이다. 그건 케이틀린이 그저 어리고 무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바라던 소원을 이루려는 욕심 때문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케이틀린은 이해한다. 알에서 치어로, 치어에서 성어로 변태를 거듭하는 물고기의 생애를. 치어 시절에는 엇비슷해 보이는 물고기들이 변태 뒤 확연히 달라지는 외양을 가지듯, 사람의 생애도 그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이 미래의 연장선이 아닐 수도 있고, 나쁜 아버지였다고 해서 나쁜 할아버지가 되리라는 법 또한 없지 않은가.

세상이 경계와 벽이 없는 바다라면

“그건 그러니까, 새로운 존재가 아닐까? 게다가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건 대체 무엇일까?”

할아버지의 질문은 결국 힌트였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릴 만큼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치자. 그가 내게 용서받을 길 역시 요원하다. 사람의 너그러움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세상이 경계와 벽이 없는 바다와 같고, 우리가 물고기라면 어떨까. 너무 드넓어서 함께 살고 있다고 인식조차 못하지만 이미 함께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너무 달라져서 알아보기도 어렵지만 설령 내가 그를 기억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지나가는 데 골몰하며 유유자적 헤엄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그 시절을 떠나보내기 전에 이미 나를 지나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저 우리가 물고기라면 말이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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