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로 이스라엘 지상군 병력이 진입했다. 미사일과 포탄과 총탄이 하늘과 바다에 이어 땅에도 밤낮없이 날아든다. 화염이 솟구치고 포연이 치솟는다. 개전 한 달이 채 안 된 가자지구의 인명피해 규모는 20개월째 불을 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이미 넘어섰다. ‘학살을 멈춰라!’ 피 끓는 외침도 소용없다. ‘전쟁범죄다!’ 준엄한 꾸짖음도 하릴없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지옥의 문을 여는 면죄부다. 힘을 앞세운 무한폭력의 억지 앞에서 인류는 얼마나 무력한가.
“내 할아버지, 하임은 농부였다. 아내 바하와 여덟 명의 어여쁜 자녀와 함께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의 작은 농촌 마을에 살았다. 그런데 1944년 봄 할아버지가 살던 작은 마을이 사라졌고, 마을공동체는 지워졌다. 나치는 하임과 바하를 여덟 아이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바하와 일곱 명의 아이, 펄·츠비·사하·후데야·레아·헤냐 그리고 갓난아기 모데하이가 가스실로 끌려가 살해됐고 잿더미로 변했다.”
2023년 10월30일 오후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리야드 만수르 주유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사가 이스라엘의 파상 공세로 벼랑 끝으로 내몰린 가자지구 주민들의 참상을 전하며 즉각적인 휴전과 안보리의 적극적인 역할을 호소하는 발언을 마친 직후였다. 안보리가 공개한 3시간55분여 분량의 회의 동영상을 보면, 에르단 대사는 결기에 찬 표정으로 힘주어 말을 이었다.
“한때 할아버지의 사연은 전혀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공포스러운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너무 먼 옛날이야기여서 3주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일이 벌어졌다. 하마스 테러범들의 침략을 당한 이스라엘 남부 농촌 마을은 조부모님이 살던 트란실바니아의 마을과 비슷했다. 마을 전체가 말살됐다. 이번엔 살인자가 ‘하마스 나치’였다. 전체 이스라엘 가정이 연기와 잿더미로 변했다. 우리 조부모님 가족이 아우슈비츠에서 마주한 운명과 다르지 않았다. 야만스러운 ‘하마스 나치’와 독일 나치의 공통점은 비단 범죄의 잔혹성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공통의 이념을 공유했다. 바로 유대인을 절멸시키는 것이다.”
가자지구 최북단, 이스라엘에 가까운 자발리아에는 가자 최대 규모 난민촌이 있다. 전체 면적은 1.4㎢에 불과하지만, 자발리아 난민촌은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11월1일 유엔 등의 자료 내용을 따 “자발리아는 가자지구에 있는 8개 난민촌 가운데 최대 규모로, 팔레스타인 주민 11만6천여 명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1987년 12월9일 이스라엘군 트럭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탄 차량을 들이받아, 자발리아 주민 3명을 포함해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자발리아에서 시작된 항의시위는 가자지구 전역과 요르단강 서안 일대까지 삽시간에 번져갔다. 이후 5년9개월여 이어진 이스라엘군의 점령 통치에 맞선 제1차 인티파다(저항)의 시작이었다. 자발리아는 ‘저항의 거점’이었다.
2023년 10월31일과 11월1일 이스라엘군이 자발리아 중심가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이틀에 걸친 파상공세로 모두 195명이 숨지고 777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120명은 실종 상태다. 마틴 그리피스 유엔 인도주의·긴급구호 담당 사무차장은 성명을 내어 “전투는 더욱 끔찍한 단계로 접어들었고, 참혹한 인도적 상황이 가중되고 있다. (자발리아 난민촌 폭격 사건은) 가자지구 주민들이 맞닥뜨린 참상의 최신판일 뿐”이라고 탄식했다.
앞서 유엔 총회는 10월27일 아랍권 22개국이 공동 발의한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전체 193개 회원국 가운데 120개국의 찬성표를 받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미국 등 14개국이 반대표를 던졌고 한국을 비롯한 45개국은 기권했다. 총회는 결의에서 △적대행위 중단으로 가기 위한 즉각적이고 지속 가능한 휴전 △모든 교전 당사자의 국제인권법·인도주의법 준수 △가자지구 주민에 대한 즉각적이고 충분한 생필품 공급 △점령군 이스라엘의 민간인 피란 명령 취소 등을 촉구했다. 이미 유엔 안보리가 네 차례나 결의안 통과에 실패한 터다. 총회가 법적 구속력도 없는 결의를 통과시킨 것은 가자의 참상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휴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또 9·11 동시 테러 직후 미국이 휴전에 합의하지 않은 것처럼 이스라엘도 하마스와 교전 중단에 합의하지 않을 것이다. 10월7일의 끔찍한 공격 이후 이스라엘에 휴전을 요구하는 것은 하마스에 항복하고, 테러에 항복하고, 야만에 항복하라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0월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날 네타냐후 총리가 성서 <전도서> 3장8절 내용을 따 “사랑해야 할 때가 있고 미워해야 할 때가 있으며, 전쟁해야 할 때가 있고 평화를 추구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공동의 미래를 위해 전쟁해야 할 때”라며 “오늘 우리는 문명세력과 야만세력 간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제 모두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자국이 ‘어느 편’에 섰는지 분명히 했다 . 해군 제독 (준장 ) 출신인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NSC) 전략소통조정관은 10월 31일 정례 브리핑에서 유엔 총회의 인도주의적 휴전 촉구 결의안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
“현재로선 휴전이 옳은 해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이스라엘이 하마스 지도부를 겨냥한 군사작전을 진행하는 지금 휴전하면 하마스한테만 보탬이 될 것이라고 본다 . 이미 말한 것처럼 지금 고려해야 할 것은 일시적이고 특정 지역에 국한한 인도주의적 전투 중단을 통해 특정 주민들에게 구호물품을 전달하고, (가자지구) 남쪽으로 피란을 원하는 주민들이 있다면 이를 지원하는 것이다. 이런 방안은 지지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전면적 휴전에 찬성할 수 없다.”
10월30일 안보리 회의에서 길라드 에르단 대사는 18분 남짓 발언을 이어갔다. 발언이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작심한 듯 이렇게 말했다. “내 할아버지와 자녀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을 때 세계는 침묵했다. 그의 자녀들이 가스실로 끌려갔을 때 세계는 침묵했다. 그들을 비롯해 수백만 명의 주검이 불태워졌을 때 세계는 침묵했다. 무고한 유대인 어린이가 불태워진 오늘 안보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단 대사가 유대인을 상징하는 노란색 ‘다윗의 별’을 오른쪽 가슴에 붙였다. 뒤에 앉은 그의 보좌진도 모두 노란 별을 달았다. 별 안쪽에는 ‘다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에르단 대사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일부 이사국은 안보리가 왜 설립됐는지를 잊은 것 같다. 기억을 일깨워주겠다. 오늘부터 매번 나를 볼 때마다 불의 앞에 침묵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내 조부모와 수백만 유대인의 조부모처럼 지금부터 나와 동료들은 노란 별을 달 것이다. 안보리가 하마스가 벌인 참극을 비난할 때까지, 납치된 인질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할 때까지 별을 달 것이다. 이 별은 자부심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방어할 것이란 맹세의 표시다. (…) 이스라엘은 강하다. 우리를 꺾을 순 없다.”
10월9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실(OHCHR)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정례 보고서를 내놨다. OHCHR 쪽은 2022년 2월24일부터 2023년 10월8일까지 약 20개월 동안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모두 9806명이 숨지고, 1만7962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했다.
이를 시기별로 보면, 개전 직후인 2022년 3월 한 달 사망자가 4182명으로 가장 많았다. 2023년 들어선 2월(144명) 이후 한 달 사망자가 200명 이하로 유지되고 있다. 연령대별로는 성인 사망자가 9246명, 어린이 사망자가 560명이었다. 성인 사망자가 가운데 남성은 4571명, 여성은 2756명으로 집계됐다. 나머지 1919명은 성별이 확인되지 않았다.
11월2일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 내놓은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의 최신 상황은 어떤가? 10월31일 정오부터 11월1일 오후 2시까지 모두 280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으면서, 10월7일 이후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8805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적어도 3648명이 어린이, 2187명이 여성이다. 누적 부상자는 2만2240명으로 집계됐다.
10월26일 현재까지 희생자 가운데 3분의 2가 자기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가자 주민 444가구는 가족 구성원 2~5명을 잃었다. 136가구는 6~9명을 잃었다. 또 192가구는 10명 이상의 가족을 잃었다. 앞서 OCHA 쪽은 10월29일 현재까지 어린이 1050여 명을 포함해 적어도 1950명이 실종된 상태로,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것으로 추정했다. 이스라엘의 ‘방어권 행사’는 오늘도 계속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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