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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집 아니라 성당입니다

119년 전 건립한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9대째 삼종지기 여전히 하루 세 번 ‘종소리’
등록 2025-01-23 15:02 수정 2025-01-26 08:04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100여 년 전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강화섬에 정착하면서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의미로 한옥 방식의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세워진 뒤 오전 6시와 정오, 오후 6시에 맞춰 하루 세 번 삼종이 울려 퍼진다. 시간을 알리는 역할인 동시에 종소리에 맞춰 서로의 안녕과 평안을 기도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오후 6시 시간에 맞춰 종을 치고 있는 삼종지기 고상만씨.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100여 년 전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강화섬에 정착하면서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의미로 한옥 방식의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세워진 뒤 오전 6시와 정오, 오후 6시에 맞춰 하루 세 번 삼종이 울려 퍼진다. 시간을 알리는 역할인 동시에 종소리에 맞춰 서로의 안녕과 평안을 기도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오후 6시 시간에 맞춰 종을 치고 있는 삼종지기 고상만씨.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1906년에 건립한 인천 강화 길상면 온수리성당은 품격 있는 양반집 같다. 성당 내부에는 100여 년 전 성당에서 쓰인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성당 옆에는 2004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새 교회도 자리하고 있다.

엄숙한 분위기의 성당 내부. 바실리카 양식을 취하고 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목조의자와 나무로 만든 풍금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일제강점기 때 쓰였던 성가집, 구식 난로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엄숙한 분위기의 성당 내부. 바실리카 양식을 취하고 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목조의자와 나무로 만든 풍금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일제강점기 때 쓰였던 성가집, 구식 난로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온수리성당은 우리 전통 목조건축을 어떻게 하면 성당이라는 용도에 맞게 지을지를 잘 고민하고 지은 건물 같다. 성당에 가보면, 입구에 전통 기와를 얹은 종루에 적힌 빛바랜 작은 현판이 이곳이 대한성공회 성당임을 알린다. 종루 천장에 매달린 종은 지금도 매일 오후 6시면 청아한 소리를 울려 세상을 따뜻하게 덮는다. 처음 달려 있던 종은 영국해군 군함에서 사용하던 것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징발됐고 지금 종은 한국전쟁 이후 새로 제작한 것이다.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도록 망루처럼 만든 솟을지붕 아래 종을 매달아 미사 시간에 맞춰 울린다.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도록 망루처럼 만든 솟을지붕 아래 종을 매달아 미사 시간에 맞춰 울린다.


27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같은 시각 성당 종을 울리는 삼종지기 고상만(75)씨가 종에 대해 설명했다. “오전 6시, 정오, 저녁 6시 하루 세 번, 시간은 엄격하게 지킵니다. 마을 어르신 중에는 여전히 종소리로 시간을 아시는 분이 있거든요. 단 예외가 있습니다. 교인이 임종하실 때는 연세만큼 종을 울려 마을에 알립니다. 지금껏 한 200여 분이 떠나시는 길에 종소리를 울려드렸어요.”

대한성공회 성안드레성당. 1906년에 건립된 온수리성당의 본당인 이곳은 마치 품격 있는 양반집 같다. 성안드레성당은 평신도들이 땅을 기부하고 헌금을 모아 지은 성당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성공회 성안드레성당. 1906년에 건립된 온수리성당의 본당인 이곳은 마치 품격 있는 양반집 같다. 성안드레성당은 평신도들이 땅을 기부하고 헌금을 모아 지은 성당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후 6시를 알리는 휴대전화 알람소리가 나자 종에 연결된 줄을 잡는다. 힘차고 절도 있게 종을 친다. ‘대앵 대앵 대앵’ 세 번 종이 울린다. 잠시 침묵한 뒤 다시 힘있게 종을 친다. ‘대앵 대앵 대앵’ 그렇게 한 번 더 종을 친다. 세 번씩 세 차례 종을 치기 때문에 이 종을 울리는 이를 삼종지기라고 부른다. 고씨는 9대째 삼종지기다.

120여 년간 작은 마을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강화를 품어온 온수리성당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120여 년간 작은 마을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강화를 품어온 온수리성당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온수리성당은 2004년 문을 닫고, 지금은 박물관처럼 쓰이고 있다. 50여 명이 앉을 법한 작은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목조기둥과 목조의자, 나무로 만든 풍금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일제강점기 때 쓰였던 성가집, 구식 난로, 성당과 함께 늙어간 풍금도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성가대 연주자의 손을 거쳐갔을 풍금 건반 하나하나에 소소한 역사가 서려 있다.

강화도 작은 시골 마을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다.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성공회 온수리성당이다. 같은 뜰 안에 있는 두 개의 성당 건물이 완전히 딴판이다. 2004년에 축성된 유럽풍 현대식 성당과 1906년 건축한 한옥 양식의 옛 성당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강화도 작은 시골 마을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다.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성공회 온수리성당이다. 같은 뜰 안에 있는 두 개의 성당 건물이 완전히 딴판이다. 2004년에 축성된 유럽풍 현대식 성당과 1906년 건축한 한옥 양식의 옛 성당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온수리성당은 건축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19년 전국을 휩쓴 3·1 독립운동의 바람이 이곳에도 불었다. 태극기가 높이 달린 온수리성당에 수백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성당 한편에 독립운동가 김여수 마태의 묘와 순국비가 있다. 항일운동으로 대전형무소에서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김여수(1922~1945) 성도의 독립운동 기록을 온수리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

온수리성당은 건축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19년 전국을 휩쓴 3·1 독립운동의 바람이 이곳에도 불었다. 태극기가 높이 달린 온수리성당에 수백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성당 한편에 독립운동가 김여수 마태의 묘와 순국비가 있다. 항일운동으로 대전형무소에서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김여수(1922~1945) 성도의 독립운동 기록을 온수리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


사진·글 강화(인천)=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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