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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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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그 남자를 생각한다

그녀를 잃은 ‘그날의 일’과 ‘그날의 자신’에 머물러 있는 황정은의 ‘웃는 남자’
등록 2017-10-31 17:37 수정 2020-05-03 04:28

양천구 목2동 505번지, B02호 반지하에 틀어박혀 오랫동안 생각 중인 남자가 있다. 생각은 오로지 ‘그 일’에 머물러 있다. ‘그 일’이 벌어진 ‘그날’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남자는 단순한 삶을 살고자 결심했다. 가구도 조명도 없앤, 텅 빈 거나 마찬가지인 집에서 생각을 이어가느라 종일 앉아 있다 잠이 오면 누워 잔다. 식기도 없앴다. 조리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끼니를 이어간다. 주로 생쌀이나 보리를 씹어 먹으면서 ‘그날의 일’ ‘그날의 자신’을 떠올리는 데 남자는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내 잘못이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끈질기게 생각한다.

사랑의 속성은 계속 넓어지는 것

황정은의 소설집 에 실린 ‘웃는 남자’의 그 남자. 이전에는 소설집 에서 ‘도도’라는 이름으로 나온 그 남자다. ‘디디의 우산’(), ‘웃는 남자’()로 이어지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똑같은 제목을 달고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에 실렸다. 즉, 중편 는 그의 가장 최근 근황이다.

그의 예전 근황은 이러하다. 한때 남자는 공항 화물센터에서 식판 씻는 일을 했다. 그즈음 그에겐 함께 지내는 여자가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어른이 된 뒤 우연히 다시 만나 함께 살았다. 부실하게 지은 옥탑의 좁은 방이 두 사람의 집이었다. 평일에는 둘이 각자 퇴근한 뒤 만나 저녁을 해먹고 서로에 대해 참견하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주말에는 방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다 잠자리에 들었다. 살림이 넉넉진 않아도 사는 재미가 있었다. 사소한 제스처만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재미 말이다.

그는 여자를 아름답게 여겼다. 여자의 따뜻한 뒤통수를, 피곤한 어깨를, 작은 귀를, 부족하고 남루한 생활 속에서 주고받는 유머와 슬픔을, 쓰다듬고 만질 때마다 느껴지던 감각 모두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고, 그 행복으로 나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번번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날들. 요약하자면 한때 그는 행복했다. 더 행복해져야겠다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살아졌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는.

갑자기 무용한 고백을 해본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안부를 누가 물어올 때, 별안간 다정해진다.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아주 나쁘게 살진 않았나보다 싶어 습관처럼 이어가던 불안과 근심도 쉽사리 잊힌다.

어떤 친구는 마치 가장 중요한 용건을 잊었다가 뒤늦게 떠올린 것처럼 다급하게 묻곤 했다. “아, 맞다! 엄마는 잘 계시지?” 그러고선 안도했다. 다른 친구는 종종 내가 키우는 개의 안부를 물었다. 아는 동생은 뜬금없이 “언니, 애인은 잘 지내지?” 묻고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럼 됐다” 하고 한결 밝아진 어조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엄마를 본 적도 없는 친구, 내가 키우던 개의 사진을 몇 번 본 적 있는 친구, 내 애인의 이름도 모르는 동생.

그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이유는 나의 행복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들을 떠올리면, 사랑의 속성은 깊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 넓어지는 것인 듯하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진짜 근심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잃는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남자의 그날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 그날 퇴근한 두 사람은 함께 버스에 올랐다. 앉을 자리가 없어 버스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섰다. 첫 번째 좌석 앞이었다. “집에 호박이 있어.” 여자가 말하던 참에 9인승 승합차가 버스를 들이받았다. 놀란 남자는 자신의 가방을 움켜쥐었고 여자는 창밖으로 튕겨나가 죽었다. 가방 안에 뭐가 들었냐면 충전기, 열쇠, 통장과 도장, 피부염 연고, 껌, 손수건, 영화 티켓, 복권 한 장, 동전, 메모 등등. 말하자면 잡동사니들. 왜 여자가 아니라 가방을 붙잡았는지를 생각하면 답은 하나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다.

속수무책으로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면?

돌이켜보면 그 여자와 살던 옥탑방의 벽지는 지저분했고, 도금이 벗겨진 손잡이 때문에 툭하면 손을 베였다. 욕실 천장에선 흙탕물이 흘러내렸고, 보일러를 켜지 않으면 금세 이불이 눅눅해졌다. 살기 편해서 행복했던 게 아니라 불편한 여건에 잘 적응해서 행복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남자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생각이란 게 없어서였다고. 근 70년째 휴전 중인 이 나라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한 이유 중 하나는 전쟁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고, 생각하지 않으니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고, 상상하지 않으니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궁금하질 않다. 행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러다 불시에, 조짐도 예고도, 징조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기 시작할까? 도도라 부르기도 하고 그저 d라고 부르기도 했던 그 남자를 떠올릴까.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그 남자는 최근 취직을 했다. 친구의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애인이 안녕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요즘 나는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않던 것을 더 이상 우습게 여기지 않으려고. 좀더 넓어지려고. 당신의 안부도 걱정하면서 살아보려고, ‘웃는 남자’를 생각 중이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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