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복을 입은 모습의 이천진. 동아일보 1926년 6월26일치.
1925년 3월18일 수요일 오전 9시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이 시작됐다. 정오 기온이 4.4도에 머문, 쌀쌀한 날씨였다. 서울 교외 청량리에 있는 예과 캠퍼스에서 닷새 동안 시험이 치러졌다. 1924년 제1회 입학생 선발에 뒤이어 두 번째로 시행되는 입학시험이었다.
이천진(당시 22살)은 수험생 대열 속에 있었다. 모집 정원이 160명이었다. 이과 80명, 문과A(법학) 40명, 문과B(문학) 40명인데, 이천진은 그중에서 ‘문과B’를 지망했다. 지원자 수는 884명이었다. 고등보통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거나 그럴 예정인 조선인·일본인 수재들이었다. 5.5 대 1의 경쟁률이었다.
실질 경쟁률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민족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당국자는 “시험 채점에 대하여는 참으로 엄격 공평하다”는 것을 힘줘 강조하곤 했다.1 민족 여하에 상관없이 오직 시험 성적으로만 신입생을 선발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1924년 시험을 치른 제1회 입학생 168명 가운데 조선인은 44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2 조선인의 비중은 25~30%에 갇혀 있고, 나머지 70~75%를 재조선 일본인과 일본 거주 일본인이 절반씩 나누는 실정이었다. 민족과 출신지별로 미리 비율을 안배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정원만이 아니었다. 입시 문제 자체가 일본인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었다. 문과를 지원한 이천진이 응시해야 하는 과목은 넷이었다. “일본어와 한문(일문해석·한문해석·받아쓰기·작문), 영어(해석·일문영역·받아쓰기), 수학(대수·평면기하), 역사(일본사·동양사)” 등이었다.3 어느 과목이나 다 일본어로 출제됐고, 주관식으로 답해야 했다. 일본어에 능숙하고 일본 역사와 문학을 잘 알아야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보기를 들어 역사 과목을 들여다보자. 다섯 문항인데, 그중 3개는 일본사 영역이었다. 1번 문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무역 장려 정책에 대해 쓰시오”이고, 2번 문제는 “히가시야마시대(東山時代)의 미술과 공예에 대해 쓰시오”였다. 3번 문제는 더 어려웠다. “다음 사항을 아는 대로 쓰시오 (1)구로도도코로(藏人所) (2)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였다.4 일본 고대·중세사의 정치와 미술, 제도, 인물에 대해 상세한 지식이 있어야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유려한 일본어 작문 능력도 갖춰야만 했다.

서울 청량리에 있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 임경석 제공
이천진은 이 어려운 장벽을 잘 뛰어넘었다. 그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정원 160명 가운데 30.6%에 해당하는 조선인 49명 안에 포함될 수 있었다. 입학 동기생 중에는 뒷날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성장하는 박문규, 소설가 이효석, 미술사학자 고유섭, 한글학자 이희승 등이 있었다.
이천진은 경성제대 예과 합격만으로도 일약 이름을 얻었다. 그의 처소는 조선인 교육 장려 단체인 조선교육협회의 수표동 기숙사였다. 지방 출신의 유학생과 고학생을 위한 시설이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의 이천진이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신문기자가 방문한 1925년 4월 당시 그곳에는 학생 92명이 수용돼 있었다. 기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학업에 전념하는 고학생들을 칭찬했다. 그중에서 특히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길’을 열어나간 대표적인 본보기로서 이천진을 손꼽았다.5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표적이 됐다.

1925년 3월에 시행된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 문제. 동아일보 1925년 3월25일치.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이천진은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6·10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단지 가담만 한 게 아니었다. 주도적으로 그것을 이끌었다. 그는 뒷날 자신이 6·10 만세운동에 참여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삐라조차 모조리 빼앗겼고 지도자를 전부 잃은 우리들은 운동의 재출발을 부득이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삐라 인쇄, 태극기 제조 등을 시급히 하여야 하였기에, (1926년 6월)7일에 평동 12번지 김종찬씨 댁에서 명함인쇄기로 삐라 만여 매를 박고, 8일에는 연전(延專) 뒤산 송림 속에서 태극기 60여 개를 만들고 (…) 압수와 검거로 이 운동이 좌절된 듯한 감을 갖게 되는 동지들에게 연락을 새로 하여야 하는 등, 긴급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불면불휴 맹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6
첫 문장에 나온 ‘우리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조선인 중등·전문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운동 단체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임원진을 뜻했다. 이 단체는 합법 단체였다. 이천진이 경성제대에 입학한 그해 9월에 서울 시내에서 공개적으로 결성됐다. 이천진은 이 단체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창립 때부터 간부였다. 집행위원 1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창립 한 달 뒤인 1925년 10월31일에는 과학 강좌 개최가 경찰의 불허 방침으로 어렵게 되자, 다른 집행위원 3명과 함께 총독부 경무국과 경기도 경찰부를 방문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천진은 6·10 만세운동을 함께 모의한 사람들 6명의 이름을 회고록에서 밝혔다. 조두원(22), 정달헌(28), 이병립(23), 박두종(23), 박하균(24), 이선호(23)가 그들이다. 이들은 연령별로는 20대 초중반의 또래 집단이었고, 중등·고등 교육과정 학생이었다. 경성제대(1명), 연희전문(4명), YMCA학관(1명), 중앙고보(1명)에 재학 중인 청년 지식층이었다. 연희전문 학생의 비중이 절반 이상임이 주목을 끈다. 이 가운데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한 이도 있었다. 조두원, 정달헌, 이병립 3명은 조선공산당원임이 확인된다. 다른 사람 중에도 고려공산청년회 등 비밀결사에 입회한 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천진이 말하는 ‘우리들’이란 조선공산당 구성원을 내포한, 서울 시내 중등·고등 교육과정의 학생운동을 이끄는 사회주의 계열 학생 지도부를 말한다.
삐라를 모조리 빼앗기고, 지도자를 잃었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1926년 6월6일 시작된 대규모 공산당 검거 사건을 뜻한다. 6·10 만세운동 발발 나흘 전이었다. 3·1 운동 같은 대규모 반일시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극한적인 경계 태세를 펴고 있던 일본 경찰은 이날 마침내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천도교당 안에 숨겨뒀던 5종의 반일 유인물 6만 장을 압수했고, 인쇄를 책임졌던 공산당원들과 지하활동 중이던 권오설 등 당간부들을 차례로 체포했다. 이날 이후로도 연이어 검거했다. 6월10일, 6월21일, 7월17일, 8월19일 검거 선풍이 일었다. 이로 인해 제2의 3·1 운동을 일으키려고 준비 중이던 조선공산당이 큰 타격을 입었다.
운동의 재출발을 계획했다는 말에 눈길이 간다. 무슨 뜻인가? 6월6일 이전에는 학생운동 지도부는 서울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것만 책임지고 있었다. 그 밖의 일은 공산당과 공청, 그리고 그와 합작한 천도교 일부 지도자의 몫이었다. 3·1 운동 때와 같이 ‘민족대표’를 구성하고, 대규모 유인물을 준비하며, 각 지방 도시와 연락해 전국적인 동시다발 시위를 계획하는 일 등은 선배들이 추진하고 있었다. 그 일들이 6월6일 검거로 인해 모두 좌절된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운동 지도부는 ‘운동의 재출발’을 결의했다. 자신들의 힘만으로 가능한 모든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6·10 만세 디데이까지 불과 사흘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대중을 결집할 수 있는 유인물을 급히 만들어야 했고, 시위 군중을 이끌 태극기 깃발도 제작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위 현장의 행동을 통일하는 수단으로 호각도 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울 학생들의 동원 연락망을 재가동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6월6일 검거로 인해, 운동이 이미 실패로 돌아간 것 같은 사회적 집단심리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미 짜뒀던 대중 동원 체계가 풀어져버렸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긴급사태를 맞아서 맹렬하게 활동했다. 잠도 자지 않고 한시도 쉬지 않는 불면불휴의 활동이었다.
고종 임금의 장례식 때 3·1 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 순종의 장례식날 6·10 만세운동이 발발했다. 인산 행렬이 지나가는 노선을 따라 서울 곳곳 8개 장소에서 유인물이 살포되고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긴장과 흥분, 감격의 공기가 서울을 뒤덮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종로경찰서 형사들은 6월10일 시위 현장에서 약 150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중앙고보 51명, 연희전문 35명, 세브란스의전 8명, 보성전문 7명, YMCA학관 2명, 휘문고보 1명, 기타 등이었다. 그 외에 동대문경찰서, 본정경찰서 형사들도 각각 50명, 10여 명의 체포자를 냈다.
이천진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조선독립만세사건의 계획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2주를 보낸 뒤, 1926년 6월24일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 미결감 독방으로 옮기게 된 그는 그곳에서 공판 개정을 기다렸다. 그해 11월2일 제1회 공판이 열렸고, 11월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심 판결을 받았다. 징역 1년에 5년간 집행유예형이었다. 바로 석방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검사가 불복해 상급심에 항소했다. 1927년 4월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제2심 판결이 있었다. 징역 1년형이었다.
형사처벌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 하나의 상실을 겪어야 했다. 경성제국대학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6·10 만세운동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 뒤였다. “6월10일 사건의 수모자의 한 사람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예과생 이천진에게 대하여는 동교로부터 퇴학을 명하였다더라”는 신문 기사가 떴다.7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운동에 참여한 대가로 이천진은 그동안 애써 얻었던 사회적 성취를 모두 잃고 말았다.(다음호에 계속)
참고 문헌
1. ‘경성대학 지원자 금년에도 신분조사’, 조선일보 1925년 1월13일.
2. 일기자,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개교식을 보고서’, 개벽, 76쪽, 1924년 7월.
3. 경성제국대학, ‘생도모집’, 조선총독부관보 3719호, 1925년 1월10일.
4. ‘예과입학자 선발시험 문제’, 동아일보 1925년 3월25일.
5. ‘飢寒은 到骨인데, 학력은 최우등’, 동아일보 1925년 4월6일.
6. 李天鎭, ‘6·10 운동의 회고(상)’, 독립신보 1946년 6월10일.
7. ‘李天鎭은 결국 퇴학 명령’, 조선일보 1926년 6월17일.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https://h21.hani.co.kr/arti/COLUMN/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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