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 막 내린 젊은 지식인의 혁명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양명(梁明)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1930년 중반, 국외 근거지에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국제당 동방비서부의 지휘를 직접 받지 않는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종파’로 간주되...2025-03-29 23:21
젊은 지식인, 사회주의 운동선을 통합하다양명(梁明)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처음 가담한 것은 중국 베이징 유학 시절이었다.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24년 말, 기관지 ‘혁명’을 발간하는 사회주의 단체 결성에 참가했다. 이 단체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창일당’(創一黨)이라는 기...2025-03-08 20:44
신입 기자, 심층보도로 중국 정세를 꿰뚫다1년 1월29일 저녁, 양명(梁明) 기자는 경성역을 출발하는 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조선일보사의 기자였다. 입사한 지 1년6개월밖에 안 된 26살의 젊은 신입 기자였으나 사내에서 점하는 비중은 여느 선배 기자들 못지않았다. 이번 취재 출장에 선발된 것만 보더라...2025-02-15 22:32
전 재산 기부하고 사회주의 운동 뛰어들다전 재산을 소작 농민들에게 기부한 사람이 있다. 강택진(姜宅鎭)이라는 이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일대에 넓은 농지를 소유했고, 다수의 땅 없는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그 대가로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서 생활하던 지주였다.1923년 4월26일 일간신문 지면에 ‘토지를 ...2025-01-30 08:01
전 재산 기부하고 사회주의 운동 뛰어들다전 재산을 소작 농민들에게 기부한 사람이 있다. 강택진(姜宅鎭)이라는 이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일대에 넓은 농지를 소유했고, 다수의 땅 없는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그 대가로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서 생활하던 지주였다.1923년 4월26일 일간신문 지면에 ‘토지를 ...2025-01-25 15:10
소련 비밀경찰은 조선 혁명지도자를 어떻게 취조했단 말인가주종건은 탈출을 결심했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지 1년9개월이 지난 때였다. 발각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보복이 뒤따를 터였다. 그래도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1927년 9월11일을 디데이로 정했다. 조선공산당 제1회 공판이 예정된 9월13일로부터 이틀 전...2025-01-09 20:08
시대를 꿰뚫은 기자, 비밀결사를 이끌다주종건은 유능한 저널리스트였다.온 사회의 이목을 끄는 현안이 제기되면 그에 대응하는 기사를 기민하게 써냈다. 단편적인 보도 기사가 아니었다. 사안의 자초지종과 성격을 보여주는 심층적인 탐사보도 기사를 내놓았다.보기를 들어보자. 물산장려운동이 전 조선의 여론을 뒤흔들며 ...2024-11-23 22:21
조선에 레닌·트로츠키가 있다면 다름 아닌 이 사람주종건(朱鍾建)은 제1세대 사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1세대 사회주의자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대체로 1890년대에 태어나서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국내 비밀결사나 국외 망명자 단체에...2024-11-02 22:17
걸어 다니는 ‘옥편’, 대둔산 유격대를 이끌다빨치산 연구를 처음 개척한 김남식은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의 존재에 주목했다. 6·25 전쟁 당시 충남의 유격대는 바로 그의 지휘 아래 조직됐다고 한다. 김남식의 기록을 살펴보자. 1950년 9월 하순, 인민군 후퇴기가 되자 “충남의 여러 도당위원회, 도인민위원회 및 ...2024-10-12 22:00
함경도 ‘아바이’가 경상도로 간 이유는?대성골은 지리산의 한 골짜기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 자리잡은 커다란 계곡이다. 지리산 주능선의 세석평전에서 골짜기 아래편 쌍계사 입구까지 거리만 16㎞가 넘는다. 빗점골 방향 능선과 삼신봉 능선, 두 병풍 사이에 있는 넓은 계곡 속에 작은 능선들이 부챗살처...2024-09-21 20:13
혁명에 눈뜬 기관차 수리공, 지리산에 잠들다남경우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6·25전쟁 때 노동당 경남도당 위원장이라는 요직에 재임한 사람인데도 그랬다. 동지들도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적었다. 전쟁 시기에 경남 빨치산에 참가했던 김교영(1927~2021)은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본명이 아닐 것이라고 보았다. “‘...2024-09-01 15:28
일제가 사찰하던 독립운동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지다체포된 지 근 2년 만이었다. 조리환(曺利煥·30)은 서대문형무소 옥문을 나섰다. 1927년 10월15일 오후 5시였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것이었다. 질병으로 인한 보증 석방제도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조선총독부 판사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사안이었다. 대...2024-08-11 11:39
‘열혈 청년’ 이성태는 왜 동지들을 고발했나도대체 김춘성(金春成)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국제공산당과 소련 정부 기관에 고발한 행위 말이다. 그는 모스크바 조선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김단야를 음해하는 고발장을 썼다. 1937년 9월28일자였다.무서운 시절이었다. 스탈린 집권...2024-07-20 23:41
비운의 기록, ‘조선공산당 선언’은 누가 썼을까한국 독립운동의 이념을 대표하는 문헌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3·1운동을 상징하는 민족대표의 ‘기미독립선언서’를 거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내용을 기억하는 국민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인도주의에 입각...2024-06-30 14:49
“나의 사망신고는 광복 뒤에 하라”김명식이 마지막 숨을 거둔 때는 1943년 5월14일이었다. 태평양전쟁 와중이었다. 일본의 국운이 크게 떨치는 듯이 보이던 시기다. 1년 반 전에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 일본은 개전 초기에 기염을 토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석권했고, 오...2024-06-08 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