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을 이끈 학생은 늘 현장에 있었다 이천진이 석방된 날은 1927년 9월20일이었다. 체포되고 1년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날 새벽 5시30분 해 뜨기 전 어두컴컴한 시야를 뚫고, 젊은 죄수 8명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육중한 옥문 사이로 걸어 나왔다. 6·10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2026-02-10 18:23
‘조선인 차별’ 뚫고 대학 간 이천진, 태극기 휘날리다 결국…1. 수재1925년 3월18일 수요일 오전 9시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이 시작됐다. 정오 기온이 4.4도에 머문, 쌀쌀한 날씨였다. 서울 교외 청량리에 있는 예과 캠퍼스에서 닷새 동안 시험이 치러졌다. 1924년 제1회 입학생 선발에 뒤이어 두 번째로 시행되는 입학시험이...2025-12-28 11:47
평생 항일투쟁하다가… 스탈린에게 일제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다1. 투옥 디데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6·10 만세운동 거사 예정일이 4일 앞으로 다가왔다. 유인물 10만 장 인쇄를 모두 마치고 전국 배포를 위해 안전한 곳으로 반출하는 일도 마무리한 뒤였다. 당시 스물여덟이던 민창식은 긴장과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2025-12-14 17:04
명성왕후 친정집에서 항일시위를 조직하다서울 종로구에 ‘율곡로3길’이 있다. 서울공예박물관 입구부터 정독도서관 앞까지 이르는 440m 길이의 도로다.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1차선 도로 양편에 인도가 조성돼 있다. 박물관과 학교, 도서관, 카페가 어우러진,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이 길은 ‘감고당길’이...2025-11-26 11:24
항일투쟁 동지 ‘트랴피친’의 죽음, 독립군 내홍으로 번지다니콜라옙스크 한인 무장부대의 김낙현(김 인노켄티) 참모장은 자신이 이끌었던 험난한 행군 경험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사할린 조선인 빨찌산 특립연합부대’는 케르비에서 떠나 밀림을 뚫고 자유시까지 1200~1300㎞의 무서운 험로를 돌파해야 하였다. 이 험준한...2025-10-29 21:17
독립군 중대가 타이가 숲으로 탈영했다케르비(현재 러시아 폴리나 오시펜코)는 타이가 침엽수림 깊숙이 위치한 큰 마을이었다. 북위 52도에 있는 추운 곳이었다. 일찍이 금광이 발견돼 사람이 몰려들었다. 암군강 수로를 이용할 수 있으므로 교통은 나쁘지 않았다. 암군강은 아무르강 하류 좌안으로 합하는 지류다. ...2025-09-27 19:35
1920년 불타오른 항구 뒤에 세워진 ‘완충국’ 극동공화국강과 바다의 얼음이 풀리면 일본군이 몰려올 터였다. 러시아 도시 니콜라옙스크를 장악한 적위군 2천~3천 명으로는 맞서기 어려운 대부대일 것이다. 방어진지 구축이나 정면 승부 따위의 작전 계획은 무모한 짓이었다. 비상한 대책이 필요했다. 아무르강 하구는 북위 52도에 위...2025-09-14 09:05
한인 무장부대, 해방전투와 독립운동 그 사이육군 수비대장 이시카와(石川正雅) 소좌는 니콜라옙스크 관내 일본군과 정부기관의 수뇌부를 소집했다.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해군 무선전신대 병력을 이끄는, 또 한 사람의 이시카와(石川光儀) 소좌, 해군 미야케(三宅駸五) 소좌, 니콜라옙스크 주재 부영사 이시다(石田虎松)가...2025-08-13 14:20
참혹했던 ‘니항 사건’, 한인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까닭은니콜라옙스크는 아무르강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다. 제정 러시아의 극동 진출 기지로서 처음 건설됐다. 이 도시의 명칭은 당시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러시아 남부 볼가 강변에 있는 같은 이름의 도시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라는 기다란 ...2025-07-24 16:13
모스크바에서 ‘한국 대표’ 자임하다 외려 발목 잡힌 김규식국제공산당(이하 국제당) 간부회 한국위원회가 결정서를 채택했다. 1922년 4월22일이었다. 국제당 최상급 기구에서 이뤄진 결정이므로 사회주의자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구속력이 있었다. ‘4월 결정서’라고 약칭하는 이 문서는 6개항으로 이뤄졌다. 그중에서 제2항이 주...2025-07-02 10:28
그 혁명가는 왜 일제의 밀정이 되었나일본 경찰의 눈으로 보면, 조기승(趙紀勝)은 위험한 자였다.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품고 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지한 노동자’들을 선동해 노동운동을 벌일 우려가 있는 자였다. 그는 일상적으로 감시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었다. 1925년 ...2025-06-04 15:20
청년회는 왜 노동공제회를 습격했을까1926년 1월11일 밤이었다. 한겨울이지만 매섭게 춥지는 않았다. 이날 최저기온은 영하 6도였다.1광주시 외곽에 위치한 서광산정 33번지, 광주청년회 임시 사무소에서 10여 명의 청년이 둘러서서 한 사람을 힐난하고 있었다.곤경에 처한 이는 서른여섯 살 설병호였다. 시...2025-05-15 11:00
동지들에게 ‘배신자’ 소리 들은 독립운동가의 본심 남만춘(南萬春·32)의 이름이 조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아마 ‘개벽’ 잡지 제62호(1925년 8월)일 것이다. 거기에는 ‘러시아 거주 김생’이라는 익명의 필자가 쓴 ‘러시아인의 신임이 깊은 충직한 남만춘 동무’라는 글이 실려 있다. 특별 기획이었...2025-04-24 11:12
비극으로 막 내린 젊은 지식인의 혁명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양명(梁明)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1930년 중반, 국외 근거지에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국제당 동방비서부의 지휘를 직접 받지 않는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종파’로 간주되...2025-04-02 16:58
젊은 지식인, 사회주의 운동선을 통합하다양명(梁明)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처음 가담한 것은 중국 베이징 유학 시절이었다.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24년 말, 기관지 ‘혁명’을 발간하는 사회주의 단체 결성에 참가했다. 이 단체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창일당’(創一黨)이라는 기...2025-03-13 0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