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옥편’, 대둔산 유격대를 이끌다빨치산 연구를 처음 개척한 김남식은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의 존재에 주목했다. 6·25 전쟁 당시 충남의 유격대는 바로 그의 지휘 아래 조직됐다고 한다. 김남식의 기록을 살펴보자. 1950년 9월 하순, 인민군 후퇴기가 되자 “충남의 여러 도당위원회, 도인민위원회 및 ...2024-10-12 22:00
함경도 ‘아바이’가 경상도로 간 이유는?대성골은 지리산의 한 골짜기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 자리잡은 커다란 계곡이다. 지리산 주능선의 세석평전에서 골짜기 아래편 쌍계사 입구까지 거리만 16㎞가 넘는다. 빗점골 방향 능선과 삼신봉 능선, 두 병풍 사이에 있는 넓은 계곡 속에 작은 능선들이 부챗살처...2024-09-21 20:13
혁명에 눈뜬 기관차 수리공, 지리산에 잠들다남경우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6·25전쟁 때 노동당 경남도당 위원장이라는 요직에 재임한 사람인데도 그랬다. 동지들도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적었다. 전쟁 시기에 경남 빨치산에 참가했던 김교영(1927~2021)은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본명이 아닐 것이라고 보았다. “‘...2024-09-01 15:28
일제가 사찰하던 독립운동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지다체포된 지 근 2년 만이었다. 조리환(曺利煥·30)은 서대문형무소 옥문을 나섰다. 1927년 10월15일 오후 5시였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것이었다. 질병으로 인한 보증 석방제도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조선총독부 판사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사안이었다. 대...2024-08-11 11:39
‘열혈 청년’ 이성태는 왜 동지들을 고발했나도대체 김춘성(金春成)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국제공산당과 소련 정부 기관에 고발한 행위 말이다. 그는 모스크바 조선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김단야를 음해하는 고발장을 썼다. 1937년 9월28일자였다.무서운 시절이었다. 스탈린 집권...2024-07-20 23:41
비운의 기록, ‘조선공산당 선언’은 누가 썼을까한국 독립운동의 이념을 대표하는 문헌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3·1운동을 상징하는 민족대표의 ‘기미독립선언서’를 거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내용을 기억하는 국민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인도주의에 입각...2024-06-30 14:49
“나의 사망신고는 광복 뒤에 하라”김명식이 마지막 숨을 거둔 때는 1943년 5월14일이었다. 태평양전쟁 와중이었다. 일본의 국운이 크게 떨치는 듯이 보이던 시기다. 1년 반 전에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 일본은 개전 초기에 기염을 토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석권했고, 오...2024-06-08 21:02
‘현모양처’ 거부해 퇴학당하다 6 년은 조원숙 ( 趙元淑 ) 이 스무 살 되는 해였다 . 1906 년에 태어났으므로 조선식 세는 나이로 치면 스물한 살이었다 . 오늘날 학령으로 환산하면 대학교 2 학년의 나이다 . 당시 풍속으론 결혼 적령기에 해당했다 . 그때 사람들은 여성의 혼기가 17...2024-05-04 21:20
독립운동가, 고분고분 자백 작전으로 일제 경찰을 속여넘기다1930년 1월29일, 수요일 새벽이었다. 영하 4.3도의 추위를 뚫고 경기도 경찰부 예하 형사대가 동대문경찰서 관할구역에 소재하는 살림집 10곳을 일제히 덮쳤다.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이 전 조선으로 옮겨붙은 때였다.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광주에서 두 차...2024-04-13 17:48
일제에 50억원 받은 대문장가의 사회장은 왜 역풍 맞았을까3·1운동이 일어난 지 3년째 되던 1922년이었다. 해가 바뀌고 한 달 남짓 지났다. 2월5일치 지상에 주목할 만한 광고가 실렸다. 4면 아랫부분에 2단에 걸쳐 넓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같은 페이지에 대문짝처럼 실린 상업광고, 대력환(大力丸)이라는 강장제를 선전...2024-03-23 20:43
일본 경찰 피하려고…특수 잉크 쓴 편지에 숨겨둔 메시지는오래된 편지 한 장에 눈길이 간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손편지다. 끝이 뭉툭한 붓으로 반듯하게 또박또박 쓴 글씨가 알아보기 쉽고, 행간이 넓어서 시원한 느낌을 준다. 가로로 긴 종이에 세로로 내려썼다. 1929년 7월2일에 쓴 편지이니, 근 100년이 다 된 셈이다....2024-03-02 16:16
무키우스 기억한 로마인, 송학선을 잊은 한국로마의 젊은 귀족 가이우스 무키우스는 상황이 너무나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로마가 적대국 에트루리아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니. 그들은 과거의 전쟁에서 로마인이 자주 패배시켰던 자들이 아닌가.포르세나 왕이 이끄는 에트루리아 군대는 로마 성벽 포위 작전을 오래 계속했다....2024-02-10 12:00
조선에 왔다 경고받고 사과하고 떠난 일본인 사회주의자, 왜? 일본인 사회주의자 다카쓰 마사미치(高津正道·32)가 조선을 방문했다. 1925년 4월15일이었다. 그날 저녁 7시에 열차 편으로 경성역에 도착했다.그는 초창기 일본공산당의 손꼽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 재학 중 사회운동단체 효민회 조직...2024-01-13 21:49
일본이 맹렬히 잡고자 한 김단야, 상하이로 어떻게 탈출했나“나(단야)는… 29일에 남조선 출장을 떠나 김천에 내렸다가, 30일 오전에 김천서 사변의 급전(急電)을 받고 곧 몸을 피하여, 2일간 산촌에 잠복하였다.”1김단야는 1925년 11월 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이 터졌을 때,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2023-12-23 21:14
‘6·10만세’ 학생이 했다? 일제의 취조 편의주의 결과6·10만세운동이 벌어지고 한 달 남짓 지난, 1926년 7월16일이었다. 조선에서는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검거의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었다. 6월6일 최초의 대검거에 뒤이어, 6월10일 시위운동 가담자 검거, 6월21일 공산당 혐의자 검거가 꼬리를 물었다. 7...2023-12-03 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