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일이 1910~1911년 재학했던 함흥농업학교 건물. 임경석 제공
전인학(全仁學)이 태어난 것은 1893년이었다. 뒷날 전일(全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백탑리 출신이었다. 해안에서 멀지 않고, 길주와 성진 등 도회지가 가까운 농촌지대였다. 전일은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고, 신식 교육도 접했다. “그곳에 설립된 농림학교”를 다녔다.1
여기서 말하는 농림학교란 함흥농업학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실업학교령’(1909년 4월)에 의거해 1910년 초에 설립된 농업학교는 전국에 네 군데 있었다. 대구, 전주, 평양, 함흥이다. 당시 함흥농업학교는 2년제였으며,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에게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2
전일은 함흥농업학교 개교 후 첫 입학생 50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입학하던 해 8월에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전일은 큰 충격을 받았다. 농업학교 공부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듬해 전일은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로 망명했다. 독립운동에 가담할 뜻을 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 사관 교육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농업학교와 농업기술… 비슷했던 출발점
한정인(韓正仁)의 출신지는 함경남도였다. 도내 어느 군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출생 시기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일과 동년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3살 정도 적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한정인은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3년 뒤인 1913년 11월 조선총독부 함경남도 농업조수로 취직했다. 농업조수란 지방비와 은사금(한국병합축하금)으로 고용하는 11개 종류의 도청 하급 실무직원 가운데 하나였다. 그 직무는 종묘장 등 농업시설 관리, 농축산업 개량 업무, 각 농가의 부업 장려 등이었다.3
그것에 선임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다. 체격검사, 필기시험,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중 가장 큰 변별력을 갖는 것은 필기시험이었다. 일본어 공문서를 해석하고, 초급 수학과 주산 능력이 있어야 하며, 일본어로 작문하되, 알아보기 쉽게 해서와 행서체로 습자하는 능력을 갖춰야 했다. 한정인은 거뜬하게 그 난관을 뛰어넘었다.
농업조수가 된 지 2년 뒤에 한정인은 진로를 변경했다. 1915년 8월, 총독부 간수교습생으로 직을 옮겼다. 간수교습생이란 신규 채용한 간수에게 부여하는 3개월간의 교습 과정에 재학 중인 자를 가리킨다. 왜 옮겼을까? 임시직인 농업조수보다는 정규직인 총독부 간수 자리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수감자들에게 행사하는 간수의 강한 권력을 선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망명객 전일은 재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를 기반으로 항일운동의 활로를 모색했다. 먼저 북간도 소영자에 설립된 광성학교에 입학했다. 북간도 교육계 최상의 학교라는 일컬음을 받는 곳이었다.4
사범학교였지만 실상은 독립군 군사학교를 겸했다. 학생 150명이 총을 메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1~1914년에는 교사로서 조선인 초등학교에 부임하는 한편, 조선인 사회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청년친목회, 대동협신회, 동제회, 교육연구회 등 단체에서 총무직을 기꺼이 맡았다. 하지만 일본의 간섭이 심해 오래 계속하기 어려웠다. 1914~1915년에는 일본의 21개조 요구 탓에 중-일전쟁 발발 가능성이 고조됐다. 그 기운을 활용해 왕청현 깊은 산중에 위치한 나자구에 조선인 사관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뜨거웠고, 전일도 그에 참여했다. 하지만 21개조를 둘러싼 갈등이 중국 위안스카이 정권의 양보로 해결됐고, 나자구 사관학교에 대한 중국 지방정부의 탄압이 강화돼, 무장투쟁 준비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군 상대로 사회주의 선전한 전일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이후, 전일은 연해주로 옮겨갔다.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 설립에 참여하고, 1918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 결성에 가담했다.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김립, 박애 등 이름 있는 선배 투사들과 나란히 사회주의운동을 개척해나갔다. 그 와중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0년 3월 시베리아에 파견된 일본군을 상대로 사회주의 선전을 했다는 이유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군 헌병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한정인은 간수 교습 기간에 12개 과목을 이수했다. 감옥학, 조선감옥령, 조선형사령, 개인식별법, 무술, 총기사용법, 비상사태 대처요령 등이었다. 과목마다 이론과 실습을 배웠고, 통과 여부를 가르는 시험을 보았다. 그의 시험 성적은 양호했던 것 같다. 예정된 3개월 뒤 간수교습 과정을 무사히 졸업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1915년 10월30일부로 교습생이란 꼬리표를 떼고 조선총독부 간수로 발령받았다.
한정인의 직장 내 출세는 순조로왔다. 그는 상급직인 ‘간수장’ 임용에 도전했다. 간수장은 현직 간수 가운데에서 선발하는 간부직이었다. 간수장이 되려면 학술시험과 실무고사를 통과해야 했다. 학술시험 과목은 간수교습생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여러 감옥 법령을 익히고 일본어 능력을 높이면 통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실무고사였다. 이 고사는 매우 주관적인 평가 방법을 거쳤다. 직장 상사인 전옥(형무소장)의 개인적 판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조선총독부 간수장 임용 규정에 따르면, 전옥은 현직 간수들의 근무 성적표를 매일 기재하게 돼 있었다. 품성, 건강, 규율, 근무 태도, 서류 작성, 일본어 능력, 무술 실력 등 10개 항목에 걸쳐 낱낱이 적어넣었다. 이 근무 성적표에 기재된 점수가 곧 실무고사의 당락을 좌우하는 지표가 됐다. 한정인은 모든 항목에 걸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간수로 근무한 지 5년 만인 1920년 8월 간수장 임용시험에 합격했다.5
나이 30살 미만에 조선총독부의 간수장 대열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일본인 지배층이 조선인 하급 관료에게 요구하는 자질과 능력을 얼마나 잘 갖췄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한정인은 ‘간수장 겸 통역생’ 자격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21년 이후 청진형무소, 공주형무소, 함흥형무소, 원산형무소, 대전형무소, 경성형무소에서 근무했다.
국외로 떠난 지 11년 만에 고국으로 압송된 전일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서대문감옥, 함흥감옥, 청진감옥 등지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전일은 대담한 사람이었다. 옥중에서도 순순히 징역살이를 하는 법이 없었다. 서대문감옥에 있으면서 대규모 탈옥을 계획했으나, 동조하는 죄수가 적어서 그만뒀다. 함흥감옥에서는 수감자 속에서 사상적 동조자를 획득할 목적으로 노랫말을 지어서 유포했다. 청진감옥에서는 죄수 속에서 비밀결사 14명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적유단이라는 이름의 은밀한 조직이었다. 그 구성원은 북간도에서 반일 독립군 활동을 하던 정치범들이었다.
탈옥수들에게 칼 빼앗긴 한정인

1921년 7월25일 경성복심법원 법정에 선 전일. 동아일보 1921년 7월26일. 임경석 제공
1923년 7월8일, 전일은 청진감옥에서 탈옥을 이끌었다. 그는 탈옥 사건의 지도자였다. 탈옥 동지들을 사전에 은밀히 규합했고, 대낮 폭동 형태의 대규모 탈옥 방법을 결정했다. 당일에는 출입구를 지키는 조선인 간수를 설득해 문을 열게 했고, 동료 탈옥수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가장 나중까지 출입구를 지켰다.
그날 청진감옥의 한정인 간수장은 전혀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았다. 탈옥수들은 “숙직으로 있는 한 간수장 이하 몇 명과 맹렬한 격투를 행하여, 필경은 간수의 패검 세 개를 빼앗아 가지고” 도주했다.6
탈옥을 결행한 시간이 오후 2시께였음에 주목하자. 숙직으로 있었다 함은 세 방향의 옥사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판옵티콘 구조의 중앙간수소에서 근무 중이었음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근무하던 한정인을 포함한 3명의 간수가 피습을 당했다. ‘맹렬한 격투’가 있었다. 한정인은 근무 중 허리에 차도록 규정된 패검을 빼앗겼다. 대일본 제국의 간수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한정인 간수장은 예하 간수들을 이끌고 탈옥수들을 뒤쫓았다. 완전무장을 갖췄다. 총도 들고, 칼도 찼다. 사방으로 뛰어 달아나는 탈옥수들 가운데 가장 뒤처진 자를 추격했다. 탈옥을 주도한 죄수, 전일이었다. 산을 오르며 도주하던 전일은 불운하게도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칼을 버리고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치받치는 분노에 휩싸인 한정인 간수장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을 좌우로 휘둘렀다. 무저항 태도를 취하던 전일은 얼굴을 비롯해 온몸에 중상을 입었다. 땅에 쓰러졌다. 온몸이 피로 뒤덮였다. 뒤따르던 다른 간수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전일의 몸뚱이에 발길질하고 매질을 가했다. 죽어도 좋다는 태도였다.
탈옥 사건이 일어나고 2개월 뒤에 재판이 열렸다.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였다. 청진 탈옥 사건의 공범 9명이 법정에 섰다. 전일의 얼굴엔 한정인 간수장의 칼에 맞아서 생긴 짙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전일은 거리낌없이 탈옥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어느 민족을 물론하고 자기 나라의 자유를 위하여 피를 뿌리고 생명을 바침은 국민된 본의”라고 역설했다.7
한 사람은 4년형, 한 사람은 일왕 훈장

한정인 간수장이 일본에 바친 충성의 대가로 수여받은 1928년도 대례기념장 메달. 임경석 제공
따라서 조선 민족이 독립을 위해 운동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며, 우리 운동을 범죄시하는 일본 법률에는 순응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천명했다. 호쾌한 법정 발언이었다. 탈옥 주범으로 간주된 전일에게는 4년형이 부가됐다. 기왕 복역 중이던 5년형에 더해 모두 9년 동안의 징역을 살아야 했다.
한정인 간수장은 1928년 ‘대례기념장’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일본 쇼와(昭和) 천황 즉위를 기념해 만든 표창 증서와 메달이었다. 그해 11월에 거행된 즉위식과 관련해 일련의 중요 임무에 참여한 것을 표창하는 훈장이었다. 메달은 은으로 만들었고 겉에는 옥좌가 부조돼 있었다. 국화 문장과 ‘만세’라는 문자가 기입돼 있었다.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뒷면에는 ‘대례기념장 소화 3년 11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조선총독부에 봉직하는 조선인 관료로서 일본에 대한 강력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징표였다.
함경도 태생의 동년배 두 남성의 삶이 대비된다. 두 사람은 농업학교·농업기술이라는 공통점에서 인생을 시작했으나,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두 이질적인 삶이 뜻밖에도 1923년 7월8일 정면으로 충돌했다. 악연이었다. 항일 혁명의 길과 친일 관료의 길로 나뉜 두 사람이 그 뒤 다시 상봉했는지는 아직껏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 문헌
1. ‘광막한 西伯利亞 벌판과 철창에 늙은 半生血淚史(1)’, 조선일보 1927년 9월21일치 석간 5면.
2. 박지원, ‘일제강점초 농업학교의 설립·운영과 졸업생의 취업실태’, 서울대 교육학석사논문, 10쪽, 2012년 8월.
3. ‘조선총독부함경남도훈령 제11호’, 1916년 6월28일. ‘조선총독부관보’ 1181호, 1916년 7월11일.
4. 윤상원, ‘일제강점기 전일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9, 2017년 113쪽, 2017년.
5. 韓正仁,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기념 표창자 명감’, 561쪽, 1935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6. ‘비 퍼붓는 8일에 청진 파옥 소동’, 동아일보 1923년 7월12일치 3면.
7. ‘옥중단체 赤油義勇團, 청진 파옥사건의 공판 개정’, 조선일보 1923년 9월10일치 3면.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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