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진형무소 탈옥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 조선일보 1923년 7월17일치 3면. 임경석 제공
탈옥은 뜻밖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캄캄한 밤중에 소수가 은밀하게 잠행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간수들 몰래 땅굴을 파거나 문짝을 뜯거나 담장을 넘는 등의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와는 정반대였다. 밝은 대낮에 다수가 폭동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1923년 7월8일 여름날이었다. 종일 흐리고 소나기가 내리는 날씨였다.1 지바(千葉) 간수와 야나기하라(柳原) 사환 등 당번 간수들이 수감자 18명을 한 장소에 집결시켰다. 일요일인데도 노역을 시키기 위해 이례적으로 집합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간수들의 뼈아픈 실수였다. 오후 2시께였다. 아마 형무소 내 공장 건물이었을 것이다. 현장 근무 중이던 간수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간수들은 폭행당했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은 물론이고 감방 열쇠 뭉치도 빼앗겼다.
탈옥수들은 일시적이나마 ‘중앙간수소’를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방사선처럼 배치된 세 동의 감방 건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판옵티콘 구조의 건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형무소 사무 공간인 청사 건물과도 연결된 핵심 공간이었다. 탈옥수들은 숙직 중이던 조선인 한정인(韓正仁) 간수장과 몇 명의 간수를 맹렬한 격투 끝에 제압했다. 간수들이 차고 있던 패검도 세 자루나 빼앗았다. 이곳 출입문을 봉쇄하는 시간이 길수록 탈옥의 성공 가능성은 커질 터였다. 그동안 다른 탈옥수들은 감방 문을 열어젖혔다. 형무소 내에는 23개 잡거방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전에 탈출을 모의한 비밀결사 구성원 외에 일반 죄수들도 풀려났다.

청진형무소 배치도. 국가기록원. 임경석 제공(*배치도의 빨간 글자는 필자가 표시한 것임. 좀더 예쁘게 고쳐주시면 좋겠습니다. 수정 이전의 원본도 첨부합니다.)
형무소 출입문은 셋이었다. 그중 둘은 청사 정면(북쪽)과 측면(서쪽)에 있었다. 청사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이용할 수 없었다. 탈옥수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감방 사동과 공장, 창고, 취사장 건물이 밀집한 동쪽 출입구뿐이었다.
탈옥수들을 현장에서 지휘한 이는 전일이었다. 전일은 동쪽 출입구를 지키는 간수를 위협해, 그가 근무지를 이탈·피신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간수는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전일은 동료들을 차례로 출입구 밖으로 내보냈다. 여러 사람에게 빨리 뛰어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뒤를 살폈다. 그는 더 이상 뛰어오는 탈옥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탈출구를 지켰고, 맨 마지막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집단 탈출에 가담한 사람은 몇이나 됐을까? 탈옥자 수는 정보 출처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14명설, 18명설 등이 있다. 전일이 뒷날 남긴 진술에 따르면, 도합 20명 남짓 되었다. 사전에 탈옥 계획에 찬동한 사람이 14명이었고, 당일 가담한 사람이 6~7명이었다고 한다.2
궂은 날씨였다. 사방에 안개가 짙게 깔리고, 소나기가 맹렬하게 쉬지 않고 쏟아졌다. 출입구를 나선 탈옥수들은 각자 판단으로 사방으로 흩어져서 죽을힘을 다해 도주했다. 그들은 두 대열로 나뉘었다. 남쪽 방향을 택한 이들은 고말산(193m) 기슭을 향해 뛰었고, 북쪽을 택한 이들은 시가지를 거쳐 쌍연산(196m) 방향으로 달렸다.
곧바로 추격이 시작됐다. 형무소장 무라카미 가메오(村上龜雄·53)는 근무 경력 31년차의 경험 많은 행형 관료였다. 12년 전 원산감옥에서 간수장으로 근무할 때는 탈옥수 한 명 때문에 견책 처분을 받은 경험마저 있었다.3 그는 탈옥 대책에 능했다. 휘하의 간수장 4명과 간수 20여 명에게 총칼로 무장한 채 즉각 추격하라고 지시했다. 또 청진경찰서와 함경북도경무부에 긴급연락을 했고, 일본인 소방대와 거류민회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형무소를 둘러싸고 겹겹이 비상선이 설치됐고 대대적인 수색이 이뤄졌다.
무장한 형무소 간수들이 추격의 일선에 나섰다. 경찰, 소방대, 일본인 거류민으로 이뤄진 추격대가 외곽을 에워쌌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여기저기서 생명을 던지고 싸우는 무서운 격투가 벌어졌다. 시가지에는 놀란 주민들이 길거리로 몰려나왔다. 퍼붓는 빗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간수들은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천한 죄수들 주제에 탈옥을 감행함으로써 제국의 위신을 추락시켰고, 격투 중에 동료 간수들을 부상시켰으며, 심지어는 위엄의 상징인 패검까지 탈취하지 않았는가. 죄수들 위에 군림해오던 그들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뿐인가. 이처럼 대규모 탈옥은 자신들의 근무 평점을 나쁘게 할 게 틀림없었다. 간수들은 서슴지 않고 총기를 사용했다.
북간도 의민단 군자금모집과장 신대용(40)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탈옥을 최초로 기획했다고 지목받은 사람이었다. 또 함북 길주군 출신으로서 조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징역 8년을 받고 복역 중이던 신예균(申禮均·30)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북간도국민회 회원 최익룡(27)도 총알에 맞았다. 그는 일본 영사관의 밀정 노릇을 하던 조선인 박성겸을 사살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이었다.
최익룡의 동료로서 밀정 처단을 함께 했던 북간도국민회 이정국(37)도 비운을 겪었다. 그는 히라노(平野)와 스에히로(末廣) 두 간수에게 발각됐다.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쫓기던 이정국은 불행히도 바닷가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갈 곳이 없었다. 이정국은 2대1의 불리한 조건에서 격투에 나섰다. 떠들썩한 싸움 현장으로 어촌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정국은 히라노 간수를 때려눕히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간수가 위태롭게 됐을 때, 둘레에 섰던 일본인 어부들이 개입했다. 기운이 다한 이정국은 항거하지 못하고 붙잡혔다. 겨우 목숨을 구한 히라노 간수는 보복에 나섰다. 칼을 빼어든 간수가 휘두른 칼날에 의해 이정국은 목에 치명상을 입었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이정국은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조선인 아이들에게 최후의 말을 남겼다. 이런 취지였다고 한다. “어린 벗들아. 2세 국민인 너희들에게 이런 겁나는 광경을 보여주어 미안하다. 나는 너희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피를 끓여왔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생명이 다하게 되니 유감이다. 어린 벗 여러분은 꽃 피고 새 우는 이상적 낙원에서 생활하기를 바란다.”4
독립운동에 가담한 목적은 어린 벗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인데, 나는 비록 실패했지만 여러분은 해방된 조국에서 생활하기 바란다는 말이었다. 결국 탈옥수 4명이 목숨을 잃었다. 3명의 사인은 총상이었고, 1명은 자상이었다. 탈옥수 살해는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죄수들이 탈옥을 시도한 사실도 놀랍지만, 탈옥수들을 살해한 간수들의 행위도 용납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탈옥수를 살해하는 것은 불법이자 직권남용이며, 윤리적으로도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어 일간 신문의 사설은 죄수 살해에 책임 있는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5

탈옥 5개월 만에 황용운과 전상봉이 적기단의 일원으로서 국경지대 군자금 모금 활동을 재개했음을 보여주는 간도 총영사관의 첩보 보고서. 두 사람의 이름 아래 “1923년 청진형무소에서 탈옥 도주한 자”라고 뚜렷이 기재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임경석 제공
탈옥수 다수가 추격대에 붙잡혔다. 산속에 숨어들었다가 좁혀드는 포위망에 발각돼 붙잡힌 사람도 있었고, 추격대를 피해 바닷물에 뛰어들었으나 힘이 다해 체포된 사람도 있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때 7명이 붙잡혔다거나, 혹은 8명이 체포됐다고 한다. 재판 기록에는 체포된 탈옥수가 9명이었다고 적혀 있다.6
체포된 사람 가운데 최시홍(崔時弘·46)이 있었다. 그는 함북 명천 출신으로 일찍이 의병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3·1운동 이후에는 북간도 두도구 일대에서 독립군 조직에 나선 역전의 투사였다.7 그는 제령 위반죄로 12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강인하고 기민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형무소 주위를 겹겹이 둘러싼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청진을 벗어나 멀리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서수라까지 도주했다. 청진형무소에서 거의 100㎞나 떨어진 곳이었다. 이제 두만강만 건너면 일본인들의 추적을 벗어날 수 있었다.
서수라는 명태·대구 어장으로 유명한 어촌이었다. 최시홍은 한 조선인 가옥으로 잠입했다. 후원을 받을 목적이었다. 밥을 좀 달라고 청했다. 가능하다면 잠도 자고, 옷도 얻어 입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배반당했다. 집주인은 서수라청년회원이었는데, 이 단체는 일본·조선의 융화를 촉진하는 함북의 ‘모범청년회’였다. 최시홍은 청년회원들에게 붙잡혀 경찰 파출소로 인계됐다. 탈옥수는 호소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12년의 선고를 받고, 감옥 생활을 하던 사람이오. 당신들도 조선 사람이 아니오. 아무런 책임도 없는 터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나를 잡아가오?”
탈옥 모의를 지휘한 전일도 결국 붙잡혔다. 가장 늦게 현장을 떠났던 그는 끝내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뒤를 조선인 간수장 한정인과 몇몇 간수가 쫓아왔다.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전일은 각오했다. 손에 든 칼을 버리고 손을 들어서 항복하는 태도를 표시했다. 그러나 맹렬하게 쫓아오던 간수장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비무장 무저항 상태에 놓인 탈옥수에게 칼을 들어 두어 번 머리를 쳤다. 간수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전일을 가만두지 않았다. 발길질과 매질을 거듭했다. 이 현장에도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나무에 묶인 채 고통을 이기지 못한 탈옥수의 신음 소리에 진저리를 쳤다. 전일은 주위 동포들을 돌아보며 간신히 말했다. “나 전일이는 조선 2천만 민족을 위하여 여기서 죽습니다. 이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한때 전일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되는 한글 신문 ‘선봉’에는 전일이 간수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8 32년 일생 내내 항일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헌신한 그의 약력과 함께였다.

포위망을 뚫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탈옥수들이 있었다. 세 사람이었다. 그중 하나는 절도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중국인 유운경(27)이었다. 단기 징역형에 처했던 이른바 ‘잡범’으로서 정치범들이 주도한 탈옥에 가담한 점도 이채롭지만, 삼엄한 비상선을 뚫고 끝내 탈출에 성공한 그의 행운도 이채롭다 하겠다.
다른 두 사람은 독립군 출신이었다. 황용운(黃龍雲·34)과 전상봉(全相鳳·37)이 그들이다. 종적을 감춘 두 사람의 그 뒤 행방은 어떠했는가? 과연 탈출에 성공한 것인가? 간도총영사관의 첩보 보고서가 우리의 의문을 해소해준다. 탈옥 뒤 5개월이 지난 1924년 1월 초에 사회주의 단체 적기단 10명이 두만강을 넘어와 회령군 산악지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인 사실이 있다. 그 행동을 이끈 리더 5명 중에 황용운과 전상봉 두 사람이 포함됐다고 첩보 보고서는 전했다.9 두 사람은 탈옥 동지들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 죽거나 다시 붙잡힌 동지들의 몫까지 더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 문헌
1. ‘天氣豫報’, 동아일보 1923년 7월8일치 3면.
2. ‘광막한 西伯利亞 벌판과 철창에 늙은 半生血淚史(5)’, 조선일보 1927년 9월28치 석간 5면.
3. 조선총독부간수장 村上龜雄, ‘初叙履歷書’, 1914년 6월30일. 내각총리대신 백작 大隈重信, ‘조선총독부遞信書記 播美咲 外14名敍位ノ件’, 大正3年 7月23日 所收. 아시아역사자료센터 https://www.jacar.archives.go.jp
4. ‘청진형무소 破獄 詳報’, 조선일보 1923년 7월17일치 3면.
5. ‘청진형무소의 囚人총살사건-慘無人理한 獄吏의 失態’, 조선일보 1923년 7월14일치 1면.
6. ‘청진 파옥 사건에 탈출한 황용운’, 동아일보 1923년 11월24일치 3면. ‘淸津 파옥 사건의 續聞’, 조선일보 1923년 7월14일치 3면. ‘청진 파옥 사건 控訴 取下’, 조선일보 1923년 10월10일치 3면.
7. 在頭道溝分館主任 諏訪光瓊, ‘機密公信7號, 朝鮮獨立運動情報送付ノ件’, 1919년 4월4일, 23쪽.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8. ‘청진감옥을 깨친 13명 용사’, ‘선봉’ 17호, 1923년 8월11일 1면.
9. 在間島總領事 鈴木要太郞, ‘機密第17號,鮮地侵入不逞鮮人ノ行動ニ關スル件’, 1924년 1월17일, 3쪽,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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