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4년 당시 청진형무소 전경. 조선형무소사진첩. 임경석 제공

1924년 청진형무소 내부 모습. 조선형무소사진첩. 임경석 제공
청진형무소는 함경북도 항구도시 청진에 위치한 일본의 형벌 집행기관이었다. 징역형·금고형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자와 아직 재판 중인 미결수를 수용해 통제·감시하는 시설이었다. 1909년에 설립됐다. 처음엔 함흥감옥에 배속된 ‘분감’ 지위였는데, 1922년 독립적인 청진감옥으로 승격됐다. 이듬해에는 명칭이 ‘감옥’에서 ‘형무소’로 바뀌었다.
수감자 수는 1923년엔 307명이었다. 이 중에는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있었지만, 압도적 다수는 조선인이었다. 1930년 당시 청진형무소 수감자 가운데 93%가 조선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1 1923년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1920년에는 청진형무소 수감자가 174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3년 남짓한 기간에 무려 76%나 늘어났음을 본다. 이렇게 수감자가 급증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독립을 꾀하는 ‘불령선인’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진형무소에 정치범·사상범은 몇이나 수용됐을까? 1923년의 실정을 보여주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추론할 수는 있다. 1931년 당시 청진형무소 수감자 가운데 사상사건 관련자가 9~10%에 달했다는 정보가 있다. 이를 1923년에 대입해보면 30명 전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청진형무소의 ‘불령선인’들은 현지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국경 너머 무장투쟁 참가자가 많았다. 함경북도는 조선의 최북단 국경선에 잇닿은 변경이었다. 조선 다른 지역과의 교통이 불편했다. 남쪽의 원산, 서울 등지와 이어주는 함경선 철도가 개통된 때는 1928년이었다. 그에 비해 도내 교통은 편리했다. 해안 지역과 두만강 연안 내륙 지역을 이어주는 청진~회령 철도가 1917년에 이미 부설됐고, 도내 각 고을 사이에는 자동차 도로가 놓여 있었다. 그뿐인가. 두만강 물줄기만 넘으면 중국령이고 러시아령이었다. 함경북도에서 국경을 넘어 북간도와 연해주로 오가는 것은 조선 다른 지역으로 왕래하는 것보다 더 용이했다. 취재기자의 표현을 보자. 청진형무소에 갇힌 죄수 중에는 “여러 해 동안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 표류하며 조선독립의 활동을 하다가 부자유의 철창생활을 하는 제령 위반범”이 많았다.2 제령이란 독립운동 참가자를 탄압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다이쇼(大正·대정) 8년(1919년) 제령 제7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형무소 내 조선인 수감자 중에는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1923년 당시 함경북도 청년층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 한 잡지 기자는 “이곳의 사상 경향은 현저하게도 사회주의의 편으로 기울어졌다. 청년들의 사상은 거의 극단으로 기울어지는 듯싶다”고 술회했다. 사람의 사상 전환이란 참으로 신속한 것이라면서, 그 기세가 폭풍이 불고 벼락이 치는 듯했다고 한다.3 청진형무소에도 그런 사상 추세가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들어 죄수 가운데 탈옥을 모의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불령선인’ 수감자들 속에서 그랬다. 최초의 이니셔티브(제안)를 낸 사람은 누굴까.
여러 기록에서 신대용(申大勇·40)의 이름이 공통으로 거론된다. 그는 탈옥을 처음 주창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신대용은 원래 함경남도 안변군 출신으로, 북간도 연길현 용정촌 일대에서 거주하는 이주민이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반일 무장투쟁에 가담했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도를 중심으로 설립된 의민단에 가맹해 군자금 모금과 무장부대 편성에 노력했다. 그는 의민단의 간부였다. 군자금모집과의 과장으로 일했다. 부하 3~6명을 이끌었고, 권총을 휴대했다.
신대용의 활동에서 유명한 것은 친일단체 조선인거류민회 이사인 안석철과 임정순 두 사람을 위협한 사건이었다. 두 부유한 조선인은 1920년 9월20일 신대용 일행에게 납치됐고, 하루 반 동안 산길을 걸어서 도착한 산림 속 군영에서 취조를 받았다. 닷새의 피랍 기간에 학대와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일본영사관의 밀정 노릇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앞으로는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서약했다. 군자금 제공도 약속했다. 안석철은 1만원, 임정순은 1천원을 4개월 안에 제공하겠다고 약속했고, 약정서까지 작성했다고 한다.4
신대용은 결국 붙잡혔다. 1921년 4월, 동료 6명과 함께 조선인 촌락에 체류하던 중 간도총영사관 경찰대 9명의 급습을 받았다. 중과부적인데다 무기 차이가 뚜렷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제령 위반죄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 한 사람 탈옥 주창자로 지목되는 이가 있었다. 이정국(李政國·37)이다. 한 잡지 기자는 이 사건을 가리켜 “이정국이 일을 꾸민 청진 파옥 사건”이라고 표현했다.5 이정국은 함경북도 성진군 출신으로서, 북간도 연길현으로 옮겨간 이주민이었다. 그는 기독교 교인이 다수를 점하던 북간도국민회 회원이었고, 1920년 초부터 무장부대 ‘대한국민군’을 편성하는 데 참여했다.
이정국은 1920년 6월 일본영사관의 밀정으로 지목된, 용정촌에 거주하는 박성겸을 총살한 혐의로 체포됐다. 북간도국민회에 소속한 다른 두 동료와 함께였다. 최익룡(崔翊龍·27)과 정세충(鄭世忠·33)이 그들이다. 세 사람은 1922년 10월28일 복심법원 재판에서 무기징역(최익룡)과 징역 15년형(이정국·정세충)을 선고받았다.
탈옥 사건의 주모자로 꼽히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전일(全一·31)이다. 그의 본명은 전인학(全仁學)이다. 일본인 야마자와 검사의 평가에 따르면, 전일은 “인격이라든지 그 학식이 특수한 인물”로서, 청진형무소에 수감된 죄수 가운데 “가장 거사를 꾸밀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6 전일이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근거 가운데 하나는, 형무소 내에서 은밀하게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적유단(赤油團)이라는 이름까지 있었다. 기록에 따라 적유의용단, 적유단붕우회 등으로도 불렸다. 형무소 내부이지 않은가.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받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비밀결사를 조직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전일이 모의에 가담했다는 것은 탈옥이 더 이상 한두 명 소수의 일이 아니라 다수의 죄수가 참가하는 대규모 거사가 됐음을 의미했다. 전일이 동료들을 설득할 때였다. 그는 투옥된 혁명가들이 감옥을 혁명의 책원지로 삼은 외국 혁명사를 논하면서, 파옥을 꾸며보자고 선동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잔여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죄수들까지 호응했다. 감옥에서 함께 고생하며 두터운 동료애가 자라났고, 그 까닭에 “형님이 그런 일을 한다는데, 나만 평안하자고 그대로 있을 수 없다”며 가세한 이가 6~7명이나 됐다.7
적유단이란 비밀결사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붉을 ‘적’(赤)자가 사회주의를 은유하는 말로 널리 쓰였음을 고려한다면, 이 결사의 소속원들이 지향하는 사상이 무엇인지를 짐작게 한다. 실제로 전일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18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였다. 이듬해에는 조선인 밀집 지구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여 사회주의 확산을 꾀했다.8

청진형무소는 함경북도 청진시 동쪽 고말반도 내부 고말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임경석 제공
어떻게 탈옥할 것인가. 다수의 수감자가 한꺼번에 탈옥할 방법이 있는가. 거사 일시는 언제로 잡아야 하는가. 탈옥한 뒤에는 어디로 피신할 것인가.
탈옥 거사를 성공시키려면 청진형무소의 구조와 입지를 잘 알아야 했다. 청진은 도시화 이전에는 자그마한 어촌이었다. 부령군 청하면에 속하는 100여 가구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러일전쟁 때였다. 당시 일본군의 물자 양륙지로 선정돼 항만시설이 부설되고, 이주해오는 자가 늘었다. 1908년에는 외국 통상이 가능한 개항장으로 지정됐고, 1910년에는 청진부가 설치됐다. 행정제도가 개편된 1914년 당시 청진부는 전국 12개 부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은 도시였다. 5500여 명이었다. 그 뒤 청진의 도시화는 꾸준히 계속됐다. 인구가 늘어나, 1923년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그중 조선인은 65%, 일본인은 30%를 점했다. 일본인 비중이 매우 높은 점이 눈에 띈다. 탈옥하기에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청진형무소의 위치는 청진부 동쪽 경계인 고말반도 내부였다. 반도 북쪽에 쌍연산(196m), 남쪽에 고말산(183m)이 자리 잡았고 그 가운데 평지에 시가지가 형성돼 있었다. 형무소는 고말산 기슭에 있었다. 요행히 형무소를 벗어나더라도 남쪽으로 도주 방향을 잡으면 곤란했다. 바다에 막혀 갈 곳 없이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북쪽으로 쌍연산을 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서쪽으로 시가지 방면을 따라 도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옷차림과 생김새가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민 가운데 일본인의 비중이 높았다.
마침내 디데이가 결정됐다. 1923년 7월8일, 일요일이었다. 무슨 일을 시키려는지 죄수 18명이 한 장소에 모이게 됐다. 그중에는 적유단원도 몇 사람 포함돼 있었다. 칼을 찬 간수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수가 적었다. 오후 2시, 마침내 거사가 실행에 옮겨졌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 문헌
1. ‘조선 각지의 감옥 대확장계획’, 동아일보 1920년 9월9일. ‘3백명 가운데 290명 감형’, 경성일보 1924년 1월29일.
2. ‘청진형무소 破獄 詳報’, 조선일보 1923년 7월17일, 3면.
3. 國境生, ‘北鮮來信’, 개벽 40, 100쪽, 1923년 10월.
4. 재간도총영사대리영사 堺與三吉, ‘機密第263號, 安錫喆及任正淳ノ不逞鮮人ニ拉去セラレシ件’, 1~3쪽, 1920년 10월4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2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5. 羅南 姜鶴秉, ‘前號의 ‘北鮮來信’을 보고–國境生에게 質正함’, 개벽 41, 102쪽, 1923년 11월.
6. ‘옥중단체 赤油義勇團, 청진 파옥 사건의 공판 개정’, 조선일보 1923년 9월10일, 3면.
7. ‘광막한 西伯利亞 벌판과 철창에 늙은 半生血淚史-18년 만에 귀향하는 全一씨 경력담 (5)’, 조선일보 1927년 9월28일, 석간 5면.
8. 윤상원, ‘일제강점기 전일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9, 115~121쪽, 2017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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