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탁은 왜 34년 만에야 6·10만세운동 비사를 털어놨나

체포된 뒤에 찍힌 이지탁의 식별 사진. 1928년 2월1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노인 이지탁(李智鐸)은 평생 마음속에 지녀왔던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나이 61살 되던 1960년, ‘조선일보’ 신문지상에 기고한 한 회고담에서였다. 1926년 발발한 6·10 만세운동에 관한 글이었다. 젊은 시절, 나이 27살에 겪은 일이었다. 그는 반일 시위운동을 주도한 팀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6월10일에 있을 인산(因山)을 이용하여 (…) 거족적인 운동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었던 것이 아니라 권오설, 박민영도 동감이었다. 개벽사에 있는 김경재군과도 의논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개벽사의 일뿐만 아니라 화요회며 4단체연합회 등 합법적인 사상단체에서 보는 일이 번창하므로, 우리 3인만이 매일같이 구수회의 끝에”1
이지탁은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 임금의 장례식 날에 거족적인 시위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7년 전 고종 임금의 장례식 날에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혁명운동이 폭발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래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지탁은 이 거족적인 시위운동을 세 사람이 계획했노라고 말했다. 이름도 밝혔다. 자기를 포함해서 권오설, 박민영 세 명이었다. 이들이 매일같이 구수회의를 했다고 주장했다. 놀랍고 이채로운 정보다. 놀라운 까닭은 전국적인 거대한 반일 시위운동을 단지 세 사람이 계획했다고 주장한 때문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채로운 까닭은 6·10 만세 주도 세력에 관한 기왕의 통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순수 민족적인 두 갈래 학생 그룹이 6·10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견해가 오랜 기간 정설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사직동계’와 ‘통동계’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두 학생 그룹의 구성원과 이지탁이 언급한 사람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에 비춰보면 이지탁의 회고담은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지탁의 회고담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그렇다. 그의 진술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했다. 그가 거론한 세 사람은 임의의 세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밀결사의 구성원이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순종 사망 일주일 뒤인 1926년 5월2일에 열린 회의에서, 순종 장례일에 전국적인 반일 시위운동을 결행하고 그 준비에 착수할 것을 결의했다.2 이어서 운동을 지휘하는 특별기구를 조직했으니 그것이 바로 ‘6·10 투쟁특별위원회’였다. 특별위원회 구성원은 세 명이었다. 권오설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지탁·박민영을 위원으로 선임했다. 지하운동의 조건에서 지도부는 소수로 이뤄져야 했다. 저 유명한 러시아 10월 혁명도 3인 지도위원회의 지휘 아래 진행됐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3인 지도부 구성은 기술적 원칙으로 정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3
전국적인 반일시위운동을 지휘하는 사령탑에 그들이 선임된 까닭이 있었다. 그들은 공산당의 간부이자 당원이었고, 더 나아가 공산청년회 7인 중앙위원회 멤버이기도 했다.4 공청이란 당의 형제단체로서 25살 이하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비밀결사였다. 당과 공청은 합법, 비합법 공간에 그물눈처럼 조밀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특히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 사이에는 비합법 비공개의 독서회가 “이루 매거할 수 없으리만치 많이” 조직돼 있었다. 6·10 투쟁 3인 특별위원회는 바로 이런 조직 네트워크를 종횡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노년의 이지탁이 6·10 투쟁특별위원회의 활동상을 기록한 신문 기고문. 조선일보 1960년 6월11일치 석간 4면.
특별위원회는 6·10 만세운동의 야전 사령부와 같았다. 이지탁의 회고에 따르면, 특히 세 가지 임무가 중요했다. 서울 시내에서 학생 대중을 동원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 시위가 일어나도록 지방 연락 체계를 짜야 했다. 또 시위 현장에 살포할 항일 전단을 대규모로 인쇄하는 것이 요구됐다. 특별위원 세 사람이 날마다 비둘기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업무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 밖에 이지탁이 맡은 업무 가운데 하나는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과의 공동 행동 문제였다. 이지탁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김사국 영도하의 서울청년회와 함께 의논하여보기로 하고 필자가 동회의 이정윤, 좌공림 및 김광 등과 접촉해본 결과, 냉담하게 대하면서 소위 사상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착상이라고 일축해 버림을 받았다. 당시 김사국은 폐병으로 중태에 빠졌다가 5월8일에 서거하였다.”5
‘김사국 영도하의 서울청년회’란 곧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합법 공개단체인 서울청년회를 통해 표면 활동을 전개한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이 세력은 조선공산당과 더불어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고 있었다. 두 단체의 공동 행동이 성사된다면 6·10 만세운동의 파워는 배가될 터였다.
이지탁이 교섭한 상대방은 이정윤, 좌공림, 김광 등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이정윤은 고려공산동맹 중앙위원이자 국제당에 파견하는 대표자로 선임될 만큼 영향력을 가진 이였다. 그는 6·10 만세운동 계획을 가리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착상’이라 비판했다고 한다.
도대체 공동 행동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정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고려공산동맹이 6·10 만세운동 계획에 합류하지 않은 이유는 정세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이정윤에 따르면, 3·1운동 때와 달리 국제 정세가 불리했다. 1926년 시기에는 열강의 상호관계가 안정화돼, 조선의 국제적 지위가 변동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을 적대하는 열강의 정치적 후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거대한 군중의 혁명적 진출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제2의 3·1운동을 꾀하는 전위조직의 선도적인 노력은 모험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보았다. 정세에 조응하지 않는 운동 계획은 모험주의적 과오를 낳을 수 있다는 진단이었다.
이지탁이 6·10 투쟁특별위원으로서 수행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당중앙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상계의 지도층으로 지목되는 몇몇 인사들과는 상의하고 양해를 구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학생의 신분으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필자가 그 책임을 맡아서, (…) 이봉수, 강달영, 이준태, 유진희, 홍남표씨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학생들의 계획을 설명하고 인산을 계기로 하여 민족적인 전국항일운동을 일으키는 데 대한 공명을 구하였던 것이다.”6
‘사상계의 지도층으로 지목되는 몇몇 인사들’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에둘러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구체적인 인명 다섯 사람을 거론했다. 이 중에서 투옥 중이던 유진희를 제외하면 모두 다 1926년 상반기 당 중앙집행위원이었다.
6·10 투쟁특별위원회가 당중앙의 결정에 의거해 조직됐음을 상기하자. 3인 특별위원회는 당중앙 회의에 참석해 “계획을 설명”하고, 전국적인 시위운동에 대한 공명을 구했다고 한다. 6·10 만세운동의 진행 경과를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지탁이 6·10 만세운동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는 거사 3일 전에 발발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점이라 생각한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결국 거사 직전 7일에 권오설까지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 측의 우리는 우리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6월10일의 인산일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7
거사 3일 전의 위기란 바로 1926년 6월6~7일에 일어난 검거 사건을 가리킨다. 대대적인 검속이 이뤄졌다. 단 이틀 만에 서울에서 200명이 검속됐고, 일본군 2천여 명이 완전무장한 채 서울 시내를 경계했다. 인쇄물 5만 장과 인쇄기 2대가 압수됐고, 인쇄에 참여했던 당 노동 야체이카(세포단체) 구성원들이 체포됐다. 지방 연락망도 파괴됐다. 그뿐 아니라 6월7일에는 특별위원 권오설과 박민영이 체포됐다. 이 소식은 이지탁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3인으로 구성된 6·10 투쟁특별위원회 멤버 가운데 두 사람이 검거됐기 때문이다. 특별위원은 이제 혼자 남았다. 6·10 만세운동의 성패가 자기 한 사람의 힘에 달린 셈이었다.

1923년 9월20일 이지탁이 자필로 작성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생 신상조사서 첫 쪽. 입학 전에 한인 빨치산부대 고려혁명군 정치지도원으로 일했고, 러시아어 능력은 중급이라고 기재했다. 러시아어 필기체 필적이 유려하다. (C) РГАСПИ
다행히 합법·비합법의 폭넓은 네트워크는 무사했다. 특히 공청이 건재했다. 서울 시내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내에 은밀하게 조직된 공청 야체이카는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다. 디데이까지는 3일 남았다. 신속히 수습해야만 했다. 혼자 남은 특별위원 이지탁이 어떻게 후속 조치를 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이지탁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6월10일 서울 도처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난 것은 유일한 특별위원 이지탁과 그의 공청 동료들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이지탁 노인은 평생 마음속에 지녔던 비밀을 세상에 드러냈다. 그러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법률적 제재가 강력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6·10 만세운동을 조선공산당 6·10 투쟁특별위원회가 주도했다고 명시하지 못했다. 등장인물들을 비밀결사 공산당과 공청의 일원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저 의기투합한 개인인 것처럼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탁은 진실의 절반만 얘기했다. 훗날 눈 밝은 독자가 있어서 자신이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부분마저 온전히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참고 문헌
1. 李智鐸, ‘독립운동과 학생–6·10 만세사건을 회고하며(2)’, 조선일보 1960년 6월11일 석간 4면.
2. 홍남표, ‘6·10 운동의 교훈(상)’, 조선인민보 1946년 6월7일.
3. 조두원, ‘6·10 운동과 조선공산당(1)’, 청년해방일보 1946년 6월9일 1면.
4. 고려공산청년회, ‘고공청 제29호, 책임비서 성명 변경에 관한 건’, 1926년 3월2일,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55-56
5. 이지탁, 앞의 글.
6. 이지탁, 앞의 글.
7. 이지탁, 앞의 글.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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