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8년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이지탁. 국사편찬위원회. 임경석 제공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되는 문제가 있다.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은 6·10만세운동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다시 말하면 그 비밀결사는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는가 아닌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고려공산동맹이란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명칭이다. 1922년 결성된 이후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1926년까지 5년간 줄곧 존속해온, 영향력 있는 지하 단체였다. 주로 서울청년회라는 공개 단체를 앞세워 활동했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는 사회주의자 집단으로 비쳤다. 그래서 흔히 ‘서울파’ 공산그룹이라 불렸다.
이 비밀결사가 점하는 영향력이 컸다. 사회주의운동 세력의 절반쯤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반이 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예를 들면 1925년 4월 민중운동자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사회단체 대표자들을 한자리에 결집하려는 캠페인이 있었다. 노동자·농민·청년·사상·여성·형평 단체를 망라하는 회합이었다. 전국에 걸쳐 352개 단체가 참가를 신청했으며,1 이를 주도한 세력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었다.
그러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은 그 대회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처럼 여러 계급의 다양한 단체들을 한데 묶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운동을 강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민중운동자대회반대단체연합회’라는 캠페인을 이끌었는데, 451개 단체를 망라할 수 있었다.2 참가단체 수가 영향력의 크기를 곧바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추세를 아는 데 유용하다.
두 비밀결사의 세포단체와 구성원 수에 관한 정보가 있다. 일급비밀에 속한 희귀한 정보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의 세포단체는 29개, 당원과 후보당원 수의 합은 265명이었다.3
그에 비해 1926년 1월 고려공산동맹의 세포단체는 58개, 당원과 후보당원 수의 합은 435명이었다.4 숫자만 보면 고려공산동맹의 조직 역량이 조선공산당보다 60~100% 더 큰 것처럼 보인다. 다만 가입 자격의 엄격성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 차이를 액면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의 조직 역량이 조선공산당보다 결코 적지 않았으며, 되레 얼마간은 더 컸다고도 볼 수 있겠다.
고려공산동맹이 6·10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6·10만세운동 특별위원회 세 위원 가운데 한 명인 이지탁은 뒷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선 김사국 영도하의 서울청년회와 함께 의논하여보기로 하고 필자가 동회의 이정윤, 좌공림(기관 간부) 및 김광 등과 접촉해본 결과, 냉담하게 대하면서 소위 사상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착상이라고 일축해 버림을 받았다. 당시 김사국은 폐병으로 중태에 빠졌다가 5월8일에 서거하였다.”5
‘김사국 영도하의 서울청년회’란 곧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을 가리킨다. 그들과 의논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조선공산당 특별위원회가 당시 사회주의운동권을 양분하던 두 비밀결사의 공동행동을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 두 비밀결사의 공동행동이 이뤄진다면 전국적 규모로 거대한 대중을 동원할 가능성이 증대될 터였다. 3·1운동의 재연을 기대해볼 만했다.
이지탁은 접촉한 사람을 셋 거명했다. 고려공산동맹의 집행부에 속하거나 중요 직무를 맡은 고위급 간부였을 것이다. 이정윤(29)은 그럴 만한 지위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일본 유학생 출신의 지식층으로서 재학 중에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문서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고려공산동맹의 중앙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1924년 공청 책임비서에 선임됐고, 1925년 동맹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1926년에는 동맹의 모스크바 파견 대표자로 선정돼 국제당 외교에 임했다. 이런 사실들로 미뤄보면 이정윤은 자신이 속한 비밀결사를 대표해 조선공산당 특별위원인 이지탁과 책임 있게 협상할 위치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다른 두 사람은 고려공산동맹 내부의 지위와 역할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좌공림은 ‘고려공산동맹 간부’였던 것 같다. 이지탁이 ‘기관 간부’라고 메모한 것은 그를 뜻했다. 세 번째로 거론한 ‘김광’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도 ‘서울파’ 공산그룹의 중요 간부였을 것이다. 세 사람이나 타진한 것을 보면, 조선공산당 쪽은 다각적으로 인내심을 갖고서 논의에 임했음을 짐작게 한다.

두 비밀결사의 협상 경위를 적은 이지탁의 회고. 조선일보 1960년 6월11일. 임경석 제공

‘고려공산동맹 사업보고’(1926년 10월25일) 중에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동맹의 6·10만세운동 공동행동 협의 경과를 기술한 부분. РГАСПИ. 임경석 제공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다. 고려공산동맹 사람들은 냉담했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착상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을까? 이지탁이 전하는 말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이 시기 고려공산동맹의 지도력이 심각하게 동요하던 사정도 협상 결렬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고려공산동맹 창립 때부터 지도적 역할을 해오던 김사국이 질병으로 제 몫을 할 수 없었다.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에 김사국은 폐병으로 중태에 빠졌고, 결국 5월8일 사망했다. 비밀결사의 지도력이 내부적으로 안정을 잃고서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왜 고려공산동맹은 조선공산당과의 공동행동을 거절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착상’이라고 했다는데, 무슨 뜻일까? 다행히 당사자 이정윤이 작성한 글이 있다. 고려공산동맹을 대표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파견됐을 때, 1926년 10월25일자로 작성한 ‘고려공산동맹 사업보고’라는 글이다. 손으로 쓴 70쪽짜리 장문의 일본어 문서다. 작성 주체는 두 사람이다. ‘고려공산동맹 모스크바 연락원’ 최창익과 이정윤이다.
이 중 1926년 6·10만세운동에 관한 서술은 전적으로 이정윤에 의해서 이뤄졌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최창익은 러시아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이다. 최창익의 시공간 동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25년 12월 고려공산동맹의 전권위원으로서 모스크바에 파견됐고, 이듬해 4월까지 국제당 외교에 종사했다. 1926년 4월부터 9월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했으며, 10월부터는 새로 파견 나온 이정윤과 함께 다시 모스크바로 나아갔다.
이정윤은 두 비밀결사 사이에 6·10만세운동에 관한 협의가 있었다고 썼다. 그 부분을 읽어보자.
“화요회 중요 간부 모씨와 교섭한 결과, 무엇보다도 시기관(時期觀)의 상위와 운동 진행 방법의 상위로, 상호 협력할 수 없었다. 다른 동지 단체 및 각 민족단체와의 사이에도 의견의 상위로 서로 협력할 수 없었다.”6
‘화요회’와 교섭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화요회’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을 가리킨다. 조선공산당은 합법 사상단체 화요회를 앞세워서 활동했기 때문에 ‘화요파’ 공산그룹이라 불렸다. 화요회 간부 모씨와 회견했다는 언급이 주목된다. “씨명까지 지적할 필요가 있다면 지적하겠다”는 메모가 곁에 적혀 있는데, 두 줄이 그어져 있다. 삭제했음을 나타낸다. ‘모씨’란 이지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3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이정윤 옥중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임경석 제공
교섭 결과 서로 협력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협상이 결렬됐다는 이지탁의 회고와 일치한다. 결국 두 비밀결사는 6·10만세운동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정보가 있다. 두 비밀결사의 협력이 불가능한 이유가 제시돼 있다. 두 가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시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 진행 방법’의 차이였다.
시기관의 차이란 순종 사망 이후 조성된 민심 동향에 관한 판단 차이를 말한다. 조선공산당은 고종의 사망이 3·1운동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순종의 사망은 제2의 3·1운동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운동 진행 방법’은 전국적 규모의 대규모 대중 시위를 준비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고려공산동맹은 조성된 정세를 좀더 조심스럽게 해석했다. 3·1운동 당시 수많은 군중이 반일시위운동에 참여한 까닭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할 수 있으리라 전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일본 이외 강대 국가들의 정치적 후원이 없기 때문에, 민중 심리는 (…) 일본으로부터 절대 독립하려는 목적에 대해서 성공의 자신이 없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설령 용기 있는 사람들이 시위운동을 일으키더라도 민중은 그에 참가하는 것을 기피할 것이라고 예측했다.7
고려공산동맹은 운동 진행 방법도 달리 짰다. 6월10일 순종 장례일에 ‘단체적 시위운동’은 피하고 ‘산병전’을 행하기로 결정했다. 고려공산동맹이 주동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은 준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산병전이란 비밀결사 구성원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운동 참여를 의미했다. 다만 군중의 자연발생적 시위가 고양된다면 달리 대응하기로 했다. 6월10일 이후 시위운동의 재개를 위해 고려공산동맹이 조직적으로 나서겠다는 결심이었다. 이를 위해서 선전문과 격문을 준비해 살포하기로 했다.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은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참여했다는 판단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판단도 역사적 실제와 거리가 있음을 본다. 고려공산동맹은 조직적으로, 주동적으로 6·10만세운동을 이끌어갈 계획은 없었다. 다만 구성원들의 개인적 참여나 소규모 집단 참여를 허용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6·10만세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수감된 고려공산동맹 구성원은 많지 않았다. 15명에 머물렀다. 반일 선전문을 휴대하거나, 전북 전주와 고창 두 지방에서 시위운동을 도모하거나, 6월10일 당일에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된 사람이었다.
1. 경기도경, ‘치안개황’, 1925년 5월, 310쪽.
2. ‘민중운동자대회반대단체(3회)’, 조선일보 1925년 4월20일, 2면.
3.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 ‘조선공산당 현황에 관한 보고’, 1926년 3월17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2년, 36~39쪽.
4. ソウル靑年會內部ノ秘密クルプ(高麗共産同盟)代表 金榮萬, 崔昌益, 李雲赫, ‘國際共産黨執行委員會貴中, ソウル靑年會內部ニ組織サレタル秘密クルプ(高麗共産同盟)ノ報告’, 1926년 1월, 19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7~26.
5. 李智鐸, ‘독립운동과 학생–6·10만세사건을 회고하며(2)’, 조선일보 1960년 6월11일, 석간 4면.
6. 高麗共産同盟莫府聯絡員 崔昌益․李廷允, ‘高麗共産同盟事業報告’, 1926년 10월25일, 137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25, л.125~194.
7. 위의 글, 136쪽.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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