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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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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옥기’가 알려준 6·10만세운동의 진실

상하이 조계에서 체포된 구연흠이 갖고 있던 문건… 반공주의 역사학계의 일제 견해 답습 방증
등록 2026-03-19 21:12 수정 2026-03-24 17:25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돼 용산역으로 압송된 구연흠. 검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썼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20일치. 임경석 제공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돼 용산역으로 압송된 구연흠. 검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썼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20일치. 임경석 제공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라파예트 거리’(Route Lafayette)가 있다. 한자로는 랄배덕로(辣裵德路)라 표기하는 이 거리는 프랑스 조계 내의 동서 방향 간선도로였다. 이 거리 태흥방(泰興坊) 5호 주소가 주목된다. 1930년 9월11일 오후 4시께 이 건물을 경찰들이 에워쌌다. 일본총영사관 경찰 3명, 중국인 경찰 3명, 프랑스 경찰 3명이 합동작전을 폈다. 일본 쪽의 요청에 중국과 프랑스가 호응한 결과였다.

경찰이 노리는 대상은 ‘불령선인’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나 독립운동가들이 잠복해 있다는 첩보를 얻었던 것이다. 첩보의 소스는 이미 체포한 조선인 청년들이었다. 10여 일 전이었다. 8월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한 국치일 20주년을 맞아 상하이 영·미·일 공동조계지에서 시위가 열렸다. 조선인 50여 명을 비롯해 식민지·종속국 위치에 놓인 중국, 인도, 베트남인 1천여 명이 약소민족대회를 개최하고 거리시위를 감행했다. 불행히도 현장에서 김명회(23), 하종환(20) 두 조선인 청년이 붙잡혔다. 이들은 일본총영사관경찰서 내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연루자의 이름과 주소를 대라는 추궁이었다. 견디고 또 견뎠지만 결국 10여 일 만에 굴복하고 말았다.

잡고 보니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거두’

문제의 주소지에는 조선인 3명이 세 들어 있었다. 그중 두 사람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3층의 한 구석방에 머물러 있던 48살의 장년층 사내는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남자의 신원을 확인한 경찰은 깜짝 놀랐다.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거두’였기 때문이다. 계획에도 없이 거물급 사회주의자를 검거하는 행운을 누렸던 것이다. 체포된 사내는 구연흠(具然欽)이었다. 구연흠의 거처에서 방대한 양의 증거품도 발견됐다. 큰 트렁크 2개를 압수했는데 그 속에는 공산당 간부 인장, 당원명부, 강령, 규약, 각종 전단과 팸플릿, 영어·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조선어로 된 ‘불온’ 인쇄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진 자료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최신식 등사판 인쇄기도 3세트나 압수했다.1 상하이 항일운동의 한 온상을 급습한 것이다. 경찰은 구연흠의 행적을 취조하는 한편 증거품 정리에 들어갔다.

구연흠은 어떤 사람인가. 일본 경찰이 화들짝 놀랄 만큼 거물급 사회주의자라는데, 과연 그런가? 실제로 그랬다. 구연흠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중앙간부였다. 1926년 당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3명 가운데 하나였고, 중앙 혁명후원회(모프르) 위원장이었다. 비밀결사 활동을 감찰하는 권리를 갖고 있고, 투옥된 동지와 그 가족을 재정적으로 돕는 기구의 책임자였다.2 그뿐만이 아니다. 중앙집행부가 검거 등으로 위태롭게 되면, 그들을 대체할 5명의 후보위원으로도 선정됐다.3

서울시당에서도 중요 역할을 맡았다. 서울 시내에 조직된 9개 야체이카(세포단체)를 둘로 나누어 제1구역, 제2구역 세포책임자회를 설치했는데, 구연흠은 제2구역 책임자로 선임됐다.

그는 현직 언론인이었다. 시대일보사 논설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언론기관의 논조를 반일혁명운동에 유리하도록 관리하는 당내 언론 프락치야(전담부)에도 소속해 있었다. 그의 언론 경력은 두터웠다. 1919년 만주 봉천의 조선어 신문 ‘만주일보’를 필두로 하여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에서 지방부장, 영업국장 등의 업무를 맡았다.

구연흠 체포에 관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1930년 9월29일자 정보 보고서 첫 페이지. 국사편찬위원회. 임경석 제공

구연흠 체포에 관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1930년 9월29일자 정보 보고서 첫 페이지. 국사편찬위원회. 임경석 제공


조선공산당의 거물이 왜 국내가 아니라 상하이에 거처를 두었을까? 경찰의 체포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뒤 경찰은 그 배후에 비밀결사가 잠복해 있다고 판단했다. 자신들이 그때까지 붙잡았던 10여 명의 혐의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회주의자가 연관됐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926년 6월21일부터 검거망이 확대됐다. 이때 구연흠도 걸려들었다. 6월23일 새벽에 서울 경운동 자택에서 체포됐다. 경찰서에 구금된 혐의자는 약 200명에 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안은 심각하지 않았다. 6·10만세운동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경찰은 17명만 추려서 검사국으로 송치했다. 7월12일이었다. 혐의자 17명으로 이뤄진 크지 않은 조직사건으로 귀결되는 것 같았다. 나머지 구금된 사람들은 석방됐다. 이때 석방된 사람 중에는 비밀결사의 중앙간부인 구연흠도 포함됐다. 그는 구금된 지 2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6·10만세운동 2차 검거 선풍 피해 망명

구연흠이 뒷날 평가하기를, 사건이 이처럼 축소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의 수사 확대가 물적 증거에 입각하지 않고 심증에만 의거해서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체포된 동지들의 놀라운 진술 투쟁 덕분이었다. 특히 ‘권오설, 염창렬, 이봉수, 홍덕유’ 네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혹독한 고문이 이뤄졌고, 그 탓에 몇 번씩이나 죽다가 되살아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 동지들은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각오 아래 사건을 축소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구연흠은 그들의 ‘의연한 기백과 침착한 정신’에 경탄한다고 술회했다.4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수감자들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상황이 급변했다. 원격지로 피신했어야 할 중요 간부들이 서울 시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된 탓이었다. 7월17일 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 당·공청의 간부 박순병이 검거됐다. 그뿐인가. 중앙간부의 비밀 서류마저 압수되고 말았다. 이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왔다. 검거 범위가 전국에 걸쳐서 수백 명으로 확대됐다.

구연흠도 다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망명을 결심했다. 남은 가족이 문제였다. 가족으로는 아내 연(延)씨 부인과 12살, 4살, 1살짜리 어린 세 딸이 있었다. 이들의 급양과 교육을 어찌할까? 그게 고민이었다. 결국 그는 충북 청주 시내에 거주하는 아우 구연응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러고는 홀연 자취를 감췄다.

상하이 일본총영사관경찰서는 1930년 10월4일자로 구연흠에 관한 취조 보고서를 작성했다. 체포한 지 24일 만이었다. 경찰서에 갇혀 구연흠이 겪었을 고초가 고스란히 담긴 문서였다. 거기에는 피의자의 항일 ‘범죄 혐의’가 빼곡히 기재돼 있다. 주로 망명 이후 행적에 관한 내용이었다. 1926년 10월부터 1930년 8월까지 상하이에서 이뤄진 그의 ‘범죄’ 행위를 10개 항목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이 보고서에는 장문의 문서가 별지로 첨부돼 있음이 눈에 띈다. ‘구연흠 원고’(조선문에서 번역)라는 메모가 붙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대옥기(大獄記)’(대옥기)가 그것이다.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속한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계기가 된, 6·10만세운동과 그에 뒤이은 공산당 탄압 사건에 관한 문서였다.

이 문서의 진가는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했다. 연구자들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구연흠이 상하이 영사관경찰서의 취조를 받으면서 쓴 진술서로 오인받았기 때문이다. 체포된 상태에서 강압하에 쓰였고 6·10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4년여가 지난 뒤에 작성돼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문서는 체포된 자의 진술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서 여기저기서 단서가 눈에 띈다. 일본을 가리켜 ‘포학무쌍한 적’이라 하고, 일본 경찰더러 ‘적경’(敵警)이라 표현하고 있다.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저격 미수 사건을 설명하면서, 송학선 열사가 ‘불행히도’ 타인을 잘못 죽였다고 설명하는 문장도 있다. 취조실의 강압 속에서 작성된 진술서라면 이런 표현과 문장은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적대시하는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환경에서 집필된 것이 뚜렷하다.

진가 발견하지 못한 역사 연구자들
탈모한 구연흠의 또 다른 사진. 글씨는 그의 필적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31년 11월19일치. 임경석 제공

탈모한 구연흠의 또 다른 사진. 글씨는 그의 필적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31년 11월19일치. 임경석 제공


이 문서가 작성된 시기도 1930년이 아니었다. 더 소급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조선공산당 재판’이 국제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뉴스의 초점이 된 시기는 1927년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피고인 101명에 대한 재판은 1927년 9월13일부터 이듬해 2월13일까지 이뤄졌다. 이 재판은 미국의 사코·반제티 사형 사건과 더불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격동을 일으킨 1927년의 양대 사건으로 손꼽혔다.

구연흠이 1926년 당시 모프르 위원장이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국외로 망명한 뒤에도 그 소임을 계속했다. 1927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모프르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서 참석한 사실은 그를 잘 보여준다. 조선공산당 재판이 왜, 어떤 경과를 거쳐 진행됐는지 상세히 기록한 점에서 볼 때, 대옥기는 구연흠의 모프르 위원장 소임과 연관돼 집필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연흠이 상하이에서 체포됐을 때 많은 양의 비밀문서가 함께 압수됐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어떤 것들인지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옥기는 그 속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서는 주목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운동 당사자 입장에서 6·10만세운동의 실상을 전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일본 관헌 기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유감스럽지만 경찰 수사 보고서와 재판 기록만이 사료로 이용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는 부득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럴 경우 연구자들은 엄격한 사료 비판을 수행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모순된 자료의 상호 교차가 불가능하다면 그 작업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6·10만세운동 연구 현황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고려할 때, 대옥기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역사·문학 방면에서 반추해야 할 유산

대옥기의 의의는 크다. 6·10만세운동의 주도세력이 사회주의 비밀결사라는 점을 상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대한 탄압은 6·10만세운동에 대한 일본의 보복이었고, 조선공산당 재판의 피고인들은 6·10만세운동의 한 희생자들이었다는 지적도 경청할 만하다. 아울러 6·10만세운동과 사회주의를 분리하는 것은 일본 경찰의 책동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는 6·10만세운동이 순수히 민족적 성향의 학생들이 주체가 된 항일학생운동이라고 간주하는 역사학계 일각의 반공주의 역사 인식이 사실은 일본 경찰의 견해를 계승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대옥기는 구연흠이 후손에게 남긴 역사적 유산이다. 6·10만세운동과 조선공산당 재판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에 대한 당사자의 체험적 진술이다. 그의 저술은 역사학과 문학 양 방면에서 연구자들에 의해 두고두고 반추될 것이라고 믿는다.

 

1. 조선총독부경무국, ‘朝保秘1301号, 具然欽 逮捕에 關한 件’, 1930년 9월29일, ‘思想에 關한 情報綴 第10冊’ 경성지법검사국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2. 강달영, ‘조공당제4호, 중앙검사위원 선거 및 혁명후원회 중앙위원 보천과 동 책임자 선임에 관한 건’, 1926년 3월17일,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24

3.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회록(제7회)’, 1926년 3월11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2년, 9쪽.

4. 具然欽, ‘朝鮮共産黨と高麗共産靑年會大獄記’, 梶村秀樹,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9 (朝鮮 5), 東京, みすず書房, 1972년, 431쪽.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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