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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100주년, 반공 덧칠 지워야 할 때

박정희 체제 ‘민족주의 계열 운동’으로 왜곡… 사회주의 비밀결사, 위기 속 끝까지 주도
등록 2026-02-26 21:45 수정 2026-03-04 20:45
6·10만세운동 학생지도부를 이끈 이병립.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보아 북간도 동흥중학교 교원 시기인 1930~1932년 즈음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임경석 제공

6·10만세운동 학생지도부를 이끈 이병립.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보아 북간도 동흥중학교 교원 시기인 1930~1932년 즈음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임경석 제공


2026년은 6·10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6년 6월 발발한 항일 시위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를 기리는 사회적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100주년이라는 전환점을 맞아 이 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가치와 정체성을 고양하는 데 긍정적인 기여를 하리라 생각한다.

해명되지 않은 의문점이 있다. 6·10만세운동의 주체와 성격 문제가 그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있었다. 그 논란은 말끔히 해결되기는커녕 오늘날에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논란의 불길은 연구자 이현희가 지폈다. 그가 연구논문을 발표한 때는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기였다. 이현희는 사회주의 비밀결사가 6·10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기존 통설에 맞서 반공주의 역사인식을 제기했다. 6·10만세운동의 주도체와 전개 과정이 사회주의 계통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견해는 잘못이라고 명시했다. 그 대신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는 순수한 민족적 학생층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1

이 견해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간행하는 관변 역사서와 그에 호응하는 학자들에 의해 이 견해가 확산됐다. 나아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까지 올랐다. 이 견해는 오랜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어느덧 통설의 지위를 점하게 됐다.

이현희의 의도적 오독과 과대평가
6·10만세운동에 관해 반공주의 역사인식을 제기한 이현희의 논문. ‘6·10독립만세 운동고’(‘아세아연구’ 12,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9)의 첫 쪽. 임경석 제공

6·10만세운동에 관해 반공주의 역사인식을 제기한 이현희의 논문. ‘6·10독립만세 운동고’(‘아세아연구’ 12,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9)의 첫 쪽. 임경석 제공


이현희는 사회주의 계열이 6·10만세운동을 계획했음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의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경찰에게 발각됐고, 6월7일을 고비로 해서 붕괴됐다고 해석했다. 그러면 6월10일에 발발한 만세시위운동은 누가 주도했는가.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순수한 민족적 성향의 학생층이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운동을 주도한 전문학교 학생들을 ‘사직동계’라 부르고,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통동계’라 명명했다.

6·10만세운동을 둘러싼 반공주의 인식은 과연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가, 아니면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에 지나지 않는가? 사료 속 정보는 그것이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기는커녕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 계획이 6월7일을 계기로 붕괴됐다는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견해는 이현희의 입론을 뒷받침하는 중추적 지위를 점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두 가지 잘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 계획’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6월6~7일 일어난 사회주의자 검거 사건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점이다.

순종의 장례 일정에 맞춰서 대규모 시위운동을 거행한다고 처음 결정한 주체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회였다. 강달영 책임비서를 비롯한 7명의 중앙집행위원이 염두에 둔 것은 3·1운동 같은 전국 범위의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이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두 종류의 기구가 필요했다. 하나는 공산당 외부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 학생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하는 것이고,2 다른 하나는 공산당 내부에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대한독립당은 민족통일전선 기관이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수행한 역할을 이 기관이 맡게 될 예정이었다. 6·10만세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어갈 간판이었다. 이 기관의 결성을 둘러싸고 순종 사망 이전인 1926년 3월에 이미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사회주의’ ‘천도교 권동진 그룹’ ‘기독교’ ‘비타협 성향의 언론인’, 네 세력을 대표한 8명의 비밀 회합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비타협적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연대하는 것에 합의가 이뤄졌다.3 그러나 대한독립당 명의로 대중 시위를 이끈다는 복안은 순조롭게 실행되지 않았다. 공포심 때문이었다. 대한독립당 상층부를 구성하게 될 사람들은 만세시위운동의 ‘수괴’라는 책임을 각오해야 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에게 ‘내란죄’ 적용 여부가 논란이 됐고 시위 현장에서 참혹한 학살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이상의 참상이 연출되리라 예상했다. 찬동하는 소수도 있었지만 머뭇거리는 움직임이 다수였다. 찬동하는 소수란 ‘천도교 권동진 그룹’뿐이었다. 결국 대한독립당 조직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공산당 특별위원회가 전투사령부 구실
6·10만세운동 3개월 전에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의 명단을 보여주는 내부 문서 1쪽. 붉은 빛깔의 고려공청 인장이 선명하다. 명단 가운데 여섯 번째로 이병립의 이름이 올라 있다. 서명란에는 영문 이니셜로 ‘B.Ree’라고 썼다. ‘이지택’(李之澤)은 이지탁과 동일인이고, ‘朴이키포르’(Никифор)는 곧 박민영을 가리킨다. 임경석 제공

6·10만세운동 3개월 전에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의 명단을 보여주는 내부 문서 1쪽. 붉은 빛깔의 고려공청 인장이 선명하다. 명단 가운데 여섯 번째로 이병립의 이름이 올라 있다. 서명란에는 영문 이니셜로 ‘B.Ree’라고 썼다. ‘이지택’(李之澤)은 이지탁과 동일인이고, ‘朴이키포르’(Никифор)는 곧 박민영을 가리킨다. 임경석 제공


특별위원회는 당 중앙집행부 직속 투쟁 기구였다. 전국 범위의 대규모 시위운동을 지휘하는 야전의 전투사령부 같은 기구였다. 선언서와 전단을 준비하고, 전국적인 연락·배포망을 조직하며, 학생층을 동원해 선도적인 시위운동의 뇌관을 터트리는 일을 감당하는 기구였다. 당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책임자로 선임됐다. 권오설(29)이었다. 그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도 겸임하고 있었다.

특별위원회는 당과 공청에 동시에 소속된 3명의 상근 활동가로 구성됐다. 권오설 위원장 외에 박민영(23)과 이지탁(28)이 그 위원이었다. 두 위원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뒤 국내로 파견된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자였다. 박민영은 당원이었고,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이기도 했다. 그 외에 옥중에 갇힌 사회주의자들을 후원하는 혁명자구원회(모프르) 위원으로 재임했고, 또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과 조선공산당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락을 담당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지탁도 당원임과 동시에 공청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임 중이었다. 그는 청년운동 부문을 관할하는 지위에 속해 있었다. 이 위원들은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어 회합했다고 한다. 6·10만세운동 준비 업무를 총괄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준비 업무에는 당과 공청의 중요 역량이 동원됐다. 전국에 살포할 대량의 선언서와 전단을 제작하는 일에는 당내 노동운동 부문 지도자들과 인쇄직공 출신 당원들이 투입됐다. 이들은 대한독립당 명의의 ‘격고문’을 비롯해 일곱 종류의 유인물 10만 장을 비밀리에 제작했다. 디데이로부터 10일 전에 이미 임무를 완수했다.

지방 도시와의 연락 체계를 수립하는 일도 필요했다. 시위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서였다. 서울을 기점으로 하여 엑스(X)자 모양으로 뻗어나간 호남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철도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당원들이 파견됐다. 그리하여 13개도, 58개 지방 도시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디데이 정오에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약속했다.

서울 시위가 중요했다. 3·1운동 때도 그랬듯이 대중 시위를 격발하는 기폭제가 필요했다. 6월10일 당일에 서울 시내에서 시위운동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했다. 이 소임을 맡기 위해서 당과 공청의 학생운동 부문 활동가들이 나섰다. 당의 학생부문 야체이카(세포)에는 책임자 정달헌을 비롯해 조두원, 윤기현, 권오상, 이병립이 속해 있었다. 모두 다 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이 중에서 이병립(23)은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도 겸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 지역 학생운동의 비밀 지휘부 역할을 담당했다. 서울의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순종 장의행렬이 지나가는 길가에 차례로 배치했다. 학생층 속에 비밀리에 움직이는 독서회 모임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위원회는 그 밖에도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크고 작은 일을 착착 수행했다. 운동자금 마련, 국외 망명자들과의 연락 등이 그것이다. 위원회는 준비 활동 경과를 당 중앙간부에 보고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특별위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지탁은 당 중앙간부 모임에 참석해 6·10만세운동 준비 과정을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4

D-4일 맞은 결정적 위기… 그러나 재결속
6·10만세운동 3개월 전에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의 명단을 보여주는 내부 문서 2쪽. 임경석 제공

6·10만세운동 3개월 전에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의 명단을 보여주는 내부 문서 2쪽. 임경석 제공


디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장례일로부터 4일 전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경운동 천도교당에 숨겨뒀던 다섯 종의 항일 격문 5만여 장이 경찰에게 적발됐다. 뒤이어 검거 선풍이 불었다. 6월6~7일 이틀간에 걸쳐 격문 인쇄를 주관했던 당의 노동운동 부문 활동가들이 체포됐고, 6·10투쟁특별위원 권오설과 박민영이 검거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 준비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인쇄팀에 속한 당원들에 뒤이어 각 지방 도시와의 네트워크를 조직했던 당원들도 체포됐다. 다른 사회주의 비밀결사 구성원들도 사방에서 조여오는 검거와 검속의 촉수를 피하기 위해 도피하거나 잠적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던 당과 공청의 모든 역량이 궤멸된 것은 아니었다. 특별위원 가운데 이지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또 당의 학생부문 야체이카 구성원 가운데 권오상, 이병립이 건재해 있었다. 특히 고무적인 것은 6월10일 서울 지역 학생 시위를 조직하기로 책임진 학생지도부(조두원, 정달헌, 이병립, 이천진, 박두종, 박하균, 이선호)가 온존해 있었다. 이 중에서 조두원과 정달헌은 비밀결사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선발돼 5월 하순께 이미 출국한 상태였다.

따라서 단연 이병립의 비중과 역할이 중요하게 떠올랐다. 6·10 만세 서울 시위 학생지도부 성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비밀결사 공산당 학생 야체이카 소속이고,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이었다. 합법적인 학생운동 영역에서도 중책을 맡고 있었다. 1925년 이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부 멤버였고, 1926년 2월에는 서울 시내 9개 전문학교 학생 대표로 구성된 조선학생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학생운동 부문에서 이병립이 가진 영향력을 뛰어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병립은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거사일로부터 불과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좌절하지 않았다. 당과 공청의 네트워크를 가동하고, 서울 시위 학생지도부를 이끌었다. 새로운 격문 1만 장을 인쇄했고, 시위에 사용할 소형 태극기를 수십 장 제작했다. 또 검거 사건으로 위축돼 있던 서울 시내 각 학교의 학생운동 역량을 재결속했다. 그 결과 6월10일 당일 장의행렬이 지나가는 길가 여덟 곳에서 차례대로 유인물을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쳐 부르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이 준비하고 끝까지 지켜내

이병립은 배후에서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현장 투쟁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는 연희전문 동료 학생들과 함께 을지로3가에서 장의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적시에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시위를 이끌기 위해서였다. 그는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됐다.

결국 사회주의 계열의 준비가 없었다면 6·10만세운동은 발발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거사 3일 전에 치명적인 검거 사건이 터졌지만, 아직 체포되지 않은 사회주의 비밀결사 구성원들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6·10만세운동은 그들의 숨은 노력과 헌신에 힘입어 피어날 수 있었다.

 

1. 이현희, ‘6·10독립만세 운동고’, ‘아세아연구’ 12,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9년.

2. 具然欽, ‘朝鮮共産黨と高麗共産靑年會大獄記’, 梶村秀樹,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9 (朝鮮 5), 東京, みすず書房, 1972년, 425쪽.

3.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회록(제7회)’, 1926년 3월10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 1932년, 8쪽.

4. 李智鐸, ‘독립운동과 학생–6·10 만세사건을 회고하며(2)’, 조선일보 1960년 6월11일, 석간 4면.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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