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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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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진실의 물꼬 튼, 32년 만의 소중한 증언

해병대 소대장으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증언 뒤 타계한 참전군인 최영언을 기억하는 이유
등록 2023-02-11 13:01 수정 2023-08-02 08:01
베트남전에 해병대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고 최영언씨가 2013년 3월 <한겨레21>과 만나 민간인 학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고경태

베트남전에 해병대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고 최영언씨가 2013년 3월 <한겨레21>과 만나 민간인 학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고경태

“당신이 그때 나한테 전화했잖아.”

“네. 성함 확인한 뒤 바로 ‘베트남전 참전하셨죠?’라고 여쭤보았죠.”

“그 말 듣자마자 바로 직감이 왔어. 그거구나, 그 사건이구나.”

“눈치채셨군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 진실은 결국 드러나는구나 하고.”

“32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셨다고 했죠?”

“같이 사는 마누라한테도 안 했지. 중앙정보부에서 절대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로 서약했거든.”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 살아 있으니 이렇게 또 보네.”

최영언 선생을 13년 만에 다시 만난 건 2013년 3월이었다. 2000년 4월 <한겨레21> 기자 시절에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한 뒤로 처음이었다. 새 전화번호를 알아내 통화에 성공했다. “그냥 좀 뵙고 싶다”면서 만남을 청했다. 그는 이유를 캐묻지 않고 선선히 응했다. 경기도 고양시의 카페에서 한 시간 정도 담소를 나눴다. 2000년에 했던 인터뷰 뒷얘기와 1960년대 군대 시절과 베트남 파병의 추억이 소환됐다. 정색하는 인터뷰 자리는 아니었다. 시동을 거는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작정하고 최영언 선생을 만났다.

2023년 2월7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을 원고로 한 국가배상소송 1심 판결 승소 소식을 듣고 나는 최영언 선생을 떠올렸다. 이번 재판의 주인공은 베트남 피해자이지만, 가해 집단의 일원이던 참전군인들의 기여가 없었다면 승소로 가는 길은 험했을 것이다. 참전군인의 증언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을 목격했거나 치명적 피해를 보고 생존한 베트남인들 주장에 두터운 신빙성의 옷을 입혀줬다. 선생은 그 소중한 물꼬를 터준 사람이다.

퐁니·퐁녓의 악몽… 박정희 특명 수사 뒤 봉인돼

그런 그가 2018년 3월22일 76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역사적 판결을 기념하며, 고 최영언 선생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남겨 고인을 추모하고자 한다.

글 맨 앞에 적었듯, 선생은 2000년에 32년 동안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국군이 발포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총을 쏘아 수십 명이 숨졌고 △주민들이 남베트남 정부에 진정하자 문제로 비화해 조사가 진행된 뒤 1중대장 김석현씨가 조기 귀국을 했으며 △1969년 11월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장교들이 소환돼 사건 관련 조사를 받았는데 박정희 대통령 특명수사라는 말을 들었다는 게 골자였다.

74명이 숨진 1968년 2월12일 퐁니·퐁녓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최영언 선생은 사건 당시 해병제2여단 1중대1소대장(중위)으로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그 마을에 가장 먼저 진입해 민가 수색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뒤로 보냈는데 나중에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 인터뷰 이후 참전군인의 추가 증언이 급물살을 탔다. 최영언 선생이 워낙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말해준 덕분에, 같은 중대 2소대장과 3소대장 출신 이상우, 김기동씨에게 사실 확인을 받는 일은 수월했다. 이 내용은 <한겨레21> 2000년 5월4일치(제306호) 표지이야기로 보도됐다. 표지 제목은 ‘베트남 양민학살 중앙정보부가 조사했다’. 보도가 나간 뒤 해병제2여단 헌병대 수사계장 출신 성백우씨, 1중대2소대3분대원(일병)으로 현장에 있었다는 <한겨레21> 독자 김형팔씨가 제보해 선생의 증언을 뒷받침해줬다. 그로부터 무려 18년 뒤인 2018년엔 1중대2소대원이던 류진성씨가 사병 출신으로는 처음 얼굴을 드러내며 사건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는데(2019년 3월17일치 <한겨레21> 제1253호 보도), 이 과정에서도 선생의 증언은 나침반 역할을 해줬다. 가령 처음에는 “1소대가 발포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가 선생과의 인터뷰 내용을 들려주자 3소대로 바로잡는 식이었다.

2001년 3월 베트남 퐁니·퐁녓 마을 주민들이 <한겨레21>에 보도된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피학살자 사진을 돌려보며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고경태

2001년 3월 베트남 퐁니·퐁녓 마을 주민들이 <한겨레21>에 보도된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피학살자 사진을 돌려보며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고경태

2년간 10여 차례 인터뷰, 녹취록은 재판 증거물

2013년 3월 최영언 선생과 재회한 뒤 2년간 10여 회 집중 인터뷰를 했다. 나는 당시 퐁니·퐁녓 사건을 주 무대로 한 긴 호흡의 글을 준비 중이었다. 이를 위해 2013년 1월 퐁니·퐁녓을 다시 방문해 일주일간 피해자들 인터뷰를 마친 상태였다. 집필의 동력은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2000년과 2001년 이 사건에 관해 여러 시점의 기사를 <한겨레21>에 썼지만, 그동안 너무 얄팍하게 접근하다 중단하고 말았다는 자성을 하고 있었다. 더 무수한 이야기가 묻혀 있을 거라고 봤다. 희생자가 무려 74명이었고, 생존자와 목격자도 적지 않았다. 100건이 넘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중 해당 사건은 거의 유일하게 구체적인 잔혹 행위 의혹을 다룬 미군 비밀보고서가 존재했으며(2000년 11월23일치 <한겨레21> 제334호 표지이야기 보도) 참전군인 소재도 파악하기 쉬웠다. 더 심층적으로 파고들 여지가 있어 흥미를 느꼈기에 이후에도 매년 마을을 찾아 주민들을 조사했고(피해자 응우옌티탄도 열 번 이상 만났다), 한국에서는 최영언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인터뷰를 요청할 때마다 피하지 않았다.

<한겨레21>에서 1999년부터 베트남전 보도를 담당했던 나는 20년 넘게 이 사건을 중심으로 베트남 학살 사건을 조사하며 <한겨레21> 연재와 책 저술 작업을 해왔다. 2013년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만약 2000년과 2013년 선생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진즉에 이 작업을 포기했거나 이야기 전개의 폭이 좁혀졌을지 모른다.

최영언 선생은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뚝뚝하고 냉소적이었다. 진보적 성향의 어른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독한 반공주의자였다. 선생은 퐁니·퐁녓 사건을 넘어 본인이 겪은 해병대와 베트남전의 다채로운 경험을 들려줬다. 스펙터클한 스토리가 넘쳤기에, 애초 예상한 만남의 횟수는 계속 연장됐다. 그러면서 선생은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정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베트남전 시절 사진이 딱 두 장 있다고 하더니, 몇 달 뒤엔 나를 집 앞으로 데려가 사진 20여 장을 몽땅 손에 쥐여줬다.

선생은 학살 사건을 상황 논리로 변명하며 넘어가지 않았다. 물론 게릴라전이라는 특수성을 언급했지만, 그날 일은 명백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못박았다. 인터뷰 내용은 아이폰으로 녹음했는데, 이 녹음파일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국가배상소송에서 원고 응우옌티탄을 대리하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베트남전 전담팀(TF)이 증거 녹취록 40여 쪽으로 작성해 2020년 4월 재판부에 제출됐다.

2000년 4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고 최영언씨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32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그 뒤 2년간 10여 차례 인터뷰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전모를 상세히 털어놨고, 이는 다른 참전군인들이 추가 증언하는 데 봇물을 텄다. 고경태

2000년 4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고 최영언씨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32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그 뒤 2년간 10여 차례 인터뷰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전모를 상세히 털어놨고, 이는 다른 참전군인들이 추가 증언하는 데 봇물을 텄다. 고경태

그가 살아 있다면 뭐라 했을까

2월7일 국가배상 1심 판결이 나온 다음날, 아직 생존해 있는 소대장 출신 인사에게 전화했다. 팔순이 다 된 그는 잠을 잘 못 이루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의 불가피한 측면을 재판부가 간과한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는 2000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희생자들을 돕는 일에 참전군인들이 동참하는 건 참 좋은 일이자 인간 된 도리”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에도 피해자들이 오죽하면 그랬겠냐고 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데 ‘살인중대’ 닉네임이 붙는 게 억울하다고 했다.

문득 최영언 선생이 살아 있다면 재판 결과를 무어라 코멘트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 국가가 나서 배상해주는 게 당연하지”라고 했을까, “판사가 누구인지 몰라도 개떡 같은 판결”이라고 했을까. 선생의 시니컬한 성정상 개떡 같은 판결이라 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내 맘대로 장면을 상상해봤다.

“재판 결과 보셨죠?”

“승소하면 뭐 어떻게 되는 거야? 죽은 사람이 돌아와?”

“아 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슬픈 비극이었지. 운명이었던 걸 어쩌겠어. 이제 그만들 해.”

“그래도 살아남은 이들과 유족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지 않을까요?”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네.”

“선생님 덕분에 55년 만에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사람들이 잘 몰라줘도 정말 큰 역할을 하신 거예요.”

“이제 좀 그만하면 안 될까?”

“죄송하지만… 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됐어. 나도 이제 좀 쉴래.”

“선생님, 평안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글·사진 고경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저자·전 <한겨레21> 편집장*추모의 글임을 고려해 고인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최영언
△1942년 부산 출생 △부산고·한양대 졸업 △해병학교 35기 간부후보생으로 입교 △베트남 파병. 해병제2여단 1중대 1소대장, 1중대 부중대장, 1대대 인사행정관 △문화방송 입사, 스포츠제작부장과 스포츠국장 등 역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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