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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베트남에 있는 60여개 비석

등록 2023-02-17 16:04 수정 2023-03-08 06:16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한국을 처음 찾은 건 2015년 4월입니다. 또 다른 피해자 응우옌떤런과 함께 일주일간 머물렀는데, 그 과정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르포 기사가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제가 처음 쓴 기사였습니다. 응우옌티탄과 응우옌떤런의 첫 일정은 사진전 참석이었습니다. 사진전 제목은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국내 곳곳의 전쟁 기념탑과 함께 베트남 곳곳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사진을 비교해놓은 이재갑 작가의 전시였습니다. 그때 처음 ‘증오비’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베트남 꽝응아이성에 있는 한 증오비엔 이런 문구가 담겨 있습니다.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를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이 비석의 ‘제목’은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입니다. 이런 비석이 베트남 곳곳에 60여 개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처음 이 문구를 접했을 때 섬뜩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간 뒤 매우 슬퍼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23년 2월7일 대한민국 법원이 처음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2월16일엔 판결문도 공개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판결문에서 눈에 띈 건 이런 대목입니다. “국방부가 편찬한 공식기록인 <파월 한국군 전사>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은 서술임을 알 수 있다.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일부 사실을 아예 누락하거나 허위로 작성하는 등 그 당시의 상황을 은폐하고자 한 정황도 보인다.”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원고와 원고의 가족을 비롯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비무장 상태에서 이 사건 중대 소속 군인들로부터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받았고, 그렇게 총격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영유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 발생 당시 원고는 만 8세였고, 이 사건으로 가족들이 모두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해 사실상 고아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원고는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어렵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한베평화재단 등이 판결문을 베트남어로 번역해 선물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응우옌티탄이 모국어로 쓰인 판결문을 받아 읽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감격에 겨워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진실과 정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고 구현된다는 인류 보편의 믿음이 그의 곁에서도 지켜진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1450호 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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