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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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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응우옌티탄에게 ‘3천만100원’의 의미는

퐁니·퐁녓 학살 국가배상소송 승소 뒤 변호인단과 첫 만남 가진 응우옌티탄
“나만의 승리 아냐, 힘들 땐 지지해준 이들 떠올려”
등록 2023-02-23 14:36 수정 2023-03-08 15:16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 가운데 최초로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내 1심 승소한 응우옌티탄(사진)씨가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신다은 기자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 가운데 최초로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내 1심 승소한 응우옌티탄(사진)씨가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신다은 기자

응우옌티탄(63)은 아침부터 면을 삶고 닭 육수를 끓였다. 베트남 중부에서 즐겨 먹는 닭 국물요리 ‘미꽝가’를 만들기 위해서다. 2023년 2월15일, ‘귀한 손님’이 찾아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로 돼있었다. 채소를 다듬고 튀김을 만드느라 정신 없는데 밖에서 컹컹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났다. 달려나간 응우옌티탄이 “아아” 하고 크게 웃으며 문 앞에 선 한국인들을 끌어안았다. 그에게 승소 소식을 알리러 한국에서 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김남주, 박진석 변호사였다.

응우옌티탄이 직접 만든 ‘미 꽝 가’ 요리. 돼지고기 수육도 직접 만들었다. 신다은 기자

응우옌티탄이 직접 만든 ‘미 꽝 가’ 요리. 돼지고기 수육도 직접 만들었다. 신다은 기자

대한민국 정부 “가해자 베트콩이었을 수 있다”?

응우옌티탄은 1968년 2월12일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마을 주민 74명이 학살된 이른바 ‘퐁니·퐁녓 학살 사건’의 생존자다. 2020년 4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 가운데 최초로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 최근 승소했다. 2023년 2월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대한민국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이 1호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원고 가족들에게 총격을 가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며 대한민국이 응우옌티탄에게 손해배상금 3천만100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남주, 박진석 변호사는 응우옌티탄 변호인단을 대표해 소송 경과를 설명하러 이날 베트남 다낭에서 25㎞ 떨어져있는 꽝남성 응우옌티탄의 집을 찾았다. 학살을 목격한 뒤 2022년 8월 한국을 찾아 증언했던 응우옌티탄의 삼촌 응우옌득쩌이와 <한겨레21>도 이 자리에 함께 했다. 두 변호사는 1시간30분가량 재판 결과를 설명했다. 응우옌티탄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대한민국은 응우옌티탄과의 소송에서 ‘가해자가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남베트남 인민해방전선)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진술을 한 이는 1명 뿐이었고 이마저도 ‘누구에게 전해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면 6명의 참전군인은 ‘학살 가해자가 1중대’라고 지목했다. 또 대한민국은 ‘피해자가 베트콩 내지 동조세력일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비무장 상태였고 전투성과를 기록한 ‘파월한국군전사’에도 (관련 내용이) 적혀있지 않다”며 이 사건을 교전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은 재판 과정에서 응우옌티탄에게 대한민국 법 대신 이미 사라진 55년 전의 남베트남 정부 법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남베트남법 자료를 제출하지는 않았다.

응우옌티탄과 응우옌득쩌이는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민간인이었고 아무 무기도 없었다. 우릴 베트콩으로 보는 건 말이 안 된다.”(응우옌득쩌이)

김남주 변호사는 “참전국 대한민국과 미국을 통틀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 이긴 선례가 없다.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판결”이라고 말했다. 응우옌티탄은 “판결 내용을 들으며 ‘2심도 얼마든지 승소할 수 있겠다’는 아주 큰 희망이 생겼다”고 답했다. “그간의 법정 투쟁이 모두 진실로 인정받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도 덧붙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항소할 가능성에 대해 응우옌티탄은 “내가 원하는 것은 피고 대한민국이 학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 여부와 관련해선 법무부와 함께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에서 승소한 퐁니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가운데)과 학살 목격자 응우옌득쩌이(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통역사, 현지 활동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신다은 기자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에서 승소한 퐁니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가운데)과 학살 목격자 응우옌득쩌이(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통역사, 현지 활동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신다은 기자

기대와 실망이 교차했던 시간들

승소 소식을 들은 응우옌티탄은 2015년 한국 첫 방문을 떠올렸다. “그때는 참전군인들이 당연히 내게 사과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참전군인 단체는 오히려 ‘8살짜리가 뭘 아느냐’고 하더군요. 나는 (그때) 8살이었어도 다 기억하는데, 내가 원하는 건 ‘미안하다’는 한마디인데 그걸 들을 수 없다는 게 참담했습니다.”

응우옌티탄은 2015년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 가운데 최초로 평화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퐁니·퐁녓 학살을 증언하러 한국에 왔다. 이후 2018년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민간 모의법정인 ‘시민평화법정’에서 승소했고, 2019년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청와대 청원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평화법정의 판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고, 청와대 청원에 대해 국방부는 “한국군 전투 사료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이 학살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2020년 4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응우옌티탄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시작된 뒤로도 마음 고생은 이어졌다. 코로나19로 한국 방문길이 막혀 마음을 졸였고, 2022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기자회견 등 쉼없는 일정에 지치기도 했다. “법정 증언을 마치고 나니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여기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땐 자신의 말을 진실로 지지해준 이들을 떠올렸다. 2019년 베트남전 참전군인 한기중씨는 응우옌티탄 앞에 무릎 꿇고 사과했다. 퐁니·퐁녓 마을 작전에 참가했던 참전군인 류진성씨는 당시 국도변에 희생자 주검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봤다며 2022년 “당신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말해줬다. 응우옌티탄에게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사과는 감동적이었고,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위로가 됐다”. 또 2015년 한국에 갔을 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가 응우옌티탄을 꼭 안아주면서 “전쟁의 고통을 공감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포옹을 응우옌티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응우옌티탄은 자신을 도운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이 사건이 나 혼자만의 승소가 아님을 잘 안다. 나와 동행했던 모든 사람과 한국 시민사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날 응우옌티탄의 집에는 한베평화재단의 ‘평화기행단’ 소속 한국인들도 승소를 축하하러 왔다. 방문객들이 꽃과 선물을 건네자, 응우옌티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며 웃었다.

한베평화재단 ‘평화기행단’ 소속 한국인 방문객들이 응우옌티탄에게 승소 축하 선물을 건네자 응우옌티탄이 이를 보고 기뻐하고 있다. 왼쪽은 통역사 티엔씨. 신다은 기자

한베평화재단 ‘평화기행단’ 소속 한국인 방문객들이 응우옌티탄에게 승소 축하 선물을 건네자 응우옌티탄이 이를 보고 기뻐하고 있다. 왼쪽은 통역사 티엔씨. 신다은 기자

하미, 꽝응아이성 학살 사건의 진실도 규명되길

한국 법원이 대한민국 정부에 배상하라고 판결한 돈은 3천만100원이다.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은 “국가배상소송의 최소 신청 금액이 3천만원이라 거기에 100원만 더한 것”이라며 “피해자가 바라는 건 (돈이 아닌) 한국 정부의 인정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응우옌티탄 역시 “나는 (손해배상으로 받을) 돈에는 관심이 없다”며 “한국 정부의 인정과 사과를 받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응우옌티탄은 혼자만의 기쁨으로 이번 판결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한베평화재단이 추산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1만여 명에 이른다. “퐁니·퐁녓 마을 말고도 하미, 꽝응아이성 등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많은데 여전히 진실규명이 안 됐습니다. 한국 정부가 하루빨리 이 사건들을 조사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으로 희생자들이 위로받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퐁니(베트남 꽝남성)=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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