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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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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끔찍했던 악몽, 이제 깨어날 수 있을까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인정” 법원의 첫 판단까지 반세기 고통
한국 정부는 외면과 변명만…치유와 회복 위한 법적 책임 다해야
등록 2023-02-11 00:55 수정 2023-03-08 15:06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온 2023년 2월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원고 변호인단 기자회견 도중 베트남 현지에 있는 원고 응우옌티탄이 화상으로 연결됐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온 2023년 2월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원고 변호인단 기자회견 도중 베트남 현지에 있는 원고 응우옌티탄이 화상으로 연결됐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1999년 5월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구수정 당시 <한겨레21> 현지 통신원(한베평화재단 이사)이 <한겨레21>에 관련 르포를 보내온 게 시작이다. 베트남전 종전 24년 만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또 24년,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는 55년 만인 2023년 한국 정부가 학살 피해의 책임을 지고 베트남 민간인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2월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베트남인 응우옌티탄(63)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3천만100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2020년 4월 소송을 제기한 뒤 2년10개월 만에 나온 판결이다.

1968년 정월 대보름 전날의 학살극

응우옌티탄은 8살이던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마을 집에 있었다.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다낭에서 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이다. 그날은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 전날이었다. 장을 보러 나간 엄마 대신 이모가 아이들을 돌봤다. 동네 오빠도 놀러 와 있었다. 집 안에서 여섯 명의 아이가 채소 심기, 병 모으기를 하며 놀았다.

그날 퐁니·퐁녓이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최초의 총성은 오전 11시께 울렸다. 이후 점점 마을로 가까워지는 총소리에 이모와 아이들은 집 안 동굴(폭격에 대비해 파놓은 깊이 1m, 폭 4m의 공간)로 숨었다. 하지만 집으로 들이닥친 한국 군인이 이들을 발견했다. 군인은 나오지 않으면 수류탄을 던지겠다는 시늉을 했다. 이들이 동굴에서 나오자 군인은 차례로 총을 쏘았다. 응우옌티탄은 날쌔게 부엌 쪽으로 달렸지만 배에 총을 맞았다. 그대로 근처 다른 집으로 도망쳤다. 찢어진 옆구리로 삐져나온 창자를 손으로 집어넣어가며 뛰었다. 뛰다가 넘어졌고 다시 기었다.

응우옌티탄은 겨우 구조돼 수술받아서 목숨을 건졌지만 지금까지 후유증이 남아 있다. 그날 응우옌티탄의 엄마(당시 34)와 남동생(5), 언니(11), 이모(32), 이모의 아들(8개월) 등 가족 5명이 목숨을 잃었다. 15살이던 오빠는 배와 엉덩이에 총을 맞고도 살았다. 나중에 보니 5살 남동생은 총을 입에 맞아, 입이 다 날아가고 없었다. 놀러 온 동네 오빠와 언니는 동굴 앞에서 즉사했다. 이모는 집을 불태우려는 군인들을 말리다가 숨졌다. 8개월 사촌동생의 주검은 이모 옆에서 발견됐다. 당시 집에 없던 엄마마저 마을 구덩이에 무더기로 쌓여 있던 주검들 가운데 발견됐다. 대보름을 앞둔 날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다낭의 직장에서 밤늦게 돌아와 아마도 화를 면했을 것이다.

그날 퐁니·퐁녓 마을 학살에서 주민 74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총 몇 발을 쏴서 한국군을 이 마을로 불러들인 베트콩 저격범은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마을 공터와 오솔길에는 주민들의 주검이 끝없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 불타 성별도 알 수 없었다. 젖가슴이 칼로 도려내진 이도 있었다. 이날의 참상은 학살 직후 현장에 도착한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 구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찍은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1년 베트남을 찾은 고경태 당시 <한겨레21> 기자와 처음 만난 41살의 응우옌티탄. 응우옌티탄은 “집 땅굴 위에서 수류탄을 들고 나를 노려보던 그날 그 남자 때문에, 한국 남자만 봐도 심장이 뛰었다”고 증언했다. 고경태

2001년 베트남을 찾은 고경태 당시 <한겨레21> 기자와 처음 만난 41살의 응우옌티탄. 응우옌티탄은 “집 땅굴 위에서 수류탄을 들고 나를 노려보던 그날 그 남자 때문에, 한국 남자만 봐도 심장이 뛰었다”고 증언했다. 고경태

한국판 ‘밀라이 학살’… 상부엔 거짓 보고서

당시 퐁니마을 학살을 자행한 한국 해병2여단(청룡부대) 1중대 1소대장(중위)이던 최영언씨는 2000년 4월 고경태 당시 <한겨레21> 기자를 만나 “왜 쏘았을까”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알 수 없지. 어찌 생각하면 미친놈들이지. 포로도 아니고, 무장도 안 했고. 어린애와 부녀자들뿐인데. 난 이해가 안 가.”

당시 1중대는 작전 수행 중이었다. 중대엔 3개 소대와 중대본부가 속해 있었다. 1중대는 해안가의 1번 도로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저격당했다. 이들은 인근 퐁니마을을 수색했다.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만 있는 것이 확인되면 이들을 부대 뒤쪽으로 보내며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행군 땐 개인 간격이 2~3m, 한 소대만 100m가량으로 늘어진다. 학살은 1중대의 대열 어딘가에서 일어났다. 최영언씨는 대열의 가장 앞쪽에 있었다.

응우옌티탄이 겪은 이 학살 사건은 미국의 ‘주월미군 감찰보고서’를 통해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다. 1중대 장교와 하사관들이 사건 이듬해인 1969년 11월 한국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불려가 조사받기도 했다. 당시는 미군이 베트남 내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밀라이 사건’이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리처드 닉슨 정부가 수세에 몰리던 때였다. 미군도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선띤현 선미마을에서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 504명을 학살했다. 퐁니·퐁녓 마을 학살 한 달 뒤(1968년 3월16일)의 일이었다.

한국군이 저지른 퐁니·퐁녓 학살도 그때 알려졌다면 ‘한국판 밀라이’ ‘제2의 밀라이’가 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도 부담이었다. 당시 베트남전 휴전을 위해 프랑스 파리 평화회담에 참여한 북베트남 대표가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고, 외신 보도가 이어졌다.

퐁니·퐁녓 학살 2개월 뒤인 1968년 4월, 미군 해병 제3상륙전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이를 제네바협약 위반으로 보고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에게 미군의 기초 조사 자료와 함께 자체 조사 요구서를 보냈다. 두 달 뒤 채 장군이 보낸 답신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지역 베트콩들이 책임을 한국군에 돌리고 이를 주월한국군에 반대하는 악선전으로 이용하기 위해 퐁니와 퐁녓 마을에서 한국군 위장용 군복을 입고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상부의 지시로 짜맞춘 시나리오였다. 관련 보고서를 작성한 당시 해병2여단 헌병대 수사계장이던 성백우씨가 2000년 <한겨레21>에 이런 사실을 밝히고 양심선언을 했다.

제네바협약 위반한 전쟁범죄

응우옌티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이번 재판 과정에서 한국 정부를 대리한 정부법무공단의 주장은 이 답변서의 연장선에 있었다. 법무공단은 “베트콩이 한국 군인으로 위장했거나 북한 심리전 부대의 개입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국 군복을 입고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진술만으로 가해자가 한국 군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선 이를 반박하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1중대 2소대 병사이던 류진성씨는 “중대원들이 민간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살해했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베트남인 증인이자 응우옌티탄의 삼촌 응우옌득쩌이도 한국 법정을 찾아와 “학살 장면을 목격했고, 나중에 미군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 주검을 수습했다”고 말했다.

법무공단은 심지어 “만약 한국 군인들이 민간인을 살인, 상해했더라도 게릴라전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는 베트남전쟁에서는 정당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군대에 속하지 않은, 적대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민간인을 살해하는 일은 명백한 제네바협약 위반이다. 아무리 베트콩 저격수를 찾아낸다는 이유라 해도 한 마을 양민 전체를 집단으로 학살할 수 없는 일이다. 제네바협약(제1의정서 제50조)은 민간인 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에조차 일단은 민간인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한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퐁니·퐁녓 마을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한베평화재단이 2020년 8월까지 집계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최소 130건, 사망자는 무려 1만여 명에 이른다.

2014년 1월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남사의 깜하 공동묘지 내 가족무덤을 찾은 응우옌티탄. 고경태

2014년 1월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남사의 깜하 공동묘지 내 가족무덤을 찾은 응우옌티탄. 고경태

“한국 정부가 인정해야 피해자 고통 덜 것”

응우옌티탄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가운데 처음으로 2015년 한국을 다녀갔다. 또 다른 피해자 응우옌떤런과 함께였다. 두 사람이 다녀간 뒤 2016년 한베평화재단이 만들어졌다. 재단은 2018년 4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함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열었다. 이 법정의 재판부(재판장 김영란 전 대법관)는 “대한민국은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게 공식 사과하라”고 판결했다.

응우옌티탄은 2019년 다른 피해자 102명과 함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그때도 한국 정부(국방부)는 “한국군 전투 사료 등에서는 주월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냈다. 다시 1년 뒤인 2020년 4월 응우옌티탄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인정만이 피해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저를 비롯한 많은 피해자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함께 한국을 찾은 응우옌떤런은 그해 11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응우옌티탄 소송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2월7일 판결 직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금껏 그 어떤 대한민국 기구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사법부가 베트남전 당시 이같은 불법행위가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최초로 확인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응우옌티탄은 선고 직후 변호인단이 연결해준 화상통화로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그는 “제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인정해준 재판부에 감사하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해준 변호인단과 한국 친구들, 시민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며 “정말 뛸 듯이 기쁘다”고 말했다. 화상 속 응우옌티탄의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가득했다. 55년 동안 가슴속에 잡혔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을까.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참고 문헌

고경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겨레출판 펴냄,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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