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 2심 선고 공판이 열린 지난 1월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건의 원고인 응우옌티탄이 승소 소식을 들은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트남에서 일어난 수많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중 단 하나의 사건만이 대한민국 법원의 판단을 받았다. 증거가 없다시피한 통상의 학살 사건과 달리 이례적으로 주월미군 조사보고서와 현장 사진 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25년 1월17일, 한국 법원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피고 한국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 피해자 응우옌티탄(이하 ‘탄’)이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이 쏜 총에 맞고 가족을 잃은 사건이 포함된 ‘퐁니·퐁녓 학살 사건’(희생자 총 74명)에 대한 판결에서다.
‘가해자’ 한국은 이 판결을 계기로 무엇을 해야 할까 . 피해자 대리인단 소속 임재성 변호사가 2월14일 한겨레21 유튜브 ‘뉴스크림’에 출연해 2심 판결 의미와 이 판결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과제를 짚었다. 1시간 분량 인터뷰를 짧게 축약해 싣는다. (베트남전 퐁니 학살 사건 2심 승소, ‘가해를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한겨레21 유튜브 채널 ‘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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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25년 역사 담긴 판결
—2심 판결을 ‘기념비적인 판결’(2월6일치 한겨레신문 ‘세상읽기’ 칼럼)이라 평했다.
“우리 사회의 25년이 담겨 있는 판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1999년 한겨레21의 ‘아, 몸소리 쳐지는 한국군!’ 기사로 시작한 우리 사회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과 그 이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사회 운동 역사가 있다. 그 기간 언론인, 학자, 활동가, 법률가들이 축적한 피해자 증언 자료와 참전 군인 인터뷰 등이 재판에 증거로 제출돼 빠짐없이 판결문에 담겼다.
두 번째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다룬 국 가 폭력 청산의 역사다. 아무리 전쟁 시기라도 군인이 비무장 민간인에게 어떠한 태도와 원칙을 세워야 되고 그게 위반됐을 때 국가가 어떻게 책임져야 되는지, 국가폭력에 관한 소멸시효 항변이 어떻게 제한되어야 하는지 가 (판례 등으로) 쌓였다. 한 운동의 25년과 한국 사회 과거사 정리의 25년이 이 판결문에 담겼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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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대리인단 소속 임재성 변호사가 2월14일 한겨레21 유튜브 ‘뉴스크림’에 출연해 2심 판결 의미와 이 판결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과제를 짚었다. 뉴스크림 갈무리
—소송 직후 연결된 화상 인터뷰에서 탄님이 많이 울었다.
“탄 아주머니는 졌을 때와 이겼을 때의 원고를 각각 준비했다. (이겼으니) 승소한 버전을 읽었는데 그 뒤 다른 사람들 한마디씩 할 때 계속 울더라. 본인 발언이 끝나니 그제서야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온 게 아닌가 싶다. 1968년 총상을 입은 후 전쟁 고아로 살아왔던 시간들, 2000년대 초반 한겨레 기자들이 퐁니 마을에 갔을 때 자신의 복부를 보여주면서 ‘나도 이야기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순간, 2017년 변호사들이 ‘혹시 소송 한번 해 보시면 어떠냐’고 이야기했을 때 주저하시고 고민하셨던 순간들, 2023년 1심 판결 등이 주마등같이 스쳐가지 않았을까 싶다.”

2001년 3월의 어느 날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현 디엔반시사) 디엔안사 퐁니 마을의 한 집에서 1968년 2월12일 한국군에 의해 총격을 당한 사실을 증언하던 응우옌티탄의 모습.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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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소행’이라면서 진상조사 안 해
—2심 판결에서 눈여겨 본 부분은.
“2심 때는 피고 대한민국의 거짓말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학살이) 한국 군복을 입은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피고 대한민국의 거짓말이다. 즉 베트남 사람들이 북한군과 한국군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냐, 이건 북한군 소행이라는 식이다.
1심에선 이를(피고 쪽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근데 항소심에선 ‘너희들(한국 정부) 논리가 맞다고 쳐 보자 . 그러면 너희들은 왜 그것을 입증할 조사를 안 했냐’고 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당시 한국군의 잔혹 행위로 인해 주월 미군도 여러 외교 문제 , 군 사기 문제 , 남베트남 정부와의 갈등 문제를 제기하는데 왜 너희들이 (당시에 ) 조사로 입증하지 않았냐는 거다. 그런 정보가 있었다면 자원과 인력을 들여 조사해서 북한군 소행이라는 대대적인 프로파간다를 했을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2심 소송에서 한국 정부는 학살을 부인하는 다양한 전술을 펼쳤다. 학살 가해자가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혹은 북한군일 가능성을 제기하거나, ‘한국군은 평소 남베트남 주민을 적극 보호했다’는 식이다. 모두 증거 부족으로 기각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만일 북한군 소행이라면 한국군이 적극 소명했을 텐데 조사한 흔적이 없고 △(피해자인) 퐁니 마을 주민이 같은 민족(베트콩)도 주월미군도 아닌 공격자를 간파하는 일이 어렵지 않으며 △한국군이 주민을 실제로 보호했다면 주민 이송·인계 기록이 있을텐데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즉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견줘 정부 주장의 신빙성은 크게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채명신의 ‘양민 보호’, 실제 기록이 없다
—한국군이 주민들을 보호했다면서도 구체적으로 이를 증명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채명신 장군의 슬로건을 굉장히 여러 번 주장했다. 이는 우리의 베트남전 파병 기억에서 중요한 덩어리를 차지한다. 용산 전쟁기념관 4층 해외 파병실에도 그 글귀가 커다랗게 써 있다. 그런데 소송 중 (피고한테서) 많이 듣는 또 다른 얘기는 ‘ 전쟁 중에 (학살이) 불가피했다’는 거다. 게릴라전의 특수성상 어떻게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냐는 거다.
이 둘은 말 그대로 모순이다. 전쟁 중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왜 한 명의 양민을 보호했다는 멋들어진 얘기를 하는거냐. (그 말이) ‘슬로건’으로 있었다는 사실 말고 과연 현장에서 작전의 원칙으로 수행됐냐는 거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면서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려면 통상적인 작전 규범으론 절대 안 된다. 엄청난 방식의 국제인도법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되고 작전에서도 이 사람이 비무장 양민인지 아닌지 판단 기준에 대한 교육과 구체적인 작전 지침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증거로) 제출이 안 됐다. 그래놓고 ‘우리의 채명신 장군께서 이렇게 말했다’고만 얘기하는 건 법률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고 재판부가 판단한 것이다.”
—2000년 한겨레21에 군의 진상 은폐를 제보했다가 2024년 피고 대한민국 요청으로 진술을 뒤집은 사람(성아무개 헌병대 수사계장)도 있었다.
“ 피고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진상을 은폐했다면 소멸시효를 주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피고 대한민국이) 항소심에서 판결을 뒤집으려면 어떻게든 그 수사계장의 진술을 깨야 했다. 소송 막바지에 ‘사실 확인서’가 들어왔다. ‘(24년 전 기사가) 기자의 추론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걸 다시 깨기 위해 기사를 쓴 황상철 기자를 만나 당사자의 적극적 협조 속에서 기사가 작성됐고 보도 이후 어떠한 반론·정정·항의가 없었음을 정리해 제출했다. 거기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 사실 확인서를 쓰면서 수사계장께서 어떠한 압박과 고뇌가 있었을지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슬프다. 2024년의 사실 확인서 때문에 2000년에 용기 냈던 수사계장의 용기와 증언이 빛바래지 않길 바란다.’”

2000년 당시 작성된 한겨레21 제306호 표지이야기 갈무리.
재판부는 수사계장이 뒤집은 진술에 신뢰성이 없으며, “피고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문에 썼다. 나아가 이런 행위는 “ 공격의 진상을 의도적으로 은폐한 행위이자 소송상의 신의를 어기고 원고의 피고에 대한 배상 청구권 행사의 장애를 초래·강화한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가해자의 자리’ 만드는 판결
—퐁니 학살은 증거가 많지만 다른 학살 사건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어떤 조처를 해야 할까.
“ 대법원 판단까지 손 놓고 기다리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 최소한 1·2심에서 동일한 국가 책임이 인정됐다면 한국 정부가 공적 조사를 해야 한다. 지금 한국 정부는 아무런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이 갖고 있는 기록과 미군의 서류로 된 증거들, 참전 군인과 베트남 피해자들 인터뷰를 아카이빙해야 한다.”
—이 판결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이 판결은 ‘ 가해자의 자리’를 만드는 판결이다. ‘명령을 따랐다’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다. 지금 탄핵 심판에서도 그런 얘기 많이 하지 않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시켜서 했습니다.’ 그 사람은 개인이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다. 그냥 도구다. 그래서 도구는 책임을 질 생각도 안 한다. 반면 가해자의 자리란 ‘내가 했어’를 인정하는 거다. 내가 했음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사람들만이 다시 하지 않을 수 있다. 총구를 ‘ 내가 당겼다 ’ 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총구에서 손가락을 뺄 수 있다. 이 판결문을 공무원과 군인들이 교육 자료로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인정하고 가해자의 자리에 서는 순간 그때는 개인이 되고 주체가 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 판결을 군인들이 인도법, 인권법의 중요한 사례로 공부하고 기억·기록했으면 좋겠다.”
정리=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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