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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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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초콜릿 주던 ‘얼룩무늬’ 군인이 어느날 총질을…

베트남 꽝남성 하미에서 만난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본
135명 학살 사건은 진실화해위로, 퐁니·퐁녓처럼 진상 규명될까
등록 2023-02-23 14:49 수정 2023-04-19 17:07
하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본씨가 2023년 2월14일 베트남 하미마을 자신의 집에서 학살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감정을 정리하고 있다. 신다은 기자

하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본씨가 2023년 2월14일 베트남 하미마을 자신의 집에서 학살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감정을 정리하고 있다. 신다은 기자

‘그날’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1968년 1월24일(음력) 당시 여섯 살 응우옌티본은 어머니와 언니, 여동생과 방 안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 위로 ‘바바바바’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밥상 위에 대나무 조각이 툭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지붕이 불에 타고 있었다. 문밖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이 서 있었다. 그가 집에 불을 지른 듯했다.

나를 안고 있던 어머니가 내 쪽으로 엎어져

“그 사람은 미국군과는 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뭐라 말했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62살 응우옌티본이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군인이 응우옌티본과 가족을 향해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이들은 집 밖에 나오자마자 할아버지 집 쪽으로 뜀박질했다. 그곳에도 군인이 있었다. 군인들은 마을 주민을 세 군데로 나눠 모이게 했다. 앞줄에 앉은 군인이 “큰 소리로 발표했다”. 통역사가 무슨 말을 전달하는 듯했지만 응우옌티본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발표가 끝나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군인이 신호를 주듯 팔을 휙 휘저었다. 그 순간 마을 주민들이 서 있는 방향으로 총소리가 ‘다다다다’ 울려퍼졌다.

“어머니는 나를 보호하려 안고 있었는데 총을 맞고 나서 내 쪽으로 엎어졌어요. 언니도 내 동생을 안고 있다가 총에 맞았고요. 세 살 여동생은 너무 놀라서 막 울었어요.”

여동생의 울음소리가 커지자 멀리서 수류탄이 날아왔다. ‘쾅’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군인들이 떠나자 살아남은 친척들이 달려왔다. 오빠는 이미 숨진 뒤였다. 응우옌티본도 머리에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여동생은 턱이 함몰됐다. 친척의 도움을 받아 다낭의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 그날 응우옌티본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다.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즈엉사 하미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날 민간인 135명(하미마을 위령비 기준)이 군인에게 사살됐다. 응우옌티본은 어머니와 언니, 오빠를 잃었다. 멀리 피해 있었던 아버지와 여동생,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생존자’ 응우옌티본은 그날 민간인을 죽인 군인이 “한국군”이라고 말한다. “한국군은 미군보다 키가 작고, 코도 미군처럼 높지 않다. 피부색이 조금 더 까무잡잡하고 생김새도 더 착한 모습이었다. 미군 군복은 얼룩무늬가 없는데 한국 군복은 있다.” 2023년 2월12일 베트남 다낭 하미마을에서 만난 응우옌티본이 말했다.

응우옌티본은 하미마을 학살 유가족, 생존자 4명과 함께 2022년 4월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하미마을 학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 2023년 2월7일 서울중앙지법이 퐁니·퐁녓 마을에서 일어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최초로 인정한 것을 계기로, 하미마을 등 다른 지역의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하미 학살로 135명이 숨진 사실을 기록한 하미 위령비 앞에서 하미 마을 주민이 향을 피우러 다가가고 있다. 신다은기자

하미 학살로 135명이 숨진 사실을 기록한 하미 위령비 앞에서 하미 마을 주민이 향을 피우러 다가가고 있다. 신다은기자

“식량을 갖다줬기 때문에 한국군 금방 알아봐”

응우옌티본과 마찬가지로 하미마을의 다른 생존자들도 1968년 학살 사건의 가해자가 한국군이었다고 지목한다. 하미마을 응우옌티탄(66)은 이렇게 증언했다. “한국군은 ‘얼굴이 동그랗고 쌍꺼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날 방공호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수류탄이 날아왔다. (방공호) 안이 아수라장이 되고 핏물로 뒤범벅됐다.” 87살로 생을 마감한 팜티호아는 생전 증언에서 “한국군이 종종 (마을에) 식량을 가져다줘서 (한국군인지) 금방 알아봤다. 그런데 (그날) 장교의 손짓을 신호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내 쪽으로 날아오는 수류탄을 보고 아이들 몸을 감싸며 땅 위에 바싹 엎드렸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지목한 날짜에 한국군이 하미마을 근처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는 사실은 국군이 기록한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국방부가 편찬한 베트남전 전투기록 <파월 한국군 전사> 4권을 보면 1968년 2월22일(음력 1월24일) 공병부대가 “Ha My Tay(하 미 떠이·하미 서쪽) 마을 인근에서 대전차 지뢰 2개를 제거했다” “근무 중대가 하 미 떠이 마을 도로 근처에서 적군 6명을 사살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같은 날 한국군 해병대 청룡부대 제2여단 5대대 26중대가 “청룡도로 남쪽을 전진하면서 61번~65번의 6개 목표를 점령, 탐색했다”고도 적혀 있는데, 지도에 그려진 지점의 61번과 62번은 하미마을이 위치한 곳이다.


당시 청룡도로 인근에 주둔하던 청룡부대 제2여단 병사들이 하미마을에 자주 방문했다고 생존자들은 기억한다. “(하미마을) 가까이 사는 한국군이 초콜릿 등을 주곤 해서 그날(음력 1968년 1월24일)도 경계하지 않았다.”(응우옌티탄) “학살 사건이 있기 전에는 한국군이 마을에 찾아와 쌀, 초콜릿, 과자 등을 줘서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좋았다. 내 오빠와 친한 한국군도 있었는데 학살 당일 오빠에게 ‘도망치라’고 미리 알려줘 목숨을 구했다.”(응우옌티홍)

이렇게 평소 하미마을에 우호적이던 한국군이 돌연 집단학살을 자행한 배경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공병부대 등이 2월21일~22일 청룡도로 인근에서 지뢰와 부비트랩을 잇달아 발견했다는 <파월 한국군 전사> 기록으로 미뤄보아, 군이 지뢰를 설치한 주체를 하미마을 주민으로 의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미마을 응우옌티탄의 변호인단은 2018년 한국에서 열린 시민평화법정에서 “해병 제2여단이 청룡도로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적의 은거지를 청룡도로 동쪽 지역인 하미마을로 판단하고 도로 보호와 여단 본부 방어를 위해 공격을 계획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하미 학살로 숨진 135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하미 학살 55주기 위령제’에서 한 하미 마을 출신 작가가 쓴 추모시를 하미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읽고 있다. 희생자들 이름을 부르며 ‘너희가 보고 싶다’고 쓰인 시에 주민들은 눈물을 훔쳤다. 신다은 기자

하미 학살로 숨진 135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하미 학살 55주기 위령제’에서 한 하미 마을 출신 작가가 쓴 추모시를 하미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읽고 있다. 희생자들 이름을 부르며 ‘너희가 보고 싶다’고 쓰인 시에 주민들은 눈물을 훔쳤다. 신다은 기자

135명 희생자 중 59명이 10살 미만

퐁니·퐁녓 마을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재판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설사 민간인을 살상했더라도 민간인과 베트콩을 구분하기 어려운 게릴라전 특성상 정당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미마을 학살 희생자 135명 가운데 59명은 10살 미만 어린이였다. 절반이 넘는 98명은 여성이었다. “학살 당시 제가 11살이었고 또래 어린이도 많았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베트콩으로 오해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고 정말 화가 난다.”(응우옌티탄)

하미마을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의 진상은 이미 일부 밝혀졌다. 2000년 베트남 지역 행정청인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는 하미마을 학살 사건을 자체 조사해 보고서를 펴냈다. 이때 희생자 명단까지 함께 발표했다. 2001년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모임인 ‘월남전 참전 전우복지회’는 위령비를 건립하라며 하미마을에 돈을 보내기도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위령비를 2011년 꽝남성은 역사문화유적지로 지정했다.

하미마을 학살 사건과 관련해 2018년 한국에서 열린 민간 모의법정인 ‘시민평화법정’ 재판장을 맡은 김영란 전 대법관은 구두 판결문에서 “피해자들의 진술 영상을 보면 한국 군인들이 마을로 찾아와 여러 곳에 (주민들을) 모아놓은 뒤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는 점을 상당히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모의법정에는 하미마을과 퐁니마을의 두 응우옌티탄이 원고로 참가했다. 재판부는 하미마을 인근에 당시 한국군 해병대 청룡부대 제2여단이 주둔했고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이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해, 피고인 대한민국이 원고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책임을 공식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미 학살 사건 55주기 위령제가 열린 1월24일(음력) 하미 마을 주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신다은 기자

하미 학살 사건 55주기 위령제가 열린 1월24일(음력) 하미 마을 주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신다은 기자

하지만 시민평화법정의 판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2023년 2월7일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내려진 퐁니·퐁녓 마을과 달리, 하미마을 사건에는 당시 참전했던 한국군의 진술이나 미군 내부 조사보고서 등이 없어 손해배상 소송을 내더라도 승소하기 어려운 한계도 있다. 하미마을 생존자를 포함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2019년 청와대에 청원서를 보냈을 때, 국방부는 “한국군 전투 사료 등에서는 주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이 학살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이에 하미마을 생존자들은 2022년 4월 진실화해위에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신청서를 냈다. 진실화해위가 조사를 개시하면 법에 보장된 공공기록물 열람, 생존자와 참전군인 면담, 유해 발굴 등 폭넓게 조사할 길이 열린다.

“진실화해위가 법원보다 못해서야 되겠냐”

진실화해위는 10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해당 사건을 조사할지조차 판단하지 않은 상태다. 여야 상임위원 네 명이 반으로 갈려 격론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12월엔 야당과 5·18 단체들이 ‘부적절한 인사’라며 해임을 요구할 정도로 극우 편향적 태도를 지닌 김광동 상임위원이 신임 위원장이 됐다.

다만 대한민국의 퐁니 학살 책임을 인정한 1심 판결 이후 달라진 분위기도 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1심 판결 이후 진실화해위도 해당 사건 조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가 법원 판결보다 못해서야 되겠냐’는 내부 기류도 있다고 한다. 2기 진실화해위원은 조사 결론을 내지 못한 채 2월18일로 임기를 마치지만 사건 조사 여부를 판단하는 담당 조사관은 그대로 유지된다. 담당 조사관의 검토의견과 최근의 승소 판결에 따라 새 위원들이 이전과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미마을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어느새 60·70대 노인이 됐다. 2013년 87살의 팜티호아가 세상을 떠나는 등 생존자들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 유가족인 응우옌꼬이(79)는 난청이 심해져 증언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됐다. “다 죽고 남은 사람이 거의 없는데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더 증명할 수 있겠어요. 적어도 한국 정부가 우리를 만나러 와서 이야기를 들어줘야지요. 그러면 우리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학살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응우옌럽(72)이 말했다. 이들의 바람은 하나뿐이다. “생이 끝나기 전에 하루빨리 한국 정부가 진상조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미(베트남 꽝남성)=글·사진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 하미 학살 사건의 정확한 발생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현재 1968년1월24일(음력)을 기준으로 매년1월24일에 하미 마을 유족들이 집단 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나, 실제 학살일은 그로부터 이틀 뒤인 1968년1월26일이라는 증언도 있다. 참전군인의 진술을 확보해 교차검증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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