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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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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속 ‘총상 입은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네

55년 전 베트남 민간인 학살한 한국군 1중대의 동선 따라가보니, 주민 증언과 현장 일치
등록 2023-02-24 23:01 수정 2023-03-08 15:16
1968년 2월12일 1중대가 작전했던 1번 국도를 따라 김남주 변호사(맨 오른쪽)가 걸어가는 모습. 박진석 변호사 제공

1968년 2월12일 1중대가 작전했던 1번 국도를 따라 김남주 변호사(맨 오른쪽)가 걸어가는 모습. 박진석 변호사 제공

1968년 2월12일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63)이 퐁니·퐁녓 마을에서 한국군에게 총을 맞고 가족을 잃은 날이다. 탄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7일에야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에서 승소했다. 소송 대리를 맡은 나와 김남주 변호사는 베트남에 사는 탄에게 직접 판결 선고 내용을 설명하러 베트남 다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집에 방문하기로 한 날짜가 55년 전 사건이 일어난 2월12일 이었다.

김 변호사와 나는 1번 국도를 가다 퐁니·퐁녓 마을에 진입해 민간인 74명을 사살한 한국 해병2여단(청룡부대) 1중대의 1968년 그날 동선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재판 과정에서 말과 글로만 접한 내용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중대 작전 시간인 2월12일 아침 8시에 맞춰 1중대 기지가 있던 꽝남성 디엔반현청에서 출발했다. 출발한 지 10분도 안 돼 1번 국도를 만났다. 1중대가 그랬듯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1번 국도를 따라 쭉 걸었다. 55년 세월이 흘러 1번 국도 주변은 상가와 집이 빼곡히 들어섰다. 일요일 이른 아침인데도 1번 국도에는 수많은 차와 오토바이가 오갔다.

1중대 동선을 따라 출발하기 전 디엔반현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박진석 변호사(왼쪽·필자)와 김남주 변호사. 김남주 변호사 제공

1중대 동선을 따라 출발하기 전 디엔반현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박진석 변호사(왼쪽·필자)와 김남주 변호사. 김남주 변호사 제공

주검을 가마니로 덮고 통곡하던 그 길은

우리는 1번 국도변의 CAP D-2 초소가 있던 곳을 향해 걸었다. CAP D-2 초소는 미 해병대-남베트남 민병대 연합소대(CAP)에서 만든 초소로, 목격자들이 학살 사건을 지켜본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 학살 장면을 망원경으로 지켜봤고, 한국군이 떠난 뒤 미군과 함께 마을로 달려가 친척들 주검을 수습했다. 과연 CAP D-2 초소에서 마을이 다 보일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도중에 1번 국도변에서 작은 사당을 마주쳤다. 통역으로 동행한 대학생이 우리에게 ‘퐁니 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라고 설명해줬다. 이 작은 사당이 있는 곳은 퐁니마을 사건 다음날인 1968년 2월13일 오전, 퐁니마을 주민들이 1중대에 항의하기 위해 전날 살해당한 주검을 늘어놓은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1중대의 2소대장이던 이상우씨는 2000년 5월4일 <한겨레21> 인터뷰에서 “1968년 2월13일 1번 국도를 정찰할 때 주민들이 퐁니마을편 도로변에 주검들을 가마니 등으로 덮어놓고 통곡하면서 원망스러운 눈길로 자신들을 쳐다봤다”고 증언했다. 당시 2소대원이던 참전군인 류진성씨도 탄의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해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바로 그 장소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퐁니마을 주민들이 주검을 늘어놓고 항의했다는 자리에 들어선 사당 모습. 김남주 변호사 제공

퐁니마을 주민들이 주검을 늘어놓고 항의했다는 자리에 들어선 사당 모습. 김남주 변호사 제공

날이 너무 더워 잠시 탄의 집에 들렀다. 탄은 우리를 위한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가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우리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김남주 변호사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지만 날 봤을 땐 잠시 주춤거렸다. 그래도 나를 가볍게 포옹하면서 “수고했다”고 말했다.

탄이 나를 어색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2018년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 관련 민간 모의법정인 ‘시민평화법정’에서 피고 대한민국을 대리해 ‘퐁니 학살 사건은 한국군으로 변장한 베트콩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주어진 입장에 충실한 것이었으나, 그 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탄은 내가 변론하는 동안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원고 소송대리인들이 탄에게 ‘저 사람도 탄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이고 (모의법정에서) 주어진 역할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라고 설명했지만, 탄은 그 뒤로도 나를 만날 때면 데면데면해했다. 아무래도 시민평화법정 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픔 간직한 야유나무는 세월 흘러도 그자리에

탄이 3년 동안 진행된 실제 소송을 지켜보지 않은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소송대리인이 주장한 내용은 시민평화법정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그 얘기를 다 들었다면 다시 한번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을 것이다. 가해자가 소송 변론을 지나치게 하면 학살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에게 또 다른 가해가 될 수 있다.

박진석 변호사(오른쪽 앞줄)와 김남주 변호사(오른쪽 뒷줄)가 2023년 2월12일 응우옌티탄(가운데 탁자에 앉은 이) 집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응우옌티탄의 삼촌인 응우옌득쩌이(맨 왼쪽)도 동석했다. 탁자에 콜라가 놓여 있다. 김남주 변호사 제공

박진석 변호사(오른쪽 앞줄)와 김남주 변호사(오른쪽 뒷줄)가 2023년 2월12일 응우옌티탄(가운데 탁자에 앉은 이) 집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응우옌티탄의 삼촌인 응우옌득쩌이(맨 왼쪽)도 동석했다. 탁자에 콜라가 놓여 있다. 김남주 변호사 제공

탄이 주는 콜라와 얼음을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답사를 시작했다. 그 의 삼촌인 응우옌득쩌이도 동행했다. 쩌이 는 55년 전 그날 1번 국도에서 퐁니마을 학살을 직접 지켜본 이다 . 그는 국가배상소송에서도 법정에 출석해 목격한 것을 증언했다 .

쩌이와 함께 1차 목적지인 CAP D-2 초소에 도착했다. 가정집으로 변한 그곳 에 집주인의 양해를 얻어 2층으로 올라가봤다. 당시 CAP D-2 초소보다 낮았지만 학살 장소 부근에 있던 야유나무 가 잘 보였고 그곳까지 육안으로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거리였다. 55년 전 그날 남베트남 연합소대원들은 바로 이곳에서 퐁니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했다.

55년 전 그날 쩌이도 1번 국도변 하수구 주변에서 학살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한국 군인이 마을 주민을 사살하고 있다’는 무전을 듣고 퐁니마을로 달려왔다가 학살 장면을 보았다. 그와 함께 가보니 CAP D-2 초소와 아주 가까운 곳에 하수구가 그대로 있었다. 55년 전 그날 퐁니마을 사람들이 사살될 때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지켜만 봐야 했던 쩌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8살 소녀와 오빠가 대피한 ‘물소가 있던 집’

쩌이의 집이 있던 동네도 1번 국도에서 가까웠다. 집이 있던 지점에서 1번 국도를 바라보니 300~400m 직선거리에서 1번 국도를 오가는 차와 오토바이가 육안으로 잘 보였다. 야유나무 옆 민간인 학살 위령비 앞에서 참배하는 사람들 모습도 잘 보였다. 55년 전 1번 국도에서 육안과 망원경으로 퐁니마을에서 1중대가 마을 주민을 공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던 연합소대원들과 쩌이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퐁니마을 학살 목격자 응우옌득쩌이(맨 왼쪽)가 통역을 맡은 대학생(가운데)과 박진석 변호사(맨 오른쪽)에게 자신이 학살을 지켜봤던 1번 국도변 인근의 하수구를 보여주고 있다. 김남주 변호사 제공

퐁니마을 학살 목격자 응우옌득쩌이(맨 왼쪽)가 통역을 맡은 대학생(가운데)과 박진석 변호사(맨 오른쪽)에게 자신이 학살을 지켜봤던 1번 국도변 인근의 하수구를 보여주고 있다. 김남주 변호사 제공

응우옌득쩌이가 학살 장면을 지켜봤다는 1번 국도변 인근에 있는 하수구. 박진석 변호사 제공

응우옌득쩌이가 학살 장면을 지켜봤다는 1번 국도변 인근에 있는 하수구. 박진석 변호사 제공

쩌이 동네 근처에 있는 탄의 옛날 집도 가봤다.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집주인의 허락을 얻어 집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탄이 어릴 적 살던 집은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당시 가족이 대피한 방공호가 있던 위치도 확인했다. 직접 와서 보니 이렇게 좁은 곳에서 방공호에 숨었다고 한들 쉽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5년 전 그날 군인들은 방공호에 숨은 탄과 가족을 밖으로 끌어내 사살했다. 탄의 언니와 남동생, 이모, 이종사촌이 다 숨지고 탄과 오빠만 총상을 입고 살아남았다. 탄의 어머니도 다른 곳에서 군인들에게 총격을 당해 숨졌다.

집이 있던 곳을 나와 55년 전 그날 학살에서 살아남은 탄과 오빠가 대피했던 ‘물소가 있던 집’까지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 그날 그들은 총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물소를 키우는 이웃집으로 힘겹게 가고 있었다.

물소가 있던 집은 논으로 변해 있었다. 탄의 집에서 걸어 100~200m 정도 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55년 전 그날 살아남은 탄은 옆구리에 총상을 입어서 쏟아져 나오려는 내장을 꾹 누르고 그 집으로 걸어갔다. 당시 탄은 8살이었다. 8살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짐작한다고 알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탄은 큰 부상을 입고 다낭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 뒤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라 퐁니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낭에 있는 쩌이의 집에 잠시 살다가 식모 등을 하며 다른 집을 전전했다. 탄은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야 퐁니마을로 돌아와 살 수 있었다.

응우옌득쩌이의 동네에서 보이는 퐁니마을의 풍경. 김남주 변호사 제공

응우옌득쩌이의 동네에서 보이는 퐁니마을의 풍경. 김남주 변호사 제공

55년 전 그날 가장 많은 주검이 발견됐다는 곳에도 가봤다. 탄의 집이 있던 곳에서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집이 있었지만 사람이 안 산 지 오래된 듯했다. 그곳에서 연합소대원이 찍은 사진들과 비교해가며 주검들이 있었을 곳을 추정해봤다. 쩌이는 퐁녓마을에서 끌려와 사살당한 주검들이 그곳에서 발견됐다고 설명해줬다. 소송과 관련해 중요한 장소였지만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말과 글로 접한 이야기가 온전히 이해됐다

퐁녓마을로 향하기 전, 쩌이와 통역 대학생과 헤어지고 1중대가 방어선을 구축한 수오이꼬까 강변까지 걸어가보는 일만 남았다. 이미 정오가 지났고 30도 가까운 무더위에 땡볕 아래 걷다보니 땀이 줄줄 흘렀다. 한참을 걸어 강변에 다다랐지만 농작물이 빼곡히 심겨 강 바로 앞까지 가볼 수는 없었다. 구글지도와 당시 군사지도를 비교해 보니 안타깝게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1중대가 구축한 방어선보다 남쪽인 듯했다. 북쪽으로 걸어가볼까 했지만 그럴 힘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55년 전 그날의 1중대 동선을 따라 걷는 답사는 마무리됐다. 직접 걸으며 현장을 살펴보니 말로 듣고 글로만 읽었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생존자와 목격자들의 증언이 사실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퐁니마을 학살을 사실로 인정한 1심 판결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보여줬다. 그런 용기가 항소심에서도 계속되기를 바라본다.

박진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베트남 퐁니 학살 사건 소송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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