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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나요

등록 2022-11-12 15:12 수정 2022-12-09 08:27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이태원 참사’가 있었던 주말이 지나고,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출근을 했다. 다만 더 자주 안부를 묻고 소식을 공유하려 했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은 그냥 보내고, 계단에서 오가는 방향을 맞춰 걸으면서. 뉴스를 너무 의식하지도 가벼이 지나치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 어떤 시스템과 약속이 있었는지 잊지 않고, 더 깊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일상을 다독여간 것이다.

그 주에 나는 한국을 방문한 작가 모나 숄레 초청 좌담에 다녀왔다.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시작한 좌담은 <지금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있나요?>라는 책을 다뤘다. 모나 숄레는 이 책에 “도시는 무엇보다 그 구성원들이 옆에서 잠들 만큼 서로 충분히 믿으며, 함께 각자의 잠을 지켜주기로 약속한 하나의 공동체”라고 적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눈뜨면 간밤의 사고 소식에 심장을 부여잡거나, 잠들기 전 접한 사고 소식에 잠을 설치는 일이 늘다보니, 잠을 지켜주는 공동체라는 말이 꿈처럼 와닿았다.

잠을 지켜주는 공동체

국민의 생존과 생활, 안전을 담보로 추구하는 ‘경영효율화’가 앗아갈 우리의 잠과 꿈을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나는 아직도 왜 대통령실을 이전해야 하고, 거기에 그토록 많은 돈을 쓰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복지예산을 삭감하고 공공인력을 감축하는 것도, 행정력을 낭비하고 공권력을 남용하는 것도. 새로운 대통령실 관할 구역이 된 용산서 교통과의 2·3분기 초과근무 1만 시간 폭증은 단적인 예일 뿐이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취임날에 맞춰 전국 여러 곳에서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제목으로 상영회를 열었다. 친구들과 함께 미국의 혁명가 그레이스 리 보그스(1915~2015)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자막을 번역해 틀었다. 중국 이민자의 딸인 그레이스는 80년 가까이 디트로이트를 기반으로 광범위한 흑인 권력 운동과 정치활동을 조직해온 철학자, 활동가, 교육자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손에 쥐고 입에 굴려봐야 이 시기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100살을 일기로 숨질 때까지 평생 혁명을 고민한 여성의 불온한 사고방식을 참고하고 싶었다.

다양한 세대의 친구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 유머를 나누는 그레이스가 누구를 만나든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렇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나요?”(What time is it on the clock of the world?) 한 사람에게 몇십 년 동안 같은 질문을 거듭 던지면서, 변화하는 답변 속에 그가 어떻게 자라나는지 다정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봤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내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다. 요즘 무엇에서 시대 감각을 느끼냐고. 글쎄…, 기후 시위? 뉴진스? 고수 많이 넣은 마라탕?

새로운 꿈을 상상할 때

100여 년 전의 불안한 정세와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요즘의 시간 감각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그러나 치열하게 시대를 감각할 이유를 되새기고자 영화 속 그레이스의 말을 다시 꺼내본다. 끝내 좋은 것을 상상하고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나이가 드니까 시간을 세기 단위로 감각하게 돼. 그렇게 보니 우리가 지금 중요한 변곡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해. 반발하고 싶겠지. 하지만 단순한 반발에서 더 나아가야 해. 그냥 화내고 분노하고 격분하는 게 혁명을 만들어내진 않아. 우리는 사회의 많은 제도를 다시 발명해야 해. 새로운 꿈을 꿀 시기가 됐고, 그게 바로 혁명가가 하는 일이지. 다음번 미국 혁명이 어떤 모습일지 나는 모르지. 그렇지만 네 상상력이 충분하다면 그걸 상상해낼 수 있을 거야.” -<아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에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2013)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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