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걷고 싶을 때 내가 즐겨 찾던 곳은 사계리 해안에서 형제섬을 바라보면서 한반도 최남단 산인 송악산에 올라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를 조망하고 모슬포 알뜨르 들판으로 내려오는 해안길이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언급한 이 길은, 제주올레 10코스로 더 익숙하다. 집마다 한두 권은 책장에 꽂혀 있다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 시리즈의 일곱 번째 답사지는 제주다. 2010년대 초에 출간됐으나, 나는 며칠 전에야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서문도 건너뛰고 사계리 부분부터 읽었다. 사계해변에 머물던 참이었다. 색이 고운 바다가 좋아 그곳에 숙소를 잡았다. 며칠 있었다고 “해안길 파도 소리는 참으로 청량하다”는 문장을 보며 끄덕인다.
그러나 그와 나는 같은 장소에 있지 않다. 10여 년 세월의 틈새로 정경이 변했다. “20년 전만 해도 제주의 들판은 관광지 풍광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살 내음이 있었다.” 10여 년 전 목격자도 이런 말을 하는데, 지금의 제주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괜한 시샘이 나지만 괜찮다. 그는 보지 못했지만, 2024년 제주에서 내가 보았던 풍광이 있으니까.
사계해변을 따라 걷다보면 나지막한 산을 마주하게 된다. 4천여 년 전 화산 폭발로 생겨났다는 송악산이다. 송악산 서쪽으론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옛 일본군 군사기지였던 알뜨르 비행장 자리. 활주로로 쓰인 들판이 푸릇하다만 군데군데 격납고, 탄약 저장소, 고사포 진지가 보인다. 격납고는 작은 전투기 한 대가 들어갈 만한 아치형 공간으로, 멀리서 보면 봉긋한 것이 낮은 언덕으로 보일 만하다. 12월13일이면 격납고 앞에 사람들이 모인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일본군은 중국 난징을 공습해 30만여 명을 살상했다. 난징대학살이라 불릴 사건이 시작된 날이 1937년 12월13일. 매년 이날에 맞춰 제주 사람들은 추모제를 연다. 2024년으로 11년째다. 그런데 난징도, 일본 오무라도 아닌 왜 제주에서 추모제를 여는가.
알뜨르 비행장은 난징으로 가는 전투기의 중간 착륙장이었다. 난징을 공습한 폭격기가 제주로 와 연료를 채워 일본으로 돌아갔다. 때로 이곳에서 포탄을 싣고 난징으로 날아갔다. 비행장을 짓느라 주민들은 농지를 빼앗기고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제주는 가해의 공간인가. 피해의 장소인가.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좁은 물음에 갇히지 않았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성찰이었다. 평화는 “가해자가 되지 않을 권리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했다. 이들은 80여 년 전 제주의 군사화가 미친 영향을 오직 피해자의 입장에서 교훈 삼지 않았다. 난징과 일본 오키나와, 팔레스타인에 연대와 애도의 메시지를 보낸다. 기억은 성찰을 선택한 이들의 몫이었다. 물론 난징 추모제는 작은 행사다. 참가자는 적고, 관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날이면 국내외에서 무언가를 지키고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2024년에는 가덕도 신공항 반대 주민들이 처음 추모제를 찾았다.
2014년 알뜨르 비행장에서 난징 추모제가 시작했을 때, 제주의 풍광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해군기지 건설의 전초 작업으로 강정 구럼비가 폭파됐고, 송악산엔 유원지 건설이 추진되다가 반대에 부딪혀 철회되는 일이 반복됐다. 세계 평화의 섬 지정이 무색하게도 한쪽에선 군사화가, 다른 쪽에선 관광개발이 성행한다.
나는 10여 년 전 강정 앞바다를 모른다. 몇 년 뒤엔 리프트가 달린 송악산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대지를 포탄으로 뒤덮고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인간이지만, 서로 풍경이 되는 것도 사람이다. 특공대가 투입된 국회 앞을 우리가 다른 경관으로 만들어냈듯 말이다. 전적지 격납고를 애도의 공간으로 만든다. 기억하고 연결되어 순환한다.
희정 기록노동자·‘뒷자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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