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2024년 여름의 나는 몸도 마음도 좀 지쳐 있었다. 10여 년 동안 해왔던 다양한 활동들을 일단락하고, 다른 진로를 택하려 시간을 쓴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먼저 거부반응을 보였다. 일종의 위험신호였다.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도전을 응원해줬던 친구들도 점점 생기가 사라지는 나를 보며 꽤 걱정했다는 걸, 그만두겠다는 선언에 배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알게 됐다.
어떻게 다음 징검다리로 건너가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에 연구활동가들의 협동조합 ‘듣는연구소’로부터 연구 참여 제안을 받았다. 인천 강화군에 있는 협동조합 청풍의 지역 체류 프로그램인 ‘잠시섬’에 거듭 방문하며 기여와 환대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청년들을 지역의 ‘관계인구’로 보고 분석하는 연구였다. 강화나 관계인구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현장을 느끼고 싶어 흔쾌히 수락했다. 그 후 5개월간 강화를 오가며 청풍 팀이 정성스레 준비한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해 관찰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온갖 소소한 것들까지 눌러 담은 연구일지를 썼다. 이것들은 분명 ‘일’이었는데, 출장 갈 날이 기다려지고, 피곤한 날에도 잠들기 전 긴 일지를 쓰는 게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났다. 호기심과 질문을 잔뜩 품고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 그게 연구라는 일의 특성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좋아했던 일이다.
2025년 2월10일, 듣는연구소의 2024년 프로젝트를 회고하는 자리가 열렸다. 나를 다시 연구라는 장으로 초대해준 듣는연구소에 고마운 마음으로 참석했는데, 나 같은 외부 협업자가 두 명 더 있었다. 두레생협 민중교역 20년 역사를 만든 사람들을 인터뷰해 ‘바나나와 올리브유의 얼굴’이라는 책을 펴내고, 삶의 경로 탐색 프로젝트인 ‘별의별 이주땡땡’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 청년과 농촌을 연결하는 수도권 플랫폼 ‘도시쥐정거장’을 만드는 연구를 함께 한 고은, 총총 님이었다. 듣는연구소와 함께 한 연구가 그분들에게도 힘들었던 시기에 의미 있고 호혜적인 현장과 만나 숨이 트이는 시간이었다고 해서 신기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듣는연구소는 어떻게 그런 현장들과 연결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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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연구소 연구들의 공통점은 ‘실행 연구’(Action Research) 방법론을 핵심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실행 연구란 사회 현장의 변화를 위해 현장의 당사자와 연구자가 함께 지식을 만들어가는 방법론이다. 연구자가 변화의 촉진자가 되어 함께 문제를 정의하며 상황을 파악하도록 돕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게 한다. 그러니 연구지를 선정할 때 현장의 필요와 듣는연구소가 지향하는 변화가 부합하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내가 만난 현장도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주체의 경험(공동체, 청년, 로컬의 삶 등)을 의미화하려는 듣는연구소의 지향이 반영된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원이 넉넉하지 않고 연구 과정이 순탄하지도 않아 고생하기 마련이지만, 불꽃이 일듯 현장의 주체들이 깨달음을 얻고 변화하는 순간은 찾아온다. 이를 신나게 증언하는 연구자 우군님의 샘물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나도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게 한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가들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급진적인 정치를 실험하자.”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이야기와 고정관념에 가려져 놓치는 장면이 많다. 그럴 때일수록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섬세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며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는 연구가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게 듣는 연구자들이 하려는 일 같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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