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든 캐럴이 들리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인다. 공인된 축제 중 하나라지만 유독 크리스마스에는 마음껏 기분 내기가 어렵다. 어릴 적 TV에서 본 만화 ‘플란다스의 개’ 탓이 크다. 네로와 파트라슈의 비극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마지막 장면이 여전히 잊히질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어딘가에 파카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한 네로가 있을까 싶어 자꾸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아직 우리 주위에는 네로가 많을 것이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오래전 ‘소년소녀가장’이라고 불렸던 아이들. 평범한 일상이 축제처럼 귀한 것이라 대체 무슨 소원부터 빌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 그래서 산타를 믿지 못하거나 믿을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 언제부터인가 이들을 찾기 어려워졌다. 국가는 더 이상 ‘소년소녀가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돌봄을 제공할 주체가 아니므로 ‘가장’의 역할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영케어러’라고 부른다. 아픈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책임지는 만 13살에서 34살 사이의 청년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영케어러’라는 말이 낯서니 다들 존재도 잘 모른다. ‘가족돌봄청년’으로 바꿔 부르자고 하지만 여전히 당사자에게 돌봄의 의무를 지우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는 소년소녀가장이라는 말만 덜컥 없애놓고는 얼마 전까지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정부는 대략 18만 명 정도로 추산하지만 민간단체들은 최소 30만 명 이상의 영케어러가 있다고 본다. 게다가 만 13살 미만 어린이는 정부가 특정한 이 영케어러에도 들지 못한다. 어린이는 존재 자체로 복지 대상이므로 현행 법령으로 충분히 보호할 수 있으며, 돌봄의 주체로서 별도의 정책 수혜자가 되는 것은 아동 권리를 도리어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름이 없으니 불릴 수 없고, 불리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네로는 그렇게 사라졌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산타와는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같은 공간에 있는 이 아이들과는 다른 세상에 산다. 꿈꾸기는커녕 당장 오늘이 버겁고 내일이 두려운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장 현실적인 환상이자, 가장 환상적인 현실이다. 주는 사람이 누구든 어린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물을 받는다는 점에서 손에 잡히는 환상이지만, 자신의 곤란을 가혹할 정도로 거듭 확인시킨다는 점에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과 분명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 이 아이들을 다시 부를 때다. 이들의 고통을 발가벗겨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불편한 마음으로 그 고통에 참여해야 한다. 그것은 전시되지 않는 고통이고 만질 수 있는 고통이며 함께 나눌 수 있는 슬픔이어야 한다. 그럴 때야만 비로소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내는 부당한 권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돌보며 사는 아이들도 마땅히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이 문제를 적극 드러내야 달라진다. 학교마다 사회복지사를 더 많이 배치하고, 관련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켜 정책을 개선하라고 요구하자. 선물을 받으려면 울면 안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네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복지가 무엇인지 세세하게 알려주자. 그것이 바로 어른의 일을 하는 어린이를 위해 어른이 해야 하는 일이다.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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