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최명찬(57)씨는 매주 토요일 산을 오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가르며,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나 기어이 정상을 향한다. 스물넷, 너무 이르게 하늘로 떠난 보성에게 한 뼘이라도 가까이 닿기 위해 아빠는 매주 험한 산을 기고 또 걷는다.
보성은 예술가의 영혼을 가졌다.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 감수성도 남달랐다. 어린 보성이 “엄마, 땅이 간지러울 것 같아”라고 말해 창밖을 보면 마른땅에 소나기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동시를 줄곧 외웠는데 어느 날은 “책이 내 머릿속으로 걸어 들어왔어”라고 말했다. 엄마는 보성이 커서 시인이 되려나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는 미술에서 적성을 찾았다. 미술학원도 다녔다. 하지만 아빠와 누나 최연화(27)씨는 미술로 대학을 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예술인이 되는 길이 험난하단 것도 걱정했다.
결국 보성은 경기도 용인의 한 대학교에 진학했다. 미대는 아니었다. 보성은 친구들을 아꼈다. “요리를 좋아했는데, 매번 양푼으로 밥을 하는 거예요. 닭볶음탕, 카레, 김치찌개 같은 것도 엄청 많이 해요. 그런데 다음날 보면 싹 없어져 있어요. 자취하는 동기나 후배들에게 다 가져다주는 거예요.” 아빠는 아들을 친구들에게 아낌없는 ‘큰손’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짜인 틀에서 진행되는 대학 수업은 보성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보성은 휴학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성의 가장 친한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보성은 아꼈던 친구의 죽음을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군을 제대하고도 친구를 잃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아빠 명찬씨는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다 못해 공사 현장에 데리고 나갔다. 보성은 한 시간 일하다 도망가고, 두 시간 일하다 도망갔다. 명찬씨는 맛있는 점심으로 도망간 아들을 꾀어 다시 현장으로 데리고 오기를 반복했다. 보성이 점점 일에 익숙해지던 2020년, 아빠는 용인의 한 카페 공사 현장에 아들을 일용직으로 투입했다. 보성은 집까지 걸어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힘들게 일했다. 그런데 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정이 피어났다. 그때부터 명찬씨는 아들을 잡으러 다닐 일이 없었다.
2022년 봄, 아빠는 아들과 단둘이 30평 남짓(99㎡) 규모의 단독주택을 지었다. 둘이 하루 8시간도 일하고 10시간도 일하면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보성이는) 일을 배우는 것이 스펀지 같았어요.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니까 하나를 이야기해주면 두세 개를 앞서가더라고요. 아들을 볼 때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죠.” 3개월 동안 아빠와 아들은 집을 지으며, 마음을 쌓았다.
다음 현장은 서울 암사동의 5층짜리 상가주택이었다.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가장 큰 난관은 민원 해결이다. 기존 건물을 철거해야 하는데, 주민들의 민원 때문에 진척이 더뎠다.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 비용이 늘어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보성의 다정한 성격은 그때 빛을 발했다. 암사종합시장에서 물건을 사오는 할머니가 보이면 보성은 쪼르르 달려가 “제가 들어드릴게요”라며 손을 내밀었다. 한창 일하다 아들이 보이지 않아 찾으면, 동네 할아버지 집에서 과일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보성은 떠났지만, 아들의 노력은 그대로 남았다. “(그때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자 같은 아이를 잃은 거죠. 아들 소식을 들은 뒤로 3~4년 정도는 늙으신 것 같더라고요. 보성이 덕분에 그 현장에는 아직도 민원이 없어요.” 아빠는 그렇게 보성의 마지막 손길이 깃든 현장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 맞벌이하는 아빠와 엄마 대신 보성을 키운 것은 누나 연화씨였다. 학교 알림장을 챙기고 숙제하라 잔소리하는 것도 누나의 몫이었다. 그런 누나를 보성은 잘 따랐다. 어른이 된 뒤 둘은 자주 코인노래방을 다녔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방방 뛰며 노래하기 민망해하던 누나도 보성 옆에서만큼은 무장해제가 됐다.
그렇게 보성과 딱 붙어다니던 누나는 보성의 부재를 믿을 수 없다. “3~4년 전에 보성이랑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이 되는데, 네가 죽으면 온 세상이 까매질 것 같다’라고요. 그냥 텔레비전이 딱 꺼지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보성이가 떠나고 나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날 이후 세상이 컬러에서 흑백이 된 느낌이에요.” 누나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연화씨는 보성이 이태원에 가려는 계획을 미리 알았다. 보성의 생일은 10월30일이다. 생일에 뭐 하냐고 물었더니 보성은 친구들과 이태원에 간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심 좋았다. 계속 아빠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며 젊은 시절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동생이 안타까웠다. 그날만큼은 친구들과 즐겁게 보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2022년 10월29일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미국에 사는 보성의 여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태원에 간 보성과 그날 밤 9시 이후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누나는 보성과 함께 이태원에 갔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는 보성과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조금 더 찾아보겠다고 했다. 100명이 넘게 심정지 상태라는 뉴스가 나왔다. 왈칵 눈물이 난 누나는 곧바로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와 누나는 차를 몰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보성의 친구와 순천향대학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원효로 다목적체육관 등을 나눠서 찾았다. 그러다 보성과 함께 이태원에 간 다른 친구가 서울 동대문의 한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병원에 신원 미상의 남성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가족이 보성을 찾은 시간은 그의 생일인 10월30일 새벽 3시30분이었다.
보성이 세상을 떠난 뒤, 누나는 잘 다니던 무역회사를 그만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수많은 2차 가해를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주로 맡았던 유가족협의회 활동도 누나가 이어받았다.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보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할 거예요.” 아빠의 마음도 같다. 전원주택을 근사하게 지어 사랑하는 반려견 ‘임짜’와 함께 살자는 보성의 꿈은 이제 이뤄줄 수 없다. 하지만 “새파랗게 젊은 애가 서울 한복판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일만큼은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리라는 다짐은 지킬 생각이다. 아빠는 그렇게 하늘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건다.
정환봉 <한겨레> 기자 bonge@hani.co.kr<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카카오비즈니스채널에서 H21 검색독자 소통 휴대전화 : 010-7510-2154이메일 : ha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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