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 게이츠는 2015년 테드(TED) 강연에서 ‘바이러스의 위험’을 미리 경고했다가 백신과 관련한 음모론의 주인공이 됐다. 2011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UN) 유럽대표부에서 열린 세계보건총회에서 백신을 들고 있는 빌 게이츠. 로이터
‘지구는 평평하다’ ‘인류는 달에 간 적이 없다’ ‘빌 게이츠가 백신에 마이크로칩을 심었다’.
대개의 사람은 이런 이야기에 헛웃음을 터뜨리겠지만, 혹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가짜 정보와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 우리는 누군가가 단순히 멍청해서 음모론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음모론자 중에는 놀랍게도 유력 정치인과 기업 총수가 제법 있으며, 종종 우리는 가족이 음모론을 탐닉하는 걸 목격하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는 무언가를 어떻게 믿게 되는 걸까? 그리고 어떤 믿음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과학 철학의 렌즈를 통해 믿음이라는 견고한 요새를 살펴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토머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펴냄, 2013)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이론과 가치관 등의 총체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객관적으로 현상을 관찰하지 않고 패러다임이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음모론자들 역시 강력한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 ‘정부는 우리를 속인다’ 혹은 ‘과학계는 기득권의 하수인이다’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모든 현상은 그 증거로 해석된다. 쿤은 패러다임에 반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도 과학자들이 즉각 이론을 폐기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그 오류를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며 기존 패러다임을 유지하려고 한다. 가령 지구평평론자에게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의 모습은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가 아니라 대기 굴절에 의한 착시일 뿐이다.
과학과 음모론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카를 포퍼는 진짜 과학의 조건으로 반증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적 이론은, 해당 이론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과학적이다. 만약 일식 때 태양 중력에 의해 휘어지는 별빛을 관측할 수 없었더라면 일반 상대성 이론은 폐기돼야 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틀릴 수 있는 조건을 명확히 제시했다.
반면 음모론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지구평평론자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인공위성 사진을 보여주면 그들은 “나사가 포토샵으로 조작했다”고 답할 것이다. 달에 비친 지구 그림자가 둥글다는 사실을 제시하면 “그것은 달이 두 개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반례를 가져와도 이를 흡수해버리는 복원력. 포퍼는 이를 유사과학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오늘날 포퍼의 엄격한 반증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드물다. 현실의 과학은 단 하나의 반례로 이론을 폐기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앞서 설명한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포퍼의 반증주의에 반대해 탄생했다. 포퍼에 따르면 한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것은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수많은 이상 현상이 보고돼 불신이 쌓인 끝에 일어나는 일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존 패러다임이 쌓은 성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상과학을 낳는다. 포퍼가 과학 혁명이라 부른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다른 반박도 있다. 피에르 뒤엠과 윌러드 콰인이 제안한 ‘뒤엠-콰인 논제’다. 뒤엠-콰인 논제는 일종의 전체론이다. 한 가설은 결코 단독으로 검증되지 않는다. 가설은 수많은 보조 가설, 실험 방식, 측정 도구 등에 대한 믿음과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실험 결과가 예상과 다를 때, 그것이 가설이 틀린 탓인지 아니면 실험의 근거가 되는 다른 이론이나 실험에 사용된 측정 도구 등에 오류가 있었는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뒤엠-콰인 논제는 음모론이 어떻게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지에 관한 또 다른 근거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지구는 둥글다’라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카메라로 지구를 찍는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빛은 직진한다’ ‘카메라는 상을 왜곡하지 않는다’ ‘사진 전송 과정에 오류가 없다’ 같은 수많은 보조 가설을 동시에 믿는 셈이다. 음모론자는 이 점을 파고든다. 핵심 가설(지구가 평평하다)을 보호하기 위해 보조 가설을 공격(나사가 데이터 전송 과정에 관여했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반박 불가능한 각자의 세상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가? 베이지안 인식론은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베이지안 인식론에서 믿음은 0(거짓) 아니면 1(참)의 이분법이 아니라 0과 1 사이의 확률이며, 핵심은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을 때 기존 믿음을 업데이트하는 것에 있다. 합리적 인간이라면 새로운 증거를 접했을 때 가설에 대한 믿음 수준을 조정해야 한다. 지구가 평평할 확률이 90%라 믿던 사람이라도,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을 본 다음에는 그 확률을 80%나 70%로 낮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태도는 유의미한 대화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참과 거짓을 한 방에 뒤바꿔놓는 결정적 논리가 아니라 조금씩 믿음의 정도를 수정해나가는 것이야말로 효과적인 설득이 아닐까.
음모론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짜 통제감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불확실성을 혐오하며,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 안정을 찾으려 한다. 가짜 정보는 뇌의 이러한 취약점을 파고들어 거짓 위안을 제공한다. 음모론에 대항하는 힘은 태도에서 나온다. 패러다임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론이 틀릴 가능성을 자문하며, 유연하게 믿음을 수정하는 태도 말이다. 그러한 태도 속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음모론이라는 평평한 세상에서 벗어나 무정형의 우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서윤빈 소설가
*세상 모든 콘텐츠에서 과학을 추출해보는 시간. 공대 출신 SF 소설가가 건네는 짧고 굵은 과학잡학.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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