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포플러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경남 창녕 우포늪 둑에 사는 이태리포플러. 출처 한반도식물다양성연구소
얼마 전 이탈리아에 갔다가 포플러가 길게 늘어선 길을 만났다. 이탈리아 북부의 페라라라는 지역을 차로 달리면서 본 포플러는 어릴 때 내가 고향 마을에서 본 풍경을 그대로 재생해주었다. 가슴이 다 뭉클했다. 지금 내 고향의 그 많던 포플러는 거의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차창 저 멀리에 선 그들에게 양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다 없어지고 난 뒤에도 내 안의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버드나무과 포플러속에 드는 여러 종을 한데 묶어 동서양 구분 없이 ‘포플러’라고 부른다. 그 포플러를 한반도에서도 애써 심어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일찍이 유럽에서 널리 심던 포플러를 1900년을 전후해 선교사들이 국내에 가져오면서였다. 서양에서 온 버드나무라고 ‘양버들’이라 불렀다. 그들이 양버들보다 먼저 들고 온 건 잎 뒷면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은백양’이었다. 이 은백양은 한반도 산지에 저절로 사는 사시나무와 교잡돼 은사시나무를 낳았다. 그 나무들은 어떤 다른 나무보다 빨리 커서 헐벗은 우리 땅을 금세 푸르게 물들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성급하게 크다보니 단단한 원목이 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우리 생활에 정말 필요한 이쑤시개와 성냥개비와 나무젓가락과 아이스크림 막대가 되었다. 또한 그 나뭇결을 켜고 포개서 수많은 합판을 만들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포플러는 미루나무가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며 미국에서 들여와 전쟁 중에 미군들이 손수 심으며 많이 퍼진 그 나무. 미국에서 온 버드나무라고 ‘미류(美柳)나무’라고 부르던 이름이 지금은 미루나무로 굳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포플러는 길뿐만 아니라 밭에도 많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강인 포강의 최하류이기도 한 페라라는 알프스에서 발원해 아드리아해로 흘러들어 가는 강물이 운반해 온 모래나 흙이 쌓여 평원을 이루는 곳이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자원 덕분에 집약적 농업으로 이름났는데 쌀과 옥수수와 밀만큼이나 포플러를 많이 심어 키운다. 대부분이 우리 귀에 익숙한 ‘이태리포플러’다.
서양에서는 유럽의 양버들과 미국의 미루나무를 교잡해 이태리포플러를 17세기에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양버들과 미루나무의 자연 교잡종을 프랑스로부터 1800년대 말에 자국에 도입했다. 이 나무가 엄청나게 빨리 자라는 것을 알고 드넓은 밭에서 묘목을 키웠다. 수 세기에 걸쳐 그 나무를 전국으로, 전세계로 공급했다. 덕분에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도 국내에서 이태리포플러를 만나게 됐다.

국립세종수목원의 양버들. 허태임 제공
이탈리아가 이태리포플러 생산에 그렇게 열을 올린 이유는 20세기 초 제지업계에서 포플러를 기계펄프로 사용하면서라고 들었다. 여러 품종의 포플러 중 이태리포플러가 가장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수요가 급증했다고. 실제로 온 국민이 그 나무 재배에 동참하게 된 배경에는 이탈리아 정부의 외국 수입 목재에 대한 수입세 부과와 에티오피아 전쟁 동안 국가연합이 선포한 금수조치가 있었다 한다. 합판 제조업자들은 수입하는 게 아니라 이탈리아 자국의 목재 생산이 필요하다는 데 절감했고 이를 실현해줄 포플러에 집중했다. 전세계적으로 포플러 품종 개발을 위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탈리아에서 그렇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 나에게 아빠는 나무를 자주 알려주셨다. 키가 큰 나무 그늘에서 나무 막대기 하드를 야무지게 먹고 있는 내게 아빠는 말했다. “그게 이태리포플러란다. 이 나무야.” 아빠가 가리킨 검지 끝을 따라 고개를 젖히니 이태리포플러 수관(樹冠)이 거대한 우산처럼 펼쳐졌다. “내가 너만 했을 때 할아버지 따라 이 신작로에 심었단다. 이 나무 조각이 네가 지금 핥는 그 막대기인 거야.” 그때 나는 아이스크림의 남은 단맛을 마지막까지 더 느끼고 싶어 막대기에 혀를 대면서 나무를 쳐다보았을 거다.
아빠가 어릴 때 목격한 더 흥미진진한 이태리포플러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아빠는 어느 여름날 외가가 있는 옆 동네에 가서 놀고 있었다. 그곳 동무들과 오랜만에 만나 몹시 신나던 중에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아 더 못 놀고 집에 꼼짝없이 묶여야 했다. 방 안에서 천둥소리를 들으며 밤을 맞이했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놀러 나갔다가 외가 옆집에 그 집 지붕보다 높이 선 이태리포플러 꼭대기가 뭉개진 걸 보고 의아했다. 지난밤 낙뢰가 그 나무 초두(梢頭)에 떨어진 거였다. “행여나 집이나 사람이 그 벼락을 맞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온 동네 사람들은 나무가 은인이라고 진심으로 고마워했어. 나무는 벼락을 맞고도 한참을 더 살고 죽었지.”
아빠가 어렸던 1960년대에 이태리포플러를 참 많이 심었다 한다. 그들 나무는 빠르게 무럭무럭 자라 내가 태어난 1980년대에 고목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태리포플러를 비롯해 키가 큰 양버들과 미루나무의 전체적인 외형을 바라보는 것이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더 좋았다. 그들 나무 아래로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엽서의 한 장면처럼 멋져 보여서 그걸 찍겠다고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잠복하듯이 서 있었던 적이 여러 번이다. 바람이 불면 그 공기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휘청거리는 나무들의 수형은 특히 아름다웠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들었다. 이태리포플러 단 한 종을 대규모로 경작하다보니 병충해가 문제였다고. 얼마간 정성껏 키운 나무가 해충 피해로 많이 죽었다고. 그러한 곤충에 내성이 있는 나무를 찾기 위한 연구를 민간제지회사의 자금으로 1920년대 말에 시작했다고. 그 제지회사가 세운 포플러 시험연구소를 기반으로 백 년이 넘도록 지금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그 연구소에서 이태리포플러를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임학자 현신규 박사는 1950년대부터 국내에 가장 적합한 이태리포플러 개체 연구를 집요하게 했다. 현 박사는 임목육종연구소를 발족한 뒤 꽃가루를 도입해 대대적인 인공교배를 시험했고, 마침내 ‘I-214’와 ‘I-476’이라는 품종을 만들었다. 이를 대대적으로 증식해 국내 전역에 본격적으로 심었다. 1970년대에 들자 국내에도 이태리포플러에 낙엽병과 녹병이 퍼졌다. 세계 각국에서 내병성 포플러 클론을 도입하고 검증해 저항성이 있는 이태리포플러를 1984년에 보급했다. 전국적으로 포플러 심기 운동이 일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그랬다. 하천 변 수목 식재를 억제하는 ‘하천법’ 규제가 있기 전의 일이다. 법이 강제하자 강둑에서 널리 자라던 포플러는 속수무책으로 잘려나갔다. 그렇게 장려했던 포플러 조림이 1997년 이후부터 거의 중단된 까닭이다.
거기에 더해 포플러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그들 나무가 심각한 알레르기를 유발한다는 소문이 국민 사이에서 번진 거다. 포플러 씨앗은 솜털로 둘러싸여 산포를 위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데 사람들은 그게 재채기와 각종 염증을 일으킨다고 여겼다. 애먼 나무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이 또 잘렸다. 포플러가 알레르기의 원인이라는 생각이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밝혀진 건 나중의 일이다. 나무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탈리아 페라라 포강 일대는 삼각주로 유명하다. 강과 강이 만나고 습지와 운하와 모래섬이 얽혀 있는 거대한 기수역 평원으로, 베네치아 석호 바로 남쪽에 인접한 곳이자 아드리아해 해안선을 따라 거대한 습지 생태계를 이루는 ‘포강 삼각주 국립공원’이다.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인간이 일군 농업 문화가 결합했다. 이것이 매우 특별하고 흥미롭고 아름답다며 유네스코는 ‘페라라-르네상스 도시와 포강 삼각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곳을 창 안에서 건너다보던 그 순간에 내가 우리 땅에 살던 그들이 너무 보고 싶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포플러를 흠모하며 자랐으니까.

국립세종수목원에 사는 미루나무 꼭대기에 까치가 둥지를 지었다. 허태임 제공
다행히 국내의 오래된 마을과 구도심과 강둑과 군부대에 과거에 심은 포플러가 아직 살고 있다. 최근 조성된 도시의 수목원과 공원에 다양한 품종의 포플러가 심긴 모습을 보기도 한다. 몇 해 전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여러 그루의 포플러가 주변의 초목과 조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뻤다. 누군지 몰라도 그 나무를 심은 이의 안목에 격하게 공감했고 그를 찾아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포플러가 사는 장소를 알게 되면 휴대전화 지도에 기록했다가 다시 그곳에 찾아간다. 포플러가 어린 시절의 내게 만들어준 갖은 추억을 그곳에서 꺼내 본다. 지금은 다 자란 사람으로 사는 게 돌연 막막하다고 느껴질 때 그런다. 그러고 나면 얼마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다시 어른으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글·사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숲을 읽는 사람’ 저자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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