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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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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는 날, 비가 내렸다

이서희 작가의 ‘어떤 관계’에 대한 방백…

자전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이야기
등록 2017-05-13 10:51 수정 2020-05-03 04:28
‘이서희의 오픈하우스’가 3주에 한 번씩 독자를 찾아갑니다. 이서희 작가는 이 코너를 통해 낭만적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독점적 일부일처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닌, 비혼은 물론 이혼 및 다른 형태의 결합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케치 형식으로 풀어갈 예정입니다. 글을 위해 인터뷰가 진행되겠지만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한 이의 삶을 재구성해 짧은 이야기로 담아내려 합니다. 첫 회의 주인공은 필자 자신입니다. _편집자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조정실에 놓인 30cm는 넘을 것 같은 두께의 서류철을 바라봤다. 13년의 결혼생활이 서류 한 뭉치로 남았다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마지막으로 문서의 용어를 점검하느라 양쪽 변호사들과 판사가 옆방에 모여 있었다. 나 홀로 조정실에 남아 얼마 전까지 북적대던 공간을 바라봤다. 서명을 마치자마자 성급하게 자리를 뜨는 전남편의 뒷모습을 열린 문틈으로 봤다. 이혼 당사자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절차를 진행하도록 세 개의 조정실이 분배되었다. 전남편과 그의 변호인단, 그리고 나와 나의 변호인단, 그리고 조정 담당 판사의 방으로.

30cm 서류로 남은 13년

판사는 양쪽 방을 오가며 양쪽 의견을 조율했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해서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최종합의에 도달했다. 점심 먹으러 나갈 시간조차 없었다. 사무실에서 준비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고 저녁은 피자를 시켜 먹었다. 15층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 비 내리는 로스앤젤레스(LA) 다운타운의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각종 법률사무소가 들어찬 거리라서 퇴근 시간이 지나자 행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온종일 내린 비로 회색 빌딩은 더욱 어두운 빛을 입었다. 동 틀 무렵 집을 나설 때는 비가 올 것을 예상 못했다. 우산을 가지고 온 것은 대표변호사인 피터뿐이었다. 내 이혼 케이스 전담변호사인 스티브는 서류 박스를 들고 가야 했다. 피터는 우리에게 우산을 양보했다. 내가 길을 헤매다 엉뚱한 곳에 주차한 탓에 우린 꽤 먼 길을 걸어야 했다. 비에 젖어가는 피터에게 미안해서 한사코 혼자 가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빗물로 흐려진 안경 너머로 큰 눈을 지어 보이며 웃었다.

“가끔이라도 이렇게 비를 맞으면 청춘으로 돌아간 듯해서 기분이 좋거든.”

스티브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는 말이야, 지난 일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멋진 일을 맞이한다는 걸 의미해. 이혼하는 날 내리는 비는 기막히게 좋은 의미란다.”

텅 빈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온종일 아이들을 맡겨둔 친구 로렌에게 전화를 했다. 드디어 끝났다고 말하자 그녀는 늦었지만 축배를 들자고 했다. 비 내리는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로렌의 집까지는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잠든 그녀의 집에 살금살금 들어가서 아래층 정원이 바라다보이는 테이블에서 함께 와인을 마셨다.

며칠 전 아이들로부터 전남편이 어머니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로렌에게 말했다. 언제든 찾아올 일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기분이 이상하다는 고백과 함께. 뱃속이 스르르 아파오면서 내장이 은밀히 비틀비틀 꼬이는 느낌이랄까. 뭔가 불공평하고 부당한 것 같지만 이유는 댈 수 없는, 그래서 입 밖에 낼 수 없는 불만 같다고. 하지만 네게 털어놓고 나니 한결 편안해졌다고.

나만 빼고 행복한 날

도시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남편과 아내, 아이들과 보내던 크리스마스는 어느새 낯선 기억이 됐다. 3년이 되어가는 별거 기간 동안 제일 먼저 신경 쓴 것은 아이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는 일이었다. 양육 스케줄을 짰고 엄마와 아빠는 너희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시켰다. 매우 사랑해서 너희를 낳아 키웠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으나, 엄마와 아빠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려 한다고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아이들의 잘못은 조금도 없음을,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변화를 맞게 되는데 결혼과 이혼도 그런 과정의 일부라고 했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다보니 오히려 아이들과 밀접하게 보내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나 자신과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과는 더 가까워졌고 나 스스로와도 마찬가지였다. 내 삶을 돌아보고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도 명절로 들뜬 계절을 지나가는 일은 매해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먼저 이혼한 친구들의 조언을 얻기도 했다. 아이가 6개월 때 이혼한 프랑스 친구 까린은 크리스마스를 아빠 없이 아이들과 보낼 걱정에 사로잡힌 내게 말했다.

“가족이란 반드시 엄마, 아빠, 아이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어.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삶을 나눌 수 있으면 그게 가족인 거야. 나는 지금까지 열 번의 크리스마스를 딸하고만 보냈어. 매번 우리가 즐길 수 있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계획하며 보냈어. 신나고 벅찬 날도 있었고 조용하고 편안한 날도 있었지. 어떤 가족의 형태도 부족하거나 모자란 건 아니야. 그 안의 행복과 사랑이 중요한 거지.”

그래도 가끔은, 세상이 나만 빼고 행복한 것 같은 날에는 전남편과 헤어진 이후의 시간을 그와 관련된 모든 것과 이별하는 데 써버린 기분이 들어 쓸쓸했다. 13년 전 결혼과 함께 맞이한 미국 생활은 남편을 통해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삶이었다. 남편의 언어를 남편으로부터 배우고 그의 말로 그의 삶 속에 편입됐다. 그의 친구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의 일과에 맞춰 내 일상이 꾸려졌다. 두 아이를 낳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갔다.

달력에서 지워진 인연들
한겨레 신소영 기자

한겨레 신소영 기자

별거 이후 맞닥뜨린 것은 일상에 찾아온 공백이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시즌마다 찾아오던 수많은 일정과 모임이 달력에서 지워졌다. 결혼생활을 이어갈 때만 해도 나는 그 만남과 관계의 형식성과 비효율성을 질색했다. 그러나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보장받지 못했던 나만의 공간이 별거와 함께 무더기로 주어졌을 때 엄청난 해방감 이후 허탈함 또한 느꼈다. 시간의 여분은 그만큼의 휘청거림을 허용했고 새로 주어진 공간 속에서 비틀비틀거려야 했다.

평생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으려 했던 남자는 이제 그만의 온전한 방식으로 다른 여자 곁에 있다. 나는 그가 얼마나 한번을 사랑할 때 전력을 다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선택했고 함께했으니까. 그리고 헤어진 이후 또다시 그런 상대를 만나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자신이 믿는 것에 전부를 거는 사람이니, 상대가 누구든지 최선을 다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와의 관계에서의 실패는 온전히 내 탓으로 정리했기에 그는 모든 빚을 내게 맡기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자유를 맞이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달랐다. 나는 안으로 파고들었고 때로 세상을 떠돌았고 조용히 사람들을 탐색했다. 그는 커리어에 집중했고 원한다고 믿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일을 위해 재빨리 안정을 되찾으려 했고 방황은 아주 짧고 요란하게 끝냈다.

마음이 산란해질 때면, 나의 선택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면, 다짐하듯 떠올린다. 기억이 시작된 곳부터 이어진, 내 삶의 규칙을. 그건 기쁨에 관한 것이다. 기쁘면 실행하고 기쁘지 않으면 물러섰다. 그리고 그 기쁨이 타인에게 확장될 때 더 기뻐짐을 배웠다. 기쁨의 효용성으로 많은 일을 결정했다. 나의 기쁨이 당신의 기쁨이 되지 않는 순간 괴로워했지만, 차츰 중심을 찾아갔다. 자라면서 배운 대부분의 것은, 기쁨의 강도와 확장성을 어떻게 배분할까에 대한 기술이었다. 그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만나지 않는 자리가 계속되자 관계가 더는 지속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별 후 3년이 지난 뒤, 각각의 자리에서 기쁨의 적절한 형태를 찾았다고 믿는다. 각각의 고유함으로 기쁨을 누리니,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고요히 내 기쁨에 집중하고 어떻게 깊고 뜨겁고 열렬하나 지속적인 무언가로 이끌고 확장시킬까를 살아내면 된다. 기쁨은 불행과 달리 상대적이지 않다. 비교조차 불가능한 절댓값이다. 매 순간 새로워 결코 지루하거나 스스로 닳지 않는다. 불행은 잠깐의 멈춤, 짠맛의 휴식이다. 잠시 머물되 정착하지 않는다.

검정은 아름답다

늦은 아침의 햇살에 눈을 떴다. 이층 손님방이었다. 아래층에 내려가보니 아이들은 뛰어놀고 로렌의 한국인 사촌언니가 와 있었다.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녀를 이전에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인사를 하고 그녀 곁에 앉아 아침을 먹는데, 친구의 여덟 살 된 막내딸이 우리 곁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상적으로 잘 자란 애들은 그림을 그릴 때 평범한 선택을 하곤 해요. 피부는 살색으로 칠하고 하늘은 파랗게 그리고. 그런데 뭔가 어두운 경험이 있거나 환경이 안 좋은, 예를 들어 부모가 이혼하거나 그런 애들은 티가 나요. 바탕을 마구 검은색으로 겹겹이 칠한다거나.”

그녀는 나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내 아이들이 자리에 없다는 게 다행이기는 했다. 친구의 막내딸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른다. 덕분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고 오히려 장난스러워졌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예술가는 어두운 경험과 안 좋은 환경을 반드시 필요로 하겠네요. 독특한 자기 세계를 만들고 표현해내려면요.”

잠시 후 로렌이 우리 곁에 앉았다. 영어로 대화가 이어졌고 내 이혼 이야기가 나왔다. 사촌언니의 반응은 귀여웠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찾아낸 말이라곤 고작,

“어머, 어떻게 이렇게 예쁜데 남자가 이혼해요?”

였고 나는 살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예쁘니까 이혼하죠.”

옆자리 앉아 있는 아이의 그림이 거의 완성돼가는 중이었다. 화목한 가정과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여덟 살 꼬마는 마무리도 하기 전에 스케치북을 넘기더니 온통 검은 바탕뿐인 그림을 그려댔다. 흰 바탕이 까매졌다. 겹겹이 까맣게 칠해댔다. 사촌언니가 무안할까 별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 아이의 엄마가 얼마나 훌륭한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아이가 얼마나 밝고 사랑스러운지도. 아이는 단지 검정색을 칠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검정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나도, 그녀도 변할 것이다

곤두서지 않는다. 여유가 찰랑인다. 사람에 따라 설득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쉽게 화가 나지 않는다. 우리는 잠시 후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우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변화할 것이다. 나도 그러하듯이.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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