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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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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밀애를 나누던 아파트는 어디일까

엄마의 욕망과 엄마의 삶을, 그 여자의 욕망과 그 여자의 삶으로
등록 2019-07-02 20:49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게 되고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나이 든다고 성숙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이고, 나이 듦을 바라보는 폭력적 시선에 대한 깨달음이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시선의 보유자였고 여전히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들처럼 바라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거창한 성과나 위대한 업적을 앞에 두고서야 그들의 세월을 궁색하게 여기지 않지만, 어찌 됐든 세월은 잔인하고 서글픈 것이며 그것에 길게 노출된 이들은 초라한 존재라고 부지불식중에 여긴다. 노인은 아주 쉽게 사회 주변부가 되고 소외층으로 밀려난다. 노인의 삶과 욕망은 외부 시각으로부터 편편해진다. 각자 무엇을 열망하든 노인으로 구별되는 순간 꿈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한 존재로 인식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세상의 늙음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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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나의 엄마는 세상의 늙음과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어디 가든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주인공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고자 했다. 때로는 그런 열망이 과도해 주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욕망덩어리인 엄마를 애틋해했고 숱한 위기와 재난에 상처투성이가 되는 그녀를 가엾게 바라보기도 했다. 모든 상황이 그녀를 주변인이 되라고 몰아가는데, 꾸역꾸역 나서서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살아가려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지만, 전장의 용사처럼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엄마는 기이할 정도로 지치지 않고 꿈꾸는 자였고 희망에 부풀어 사는 이였다. 대부분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미래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열정과 에너지로 감탄할 만한 성과를 눈앞에 이뤄내기도 했다. 허황된 꿈을 어리석게 여기는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로였지만, 엄마 인생은 다르다는 걸 그때는 인정했다. 나와 다른 엄마를 젊고 자유로운 20대의 나는 아낌없이 지지하고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우리는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갔지만, 서로를 경탄과 기대로 바라보는 사이였다. 내가 엄마의 기대를 뒤로하고 안정된 삶과 가정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때까지는 그랬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엄마는 사업 기반이 구제 불가 수준으로 흔들리면서 급속도로 무너졌다.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진 채 발견되기도 했고 전망 없는 삶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의 자살 시도는 관객 없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로는 첫아이를 임신한 나의 한밤중을 깨우는 일로 시작됐다. 지하철 선로 앞이나 서울 거리 한복판에서 엄마는 죽음을 선언했다. 나에게는 그녀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과 책임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뒷감당을 당부했다. 엄마의 전화는 한밤중에는 자살 시도 중계로, 낮에는 사업 위기를 막아달라는 호소로 이어졌다. 생활비조차 없어서 거리로 내앉는 사정을 한탄하는 그녀에게 정기적으로 송금했고 때에 따라 목돈을 보냈다. 사업체는 물론 집까지 잃은 그녀에게 전셋집을 수차례 마련해줬지만, 어느새 전세금은 그녀 수중에서 사업 자금으로 용도를 자체 전환했다.

호소는 어느덧 협박으로 변해갔다. 나 혼자 안락한 삶을 살고 부모는 비참히 사는 사정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말은 물론, 돈이 마련되지 않으면 엄마는 감방행이라든가 안 되면 죽어서 나를 원망하겠다는 협박이 난무했다. 가족의 불행은 연대책임이 되고 일원의 동떨어진 행복은 약점이 되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삶의 저편, 지옥의 삶이 꾸는 잠깐의 꿈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는 그 절망이 이토록 생생한 거라고. 여전히 맞닿아 있는 당신의 삶을, 그래서 결코 놓지 못한다고.

<font size="4"><font color="#008ABD">학대로 딸을 신고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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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에 걸쳐 엄마를 어떻게든 그 지옥에서 끌어내고 싶었다. 고시원의 방 한 칸을 빌려 나이 든 몸을 구겨넣고 재기의 찬란한 꿈을 꾸는 엄마를 나는 끝끝내 이해 못했다. 엄마가 꾸는 꿈의 대가는 매번 너무 컸다. 엄마의 사업 자금과 실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여기저기 돈을 빌려야 했고 생활비를 빼돌렸다. 매년 정리하는 지출 목록에 나의 쇼핑 액수는 급속도로 늘어갔다. 큰 금액은 당시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보냈다.

알코올중독으로 무너져가는 엄마를 병원 치료도 받게 하고 내가 사는 미국으로 모셔오기도 했지만, 엄마는 답답한 생활을 잘 견디지 못했다. 어디 가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가, 한 명의 무력하고 납작한 노인으로 살아가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몸이 힘들어도 서울 고시원이 더 나으니 사업 자금을 달라는 요구를 반복했다. 요구를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주어진 삶을 누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내 여유가 죄스러웠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자 엄마는 상상을 초월한 방식으로 난동을 부렸다. 미국의 조용한 중산층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장년의 동양 여자가 부리는 소동은 한 몸에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몰래 집을 탈출해 주변의 고급 식당가를 휩쓸며 술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고 다니다가 경찰에 붙들려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소박한 일화였다. 소동 이후 모든 게 불리해지자 엄마는 나를 학대로 신고했고, 나는 남편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에 끌려가기조차 했다. 거침없는 행각은 상상을 초월했으니 그마저도 엄마다웠다고 해야 할까.

엄마를 다시 한국으로 보내고 지칠 만큼 지쳐 있던 나는 한동안 엄마와 거리를 두며 지내기로 했다. 나의 이혼은 적절한 핑계가 됐다. 내가 불행해 보이자 엄마는 요구를 잠시 멈췄다. 기묘한 평온이 찾아왔고 나는 이혼을 핑계로 불행한 딸을 연기하며 휴식을 얻었다. 엄마에게 알리지 않고 아이들과 한국에 돌아와 엄마 없는 고국의 여름을 처음 보냈다. 사업가인 친구의 초대로 생일 축하 저녁을 함께 먹던 중 엄마 이야기를 살짝 꺼냈다. 그의 말은 당장의 위로 대신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줬다. 그는 사업가답게 그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네 어머니가 바라는 삶과 꿈꾸는 미래를 우선 이해해보려고 하면 어때?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어머니를 무작정 이끌어오려 하지 말고. 사업으로 뼈가 굵은 사람들은 포기하는 게 죽기보다 힘들어. 그걸 터무니없다고 무조건 관두라고만 하면 먹히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이 옳았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고 싶을수록, 엄마의 꿈을 부정하고 엄마를 허황된 존재로 몰아넣을수록, 엄마는 골치 아픈 난봉꾼이 되어갔다. 내가 엄마와 보내는 시간은 나의 꿈을 위한 희생이 되어버렸고, 그것은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불행한 시간이 됐다. 엄마의 욕망은 나와 다름에도 엄마가 무너지는 틈을 타서 엄마를 내가 바라는 쪽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다른 모녀들처럼 다정히 어울려 쇼핑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소박하게 아이들을 키우며 나의 육아 시절과 엄마의 노년을 평온하게 공유하고 싶었다. 나 역시 바라는 게 절실해지자 관계에 균열이 더 크게 생겼다. 엄마의 실패와 늙음을 빌미로, 이제는 삶의 주인공에서 물러나 나와 내 아이들이 이루는 삶의 배경으로 행복하게 살아주기를 노골적으로 바랐다.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엄마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억지로 노력했지만 견딜 수 없어 튕겨나갔고 결혼해서 도망갔고 이후로는 편법으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도 엄마도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가능한 걸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욕망은 강압이고 폭력이 된다. 나의 욕망에는 그녀가 없었다. 그녀의 욕망에는 내가 없었다. 악다구니 쓰듯 욕망하고 원망하기를 멈추고 나의 욕망에 거리를 두니 상대방이 보였다. 관계에 나만 있고 상대방이 없다는 말의 실체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모성 신화가 어떻게 이상적인 모녀상을 각각의 버전으로 만들어 서로에게 강요했는지도 깨달았다. 엄마에겐 착하고 여유로운 딸은 엄마 인생에서 제2의 구원이 되어야 했고, 나에겐 늙은 엄마는 엄마가 된 딸을 위해 기꺼이 할머니가 되어주어야 했다. 모든 엄마가 딸을 사랑한다는 관념조차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사랑은 애초에 주어지는 본능이 아니었다. 모성 신화에서 벗어날 자는 엄마뿐만이 아니라 딸이기도 했다.

오래전 엄마가 내 나이였을 무렵을 떠올렸다. 엄마는 대학생인 나를 옆에 두고도 자주 울었다. 사랑받지 못해서 슬프다고, 남들처럼 연애도 해보고 사랑을 주고받는 기쁨도 누리고 싶었는데, 자신은 시작도 못하고 엄마가 되었다고. 그래서 나는, 내 존재가 미안했다. 우리 삼 남매는 너무 일찍 엄마에게 찾아온 아이들이었다. 스물이 되어 엄마가 된 여자, 그 여자는 오십 언저리에 처음으로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그때 그녀의 사랑 풍경은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본다. 가정이 있던 두 남녀는 집을 나와 강원도 어느 작은 도시에 아파트를 얻어 함께 살았다. 나는 엄마가 사라진 것을 크게 염려하진 않았다. 어디선가 행복하리란 확신 같은 게 전해졌으니까. 심장으로 와닿는 기류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대가가 너무 컸다. 사랑이 떠나간 이후 엄마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고통스러웠다. 예정일을 일주일 넘기고서 아이가 태어났고 산후 구원을 위해 온 엄마는 내 아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손녀를 본 감격인 줄 알았더니 나오는 말이란 건, 역시 엄마답게 남달랐다.

“아이고, 너도 별거 아니구나. 이렇게 애 낳고 평범하게 살겠구나.”

<font size="4"><font color="#008ABD">멀어져야 온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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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던 엄마의 심정을 사춘기 지나가는 두 딸을 앞에 두고서야 헤아린다. 엄마가 되는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때로는 사무치도록 허무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엄마는 저절로 엄마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고단히 엄마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제야 그 말이 제대로 아 프다.

오늘 문득, 엄마가 연인과 밀애를 나누던 아파트는 어디쯤이었을까 상상해봤다. 어떤 창을 품고 있었을까. 그들은 사랑을 나누다 무엇을 보았을까. 엄마는 젖을 찾는 아기처럼 애타게 사랑을 찾아헤맸다. 비로소 받기는 했던 걸까. 엄마에겐 배부른 아이처럼 잠든 날이 하루쯤은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욕망과 엄마의 삶을, 그 여자의 욕망과 그 여자의 삶으로 놓아두기로 했다. 나의 개입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살아온 시간 동안 쌓은 우애와 운 좋게 내게 더 있는 여유 덕분일 게다. 나는 그녀의 욕망이 지어낸 삶의 굴곡을 책임질 자가 아니다. 그녀를 그녀 삶의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낼 자는 내가 아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나를 그녀 삶과 욕망의 배경과 도구처럼 불러들일 수 없다. 사랑했으나 멀어져야 온전한 관계도 있음을 그렇게 배웠다.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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