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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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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나의 사랑하는 시어머니

부고를 듣고서야 분명해진 당신의 존재
등록 2019-03-29 01:34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예상보다 너무 일찍 찾아온 부고였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거동이 불편해진 남편을 10년가량 돌봤던 그녀가 간암 말기임을 알게 된 건 한 달 전 예배 중 쓰러지면서였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의사의 예상을 깨고 그녀는 한 달 만에 숨을 거뒀다.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그녀를 한 번쯤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기대는 무너졌다. 그토록 사랑하던 둘째 아들의 방문을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숨을 거뒀다. 집에서도 단정한 옷차림과 한 오라기도 흐트러지지 않은 올림머리를 하고 지내던 그녀는 자신의 궁색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아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곤 외부인의 방문을 거절했다. 병환이 깊어졌다는 소식만 바람처럼 전하고선 너무 급하게 세상을 떴다. 전남편과의 이혼과 함께, 몇 차례 이어진 그녀와의 대화가 불편해서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끊었던 게 뒤늦은 회한으로 얹혔다.

시어머니, 그녀와의 인연

그녀와의 인연은 전남편이 나를 만난 뒤 3개월 만에 결혼하겠다고 그녀에게 통고하면서 시작됐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통화를 처음 했는데, 주변의 갖은 말에 혹한 그녀가 내게 혼수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인 며느리를 맞았으니, 한국식으로 혼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대화가 오가던 중 그녀가 말했다.

“우리 둘째와 결혼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내가 대답했다.

“어머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같은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어요. 저랑 결혼하고 싶어 하던 사람도 많았어요.”

나처럼 당돌한 며느리를 맞이해버린 그녀에게,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지낸 13년간의 시간은 어땠을까. 이야기를 들려줄 그녀가 이제 없으니 내 기억만으로 더듬어볼 수밖에. 첫 통화로 빚어진 갈등에 전남편에게 내 불만을 토로하자, 전남편은 어머니에게 연락해서 서희를 부당히 대하면 인연을 끊겠다고 대응했다. 그의 과격한 반응을 당시에는 원망했지만, 덕분에 결혼식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밖의 복잡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혼수도 없었고 상견례도 생략했다. 신랑은 우리 부모님을 만나 인사드렸고 나 역시 시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두 부모님 사이에 전화 통화는 있었지만,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만남의 자리는 없었다. 시어머니는 나와의 첫 통화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다. 이후 우리 관계는 매우 평화로웠다. 그녀는 그 뒤로는, 내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고 그에게 나와 통화할 수 있는지 물었다. 매년 생일이 돌아올 때면 편지와 선물을 소포로 보냈다. 친부모님도 잊어버리던 생일을, 가장 오래도록 꾸준히 챙겨준 첫 번째 여자였다.

시댁을 방문할 때면 나는 마음껏 늦잠을 잤고 그녀가 해주는 늦은 아침을 먹었다. 아이들이 그녀 곁에 노는 것이 편했고, 그녀는 서툴지만 다정한 여자였다. 다른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견지했지만,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강요하지 않았다.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오히려 그녀에게 대신 투정을 부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내 편을 들 만큼 현명했다.

당신에게 말해주지 못한 것

진실은,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사려 깊이 사랑할 줄 알았다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내게 말하곤 했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워서 그래. 정말 미안하다. 그 애가 잘못한 거야. 다시는 그런 행동 못하도록 잘 말해줘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한 잘못은 명백하게 인정했다. 다투는 중에 그가 내뱉었던 말을 두고는, 언어폭력이자 학대에 해당한다며 절대 용인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할 줄 알았다.

13년간의 결혼 생활과 이혼 후 6년이 지나서도 말하자면, 그녀가 키운 아들은 매우 괜찮은 남편이었다. 다만 인연이 거기서 멈췄을 따름이지 그를 원망하거나 그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다. 미처 풀지 못한 오해는 세월이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도 있다. 지난 결혼에 미련이 있다면 그건, 그녀에게 당신 아들이 얼마나 괜찮은 남편이었는지 제대로 말해주지 못하고 끝난 거였음을 이제 알겠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애틋한 시어머니였는지도. 단 한 번도 그녀를 불편한 존재로 느끼며 지내본 적이 없었음을. 그럼에도 그녀는, 내가 아이들을 두고 일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시어머니였고, 자신의 아들과 손녀들의 안녕을 먼저 위하면서도 내게 끝끝내, 나를 딸처럼 사랑한다고 뜨거운 고백을 안기는 모순의 여인이었고, 헝클어진 머리와 허술한 옷차림의 내게, 평소 화장이라도 좀 하고 지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오래된 여자였다. 무심하고 무뚝뚝했던 남편이 정신이 오락가락한 채 10년을 머물다 떠난 뒤에도 그가 그립다며 묘지를 찾아가 쓰러질 듯 울음을 터뜨린 어리석은 여자였고(아파도 좋으니 내 곁에 더 있다 가지 그랬어요, 라며 내 품에 안겨 흐느꼈다), 자식들을 키운 곳을 떠나지 않겠다며 일손 하나 고용하지 않고 혼자서 낡고 적막한 집을 짊어지고 지내다 떠난 고집 센 여자였다.

그녀는 한국인 며느리를 맞이한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 만나자마자 내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함께 지낼 때면 아들보다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했다. 고아원에서 일했고 그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고 살 결심을 하던 중에 시아버지를 만나 결혼했고 이민을 왔다. 가족을 초대했고, 그들이 미국에서 자리잡고 살 수 있도록 동분서주했다. 그들이 또 그들의 가족을 초대해서 가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나는 종종 농담 삼아 말했다. 어머니는 마피아 패밀리의 두목 같은 분이신 거네요. 이렇게 큰 가족이 가까이 모여서 도와주며 사는 것도 어머니가 애쓰신 덕이에요. 그녀는 내게 말했다. 너도 그렇게 하자. 내가 도와줄게.

결혼 생활 중 4년이 넘게 친아버지를 모시고 지내던 나에게도 단 한 번 서운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그녀에게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아버지의 건강과 안녕을 염려했다.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둘째 아들이 무례를 범하는 건 아닐까 미리 미안해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좀더 일찍 미국으로 모셔와서 부양하지 못한 것이 세월이 흘러도 회한으로 남았다며, 나라도 늦지 않게 잘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혼을 결정하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며느리를 딸같이 사랑한 모순의 여인

“지금껏 너를 위해 살았잖니. 이제는 애들을 위해 살면 안 되니? 제발 부탁한다. 애들을 위해 살아줘. 대학 갈 때까지만.”

그 말이 서러워서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딸처럼 사랑한다는 고백이 한 꺼풀 종잇장처럼 떨어져 내리는 게 야속해서 울었다. 아이들이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녀가 주도했던 새벽 기도 장면이 떠올랐다. 시댁을 방문하고 공항으로 떠나기 전 식탁에 둘러앉았다. 그녀는 손녀들의 건강과 복된 성장을, 아들의 건강과 성공을, 그리고 며느리의 건강과 현명함을 빌었다. 구체적으로 옮겨보면 나의 몫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사랑하는 딸 서희가, 자녀들의 훌륭한 엄마이자 남편의 지혜로운 아내로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나의 엄마는 나를 두고 그와 같은 기도를 하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나의 딸을 두고 그와 같은 기도를 하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내 엄마의 기원 속 나의 자리는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 생활 내내 나에게 구체적 사랑을 전해주고 일상의 돌봄과 보살핌을 더 자주, 더 진하게 느끼게 해준 건 나의 엄마가 아니라 시어머니였다. 마음을 꿰뚫는 사랑의 기원이 어디에 있었든 간에, 사랑은 실천으로 막강해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시어머니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그만큼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부음을 들은 저녁,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재미동포 친구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 존재를 믿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가 답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옆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어. 고통으로 너무나도 힘들어하실 때 내가 귀에 대고 속삭였거든. 많이 힘든 거 안다고. 두고 가는 사람들 걱정 때문에 자꾸 버티다 더 힘든 것도 안다고. 걱정 말고 가시라고. 우리가 남아서 할머니가 누리기를 바라는 삶을 잘 누리다가 만나러 가겠다고. 잠시 후 할머니의 숨이 툭 끊어졌는데, 그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더라고. 여전히 그녀의 육체는 남아 있고 온기도 여전한데, 정말 무언가가 사라진 거야. 그냥 거기에 있기를 멈추고 떠난 거지. 엄마가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였어. 더 신기했던 건, 엄마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집의 모든 화재경보기가 동시에 울렸어.”

인애씨, 평안하세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자란 그녀임에도, 그녀는 일종의 윤회를 믿는다고 했다. 이곳의 삶을 잘 완성시켜서 다음 생에 더 온전하고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넘겨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새롭지 않은 말임에도, 그녀의 절실한 마음과 진지한 눈빛이 더해지자 깊은 위안을 받았다. 만일 우리에게 영혼이란 게 있다면, 지속되는 영혼의 존재와 그 회귀가 있다면, 지금 이곳의 고통과 부당함에도 끝내 완성하고 싶은 존재의 임무랄까, 그런 유사한 것이 있다고 믿고 버틸 힘이 조금은 날 것도 같았다.

명복을 빈다. 기도를 거듭 올린다. 나의 기도 속에서 그녀는 그녀의 이름으로 불린다. 안녕, 인애씨, 부디 평안하기를.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아요. 오늘은 온종일 그에게 당신의 안녕을 기도해요. 안녕, 나의 사랑하는 인애씨.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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