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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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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탈것이 되는 삶

탈출하듯 벗어나서 시작한 외국생활…

영화 보고 연애하며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다
등록 2019-01-05 15:23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았어요.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프랑스행이었지요. 대학 시절에는 외국행을 꿈도 꿔보지 않았던 내가 고작 두 달간의 어학 학교 등록과 100만원 정도의 돈만을 수중에 넣고 비행기에 올랐어요. 1996년의 여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외국 생활이 20년을 넘어설 거라고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지만요. 이후 프랑스에서 6년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준비하다 돌연 계획을 바꿔 미국행을 결정했습니다. 남프랑스의 휴양지 칸에서 만난 미국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서였어요. 15년 넘게 이어질 미국살이를 구체적으로 가늠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여름이었군요. 2002년 여름에 미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가을 첫아이를 낳았고, 2년 뒤 가을에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버지의 눈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font></font>

언젠가는 외국에서 살게 되리라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건 막연한 희망 같은 것과는 달랐습니다. 의무감에 가까운 예감이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반드시 이뤄질 예언을 실현해야 한다는 운명에의 순응 같은 자세가 제게는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그 까닭에서인지,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지망학과를 선택할 때면 영문과나 노문과, 불문과 등을 번갈아 선택했어요. 대학을 가는 건 내게는 언젠가 한국을 벗어나게 하는 길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입학 원서를 쓸 때까지도 내가 삶에서 무얼 원하는지, 하물며 어떤 과에 들어가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었어요.

법학과 지원을 강력히 권고하는 아버지와 대학입학시험 한 달 전부터 극심히 부딪쳤습니다. 설레지 않는 단어 앞에 어떻게 제 삶의 중요한 부분을 내놓을 수 있었겠어요. 꿈을 꾸기에는 법학과라는 공간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제한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법학과만은 가지 않겠다고 한 달을 싸우며 버텼지만, 결국은 태어나서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아버지는 내게 부탁했어요. 법학과만 들어가준다면 그 뒤부터는 내 인생에 개입하지 않겠노라고.

법률가의 길을 걷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아버지가 원하는 과에 원서를 넣었고, 나는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어요. 법학과라는 압박보다, 내 인생에 주어질 자유에의 약속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지요. 물론 아버지의 공약은 입학이 결정된 지 몇 달 만에 번복됐습니다. 착하고 순종적인 둘째 딸이던 저는 더는 물러설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내 삶에서 중대한 결정을 거짓 약속으로 이끌어내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집을 나왔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고 어떻게든 아버지 곁을 벗어나 살아갈 삶을 궁리했습니다.

마침내 한국 땅을 벗어나 허공에 뜬 비행기에 올랐을 때는 알 수 없는 슬픔에 한참을 흐느꼈습니다. 좌석 앞 화면 속에서는, 바다와 땅으로 이뤄진 엉성한 지도 위로 손톱만 한 비행기가 항로를 가까스로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고작 저 화면 속 작은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 공간을 지나갔을 수많은 익명의 얼굴 중 한 사람임을 깨닫고 허탈해졌습니다. 그제야 눈물을 닦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두운 조명 밑 각기 다른 얼굴이 빼곡하게 실내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고체 덩어리에 몸을 싣고 허공을 반나절이나 지나서 머나먼 땅에 이르겠다는 꿈만큼 허황된 게 있을까 아득해졌습니다. 불현듯 내 곁에 있는 이들이 나와 함께 생사를 건 동지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서로에게 무심한 척 제 할 일을 하는 승객들에게서 기묘한 위안을 받았습니다. 눈물도 어느새 멈췄습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직관에 충실해서 재밌게 살고 싶다</font></font>

탈출하듯 벗어나서 시작한 외국 생활이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살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때그때 학교를 다녀서 체류를 연장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생계비를 마련했습니다. 누구의 딸이나 어느 학교 학생이라는 한계, 주변 시선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나를 나대로 저지르고 살 수 있는 자유를 어떻게든 좀더 누리며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구체적인 꿈을 꿀 때는 미래가 두려울 때였습니다. 계획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도구였을 뿐 내 안에서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무엇도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공이나 권력, 명예 같은 관념적인 단어는 내 삶의 바깥 이야기만 같았습니다. 당위나 가치, 명목같이 추상적인 것들로 내 삶과 행동을 맞춰갈 생각도 들지 않았고요. 그저 현재의 느낌이나 감정, 직관에 충실해서 재밌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속되고 싶다는 욕망도 거의 없었는데, 그건 어딘가 소속되는 순간 그에 따라오는 책임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관심 가는 일을 열심히 한 적도 있지만, 대체로 그건 바라보고 감상하는 자일 때나 가능했어요. 영화를 열심히 보는 건 가능했지만, 영화 집단에 소속돼 활발한 활동을 벌이거나, 영화 제작팀에 들어가 영화를 찍는 일은 전혀 재밌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당분간 깊은 고민 없이 즐거운 일에 몰두하기로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6년간의 시절은 영화와 연애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립된 영화관이란 공간에 혼자 앉아 온종일 영화를 보다보면 행복했고, 영화가 끝난 뒤 걸어나온 세상에선 연애를 했어요. 연애가 좋았던 건, 한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이 사는 삶을 엿볼 수 있어서였어요. 내가 매혹되지만 살지 않는 삶, 혹은 살지 못하는 삶을 누군가 살아낼 때 그 사람의 연인이 되는 건, 관심 있는 세상을 가장 간편하게 가상현실처럼 살아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연애를 탈것으로 삼아 세상을, 삶을 여행했어요. 연애를 타고 알지 못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즐거웠어요. 제때 올라타서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것 또한 결단이 필요한 일이랍니다. 대부분은 망설이고 주춤거리느라 몸이 무거워지거든요. 사뿐히 올라타기엔 과다 체중이 되거나, 절벽 끝에서 몸을 던지는 행위가 되기도 하죠. 연애가 여행이 아니라 추락이 되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제때 돌아오는 일은 그래서 중요했습니다. 연애라는 여행이 끝나면 나만의 고립된 공간으로 되돌아왔고 거기서 익숙한 안정을 다시 얻었습니다. 어쨌든 여행이란 조금은 불안하고 피로한 것이니까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 덮개만 거두면 무엇이 드러날까</font></font>

연애는, 영화처럼 여행처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낯설고 신기한 곳, 내 자리가 아닌 것만 같은 곳으로 말입니다. 이물질처럼 어디에서도 온전히 섞이지는 못했습니다. 투명한 유리벽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기분은 어릴 적부터 계속된 증상이었습니다. 연애로 한시적이자 적극적인 관찰자의 삶을 사는 것은 그와 같은 상태를 의식적으로 즐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난장판을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약에 취해 흔들리는 동공들을 보았고 프라이빗제트(전용기)와 선상 파티, 요트 여행, 화려한 저택, 두고두고 회자되는 난투극과 네온사인 같은 악몽과 배신, 담합과 암투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엿듣고 곳곳의 사람들과 스치듯 악수했어요. 죽음의 무도 같은 광경 속 종이인형처럼 납작한 존재들이 휘청거리며 춤을 추었어요.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이 한 꺼풀 덮개 같다고 느끼기 시작했어요. 덮개만 거둬버리면 무엇이 드러날까. 평면을 찢고 통과해서 저 멀리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어요. 나는 대신 뒤돌아 달렸던 걸까요. 어쨌든 달리다보면 탈것이 보였고 그렇게 떠돌듯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나는 마흔을 훌쩍 넘겼고 아이들은 무서운 기세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장과 함께, 나도 모르게 소속과 책임이란 개념에 익숙해졌습니다. 지속되는 일상을 배우고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관계를 직접적으로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죽어도 이 아이들의 엄마로 죽게 되리라는 자각은 서늘한 슬픔이자 뜨거운 기쁨이 되었어요. 나를 둘러싼 삶이 그 성질을 스스로 변화시켜버린 걸 뒤늦게 알았는데, 그렇게 나는 세상에 내 이름으로 나서는 일조차 무턱대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명칭 말고 내 이름을 알려주고 싶어졌거든요.

무언가 만들고 일궈내는 사람으로 그들 앞에 서고 싶어졌고 어느덧 나는 그들에게 탈것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삶을 사는 일이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내 앞에 놓이게 되었어요. 요새는 생각해요.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탈것이 되는 삶을 기꺼이 살고 싶구나. 아이들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도요. 이제는 더 이상 타인의 삶을 등 뒤에서 엿보는 게 전부가 되지 않아요. 직접 내 몸을 드러내서 바라보게 됐어요. 그들에게 말을 걸고 나는 그걸 기억하고 나의 언어로 전환해요. 여전히 투명하고 거대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자주 들지만, 이게 더 이상 예전처럼 그 상태가 타고난 한계나 장애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고 그게 삶의 방식이 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 나의 승객이 되어주시겠어요?</font></font>

어쨌든 나는 이제야 비로소, 다시 삶을 생각합니다. 눈앞에 그려지는 것은 새로운 풍경이에요. 저편으로 손을 내밀어 만져지는 것들에게 물어요. 느끼고 있나요? 당신도 느낄 수 있나요? 천천히, 또박또박, 신호를 보내듯이 내 존재를 알려요. 저편의 당신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다른 물질, 다른 기억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요. 그럼에도 우리가 만나고 있다면 말해야만 해요. 나는 당신을 위해 기꺼이 탈것이 될 수도 있어요. 때로는 당신 기억에의 탈것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자, 나는 문을 열었습니다. 나의 승객이 되어주시겠어요? 새로운 세계를 향해 함께 출발하시겠습니까?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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