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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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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바람 속을 떠다니다가도

닉네임 ‘소풍’과 나눈 밤의 대화
등록 2019-08-22 02:26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지난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누구 좀 만나라.”

“누구?”

“내 친구. 너를 만나고 싶어 해. 두 사람의 조합이 궁금하기도 하고.”

하지만 나도 그녀도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고 결국 두 사람 모두 보지 못하고 서울을 떴다.

그의 문자가 히죽히죽 웃었다

“미안해요.”

이 말이 그가 내게 처음 보낸 메시지였다. 미국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시차 적응에 한창 고생할 때였다.

“혹시 괜찮으면 얘기할 수 있어요?”

늦잠 자고 일어나서 허겁지겁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다준 후, 그의 문자를 뒤늦게 발견했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1시가 넘었는데 그는 여전히 잠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늦은 밤, 잠 못 이루는 이들의 방황을 잘 알고 있다. 혼자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밤들 뒤 잠깐씩 찾아오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허탈함에 가슴이 울렁거릴 때가 있다. 그때 누군가, 세상 저편에 나도 살아 있다고 신호를 보내주는 것처럼 고마운 일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우리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나는 일부러 띄엄띄엄 이야기를 이어갔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과 문자를 주고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는데 시차가 맞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고, 나는 그에게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단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핍과 과잉, 습기와 건조 등등. 그는 결핍을 과잉보다 더 좋아하고 습기보다는 건조를 선호한다고 했다. 역사를 좋아하고 인물 평전을 즐겨 읽으며 현재를 과거를 바라보듯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된다는 그를 나는 “회고적 인간”이라 평했고, 그는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따름이라고 대답했다. “부감”이라고 그랬던가. 곧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옆도 아니고 비켜서도 아니고 위에서 조감하듯 바라보는 거예요. 몸을 높은 자리에 놓고 바라보아야 해요. 건물 위도 좋고 그리 높지 않은 산 위도 좋아요.”

그 말이 내 앞에 던져지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강하게 토스했다.

“당신과 나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당신은 높은 지점에 발을 딛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나는 내 발을 띄운 채 미끄러지듯 세상을 내려다보는 거예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가끔 그들을 알아볼 수 있거든요.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나는 ‘부유자’라고 불러요.”

잠깐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유일하게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10년을 온통 그리워하며 보냈어요. 그 사람을 생각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거 알아요? 가슴이 서늘해지면 기분이 좋다는 거. 탁 트이는 것처럼, 답답한 무언가가 바람에 쓸려나가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함께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기간은, 그 10년 동안 오직 6개월뿐이었어요. 그것도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6개월.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 내가 더해서 머릿속에 떠올린, 조금 뒤늦게 나타난 전자계산기의 깜빡임 같은 6이라는 숫자에 불과한.”

그리고 또 이어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3년 전이었어요. 어떻게든 다시 만나려고 달려갔는데 얼굴을 마주하며 그제야 깨달았죠. 아,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구나. 나는 내 안의 그리움을 보내기 위해, 10년의 기다림을 오래된 상점 폐쇄하듯 닫아버리기 위해 너를 다시 만나야만 했구나. 그리고 정말, 감쪽같이 그 사람을 잊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저를 순정남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그때 그의 문자가 히죽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가끔은 글자도 눈물을 흘린다. 자조의 웃음을 보이기도 하며 비틀비틀 쓰러지는 일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날 그의 문자를 보며 희미하게 따라 웃고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

“바쁘죠?”

그가 두 번째로 말을 걸었을 때 첫마디였다. 당장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하루를 끌었다.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구름처럼 올려다보지 않으면 까맣게 잊을 수 있는 정도의 부담이 따라다녔다. 그의 문자메시지 닉네임은 ‘소풍’이었다. 그렇게 가볍고 산뜻한 부담, 내일이면 엄마를 졸라 김밥을 싸들고 떠나야 하는, 그래서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딱 그만큼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잠 못 이루는 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 입술이 들썩이는 밤, 나는 그에게 짐짓 몰랐던 척 말을 걸었다.

“이제 확인.”

“네.”

그가 잠시 후 대답했다. 나는 이미 강력한 수면제 한 알을 삼킨 직후였다.

미리 경고해두고 싶었다.

“좀 전에 힘센 수면제를 먹었어요. 조만간 횡설수설하다가 대화가 끊길지도 몰라요. 그래도 이해해주세요.”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난 뒤에도 밤이면 비로소 제대로 깨어나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그날이 그랬다. 마치 당신들의 밤이 나에게는 동트는 새벽인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두드리듯 내 몸을 노크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세상이 보였다. 현란한 빛깔이 물결치기도 하고 탁탁 튀기는 공들이 여기저기 떠다니기도 하고 누군가의 얼굴이 형광색으로 그려질 때도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맞혀봐, 라고 내기라도 걸듯. 그러면 나는 그 얼굴을 기억해내려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니까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별 차이가 없을 정도란 말씀.

“잠을 잘 수 없어요. 내 방을 벗어나면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

“떠나야 할 사람인가봐요.”

“그냥 방이 아주 많은 집에서 살면 어떨까 생각해요. 매일매일 방을 바꿔서 자는 거죠.”

“그래 봤자 집 안이잖아요.”

“종종 꾸는 꿈이 있어요. 알고 보니 집에 숨겨진 방이 많은 거예요. 그 숨겨진 방들을 아는 순간 마음이 놓여요. 이제 잘 수 있겠구나, 하고요. 그 방에 하나씩 몰래 몸을 숨기고서.”

“무한대로 늘어나는 방.”

“그러고 보니 이거 진짜 낯선 상황이네요.”

“왜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랑 문자를 주고받는 것.”

“숨겨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하루키의 소설 속 양 사나이처럼요? 그렇다면 내게 재미나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그저 문밖에서 노크하는 사람인걸요.”

“하지만 문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네요.”

“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할 수 없어요.”

“문자만이 전광판 뜨듯 떠오르고요.”

나는 그에게 자신을 스스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마치 자기를 두 사람으로 분리해서,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소개하듯.

구체적 인간으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그는 자신을 반듯하고 똑똑하고 빠르고 귀찮게 안 하고 명료하고 차갑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했다. 작은 스마트폰 안, 볼륨마저 꺼놓아서 그저 떠오르는 글자 이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우리는, 그러니까 문자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설명 역시 내게는 문자로 그려진 형상처럼 그 이상의 지점을 건드리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그를, 구체적 인간으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기계인 거예요? 영화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컴퓨터처럼, 대화에 응답하는 인공지능 같은 것.”

“아니요. 기계치이고 더불어 인간이에요.”

그리고 덧붙였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온종일 테니스를 쳤어요, 여섯 시간을 내리.”

“피곤하지 않아요?”

“아니요. 오히려 어느 순간을 지나가면 정신이 깨질 듯이 맑아지죠. 피로함도 종적을 감추고요. 습기 찬 여름밤에 치는 테니스만큼 짜릿한 것은 없어요. 습기가 습기를 누르고 속도가 속도를 먹어버리죠. 공이 라켓 위에 머무는 순간이 확장되고 마치 정지된 양 고요한 정적을 느끼거든요. 짜릿해요, 그 느낌.”

“보고 싶네요, 밤의 습기 찬 공기를 가르는 모습. 마치 세상을 가르듯 움직이는 몸을 보는 건 즐거워요.”

“반할 거예요. 몸으로 길을 열거든요. 명확하고 정직하게. 그러면 정신이 단단해져요.”

내 몸은 떠오르고 있다, 어딘가로

차츰 복잡하게 얽혀 있던 뇌의 주름들이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면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몽롱해지는 그 순간, 마취라도 하듯 그가 내게 물었다.

“수면제 효과가 나타나고 있나요?”

“네.”

바로 이어서 그에게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왜 이름이 소풍이에요?”

“한자가 좋아요.”

“그럼 그대로 불러드릴게요.”

“좋을 대로.”

“소풍, 저는 이제 자러 갈게요.”

“바람을 거닐다, 가 소풍의 한자 뜻이에요.”

아, 그렇구나. 소풍의 뜻이란 게 바로, 바람을, 바람 속을 거니는 것이었구나. 떠다니듯, 부유하듯, 훌쩍 날아가듯, 그리고 대기를 가르듯.

“이제 스러지는 중이에요.”

“네, 가요.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나는 그 말과 함께 스르르 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내 몸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비록 나의 뇌는 수면제로 온통 풀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지라도 나는 자꾸만 떠올라서 어디든, 어디로든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바람을 거닐 듯, 밤의 소풍을 떠난다.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고도 편안히 놓아줄 수 있다. 내일 아침이면 그녀는 언제 떠났느냐는 듯 내 안으로 돌아와 노곤한 존재를 누일 것이다. 그렇게 나의 낮이 시작될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이서희의 오픈하우스’ 연재를 시작했을 때는 이 모든 글이 흘러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집을 열어 타인을 맞이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니 내 안의 숨겨진 방들이 문을 열었고 감히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숨어 있기 좋은 방을 찾아 헤매왔는데, 이제는 집을 떠나 소풍하듯 가볍게 여정에 오를 수 있을 듯싶다. 다른 이야기, 다른 글들로 또다시 찾아올 날을 꿈꿔본다. 꿈은 매번 비슷한 듯 보여도 꿈꾸는 자에게는 새롭기 마련이다. 벌써 가슴이 뛴다.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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