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미국의 추수감사절 방학마다 혼자 여행을 간다. 이혼과 함께 시작한 정기적인 의식이다. 아이들은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2년 전 가을에도 추수감사절 방학 일정을 짜고 있었다. 유럽 도시 몇 개를 행선지로 염두에 두고 있던 중 프랑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20대 시절, 한때는 연인이었고 더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던 상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설명의 빚을 지고 있는 사이</font></font>결혼 후 재회한 적은 없으나 가끔 생각나면 소식을 주고받았다. 지난 시절에 대한 회한을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만큼 가까웠지만, 새로이 시작할 가능성은 상상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독일을 거쳐 체코 프라하로 갈지도 모르겠다는 계획을 말하자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만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즉흥적으로 우리는 파리도 서울도 아닌 제3의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는 평소에 머물곤 하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빌려놓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도록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독일 친구에게 20년 만에, SNS 계정으로 메시지를 받았다. 그가 1996년 여름부터 1년에 걸쳐 내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집 창고 어딘가에 먼지를 가득 쓴 채 쌓여 있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가 반가웠고 나는 그에게 유럽 여행 계획을 말했다. 그 역시 나만 괜찮다면 나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으로 오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 친구와 약속이 겹칠까 봐, 대신 그가 살고 있는 독일의 도시를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여행 일정은 셋으로 분할됐다. 암스테르담은 프랑스 친구와, 독일은 독일 친구와, 프라하는 혼자서. 프랑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02년 3월이었고 독일 친구는 1996년 8월이었다.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이 스며들었다. 이 여행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그들을 추억하기조차 꺼리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나와 함께 나이가 들었을 그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환불이 되지 않는 할인 가격으로 비행기 표를 산 뒤이기도 했다. 저지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 삶에 얼마나 많은지 위로하고, 세월이 흐른 뒤 각자 어떤 배역을 맡게 될지는 때가 되면 알게 되리라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여행 2주 전 계획을 갑자기 취소했다. 위약금을 물고 비행기 표를 다음해 4월 초로 미뤘다. 여행이 조금도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친구와 갈등이 고조될 만큼 고조돼서 오랜만에 만난다 해도 기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5일 동안 가능한 모든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그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날 파리에서 그랬듯 미술관을 다니고 구석진 거리를 산책하고 특색 있는 식당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만남에 대한 흥분은 예전의 갈등을 답습하며 급속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동안 우리는 변했을지 몰라도 관계 안에서는 그대로였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연인이자 친구였지만 그 관계가 괴로워서 헤어진 사이였음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설명의 빚을 지고 있다고. 나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고와 사라짐에 대해, 그리고 언급할 기회를 얻지 못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여행 덕분에 주고받은 전화번호로 오갔던 우호적인 대화는 며칠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틀 만에 말다툼을 벌였다. 그는 집요했고 나는 고집스러웠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세월의 공백이 기억의 음지를 지워버렸을 뿐 우리는 관계를 지탱할 만큼 용기와 내공을 키우지 못했다. 달콤한 옛 기억만이 망각의 체에 걸러 고운 설탕가루처럼 남아 있었지만, 현실에 마주치자 한방에 흩어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다리 위 산책과 밀란 쿤데라</font></font>다음해 4월 초 그럼에도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해서 독일을 거쳐 프라하에 이르는 여정을 감행했다. 독일 친구에게만 소식을 알렸다. 일정 중 반나절을 비웠고 쾰른의 어느 기차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20년 전 미술관에서 처음 독일 친구의 존재를 알게 됐다. 프랑스 아비뇽으로 여행갔던 어학학교 학생 중 유일하게 남아서 미술 전시를 보던 두 사람이 그와 나였다. 그리고 며칠 뒤 ‘스페인의 밤’ 행사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그가 다가왔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로 날마다 만났다. 산책을 했고 그의 차를 타고 근처를 돌아다녔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교정 숲속 다리를 건너면서 그에게 제안했다. 이 다리를 건널 때만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나는 한국어로 그는 독일어로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와 그의 목소리가 보다 선명한 빛깔로 대기에 울려 퍼졌다. 시선의 마주침이 미풍처럼 설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였고 나는 그에게 내가 당시 가장 좋아하던 소설 밀란 쿤데라의 주인공 이름이 토마스라고 말해줬다. 그는 나를 만나는 동안 그 책을 찾아 읽었고 헤어질 무렵 내게 말했다.
“너는 사비나 같은 여자야. 나는 네가 테레사 같으리라 예상했지만.”
기숙사 앞에서 이별할 때 나는 6개월 뒤 그가 공부하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찾아갈 것을 약속했다.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날짜가 다가올 무렵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20년 뒤 그가 나를 찾아냈다. 인터넷의 힘이었다. 그는 우리가 함께 지냈던 기숙사를 지난해에 다녀왔다고 했다. 한동안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파리에 직장을 구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는 사실도.
우리는 이번에도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역 이름을 잘못 가르쳐줬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연락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나를 찾아냈다. 건너편 플랫폼에서 뛰어 올라오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팔을 들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가 내게로 건너왔다.
어색함이 가실 때까지 함께 걸었다. 오래전처럼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못 알아볼까 걱정했는데.
너도 멀리서 바로 알아봤는걸. 그래서 손을 흔들었잖아.
응. 정말 신기했어.
수많은 사람들 틈에 유일하게 짐 가방을 들지 않아서, 바로 너일 거라고 짐작했지.
내가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남자 주인공은 여러 명의 여자를 만나는데</font></font>우리는 많은 부분을 비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별의 회한 같은 건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에게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나를 통해 쿤데라의 소설을 읽은 남자들은 내게 말했어. 내가 테레사일까 사비나일까 가늠하는 이야기 말이야. 나 역시 내가 둘 중 누구에 가까울까 궁금해하며 긴 시간을 보냈어. 사비나처럼 가볍고 자유로우며 속박을 거부하는 여자인지 아니면 테레사처럼 무겁고 진지하며 유일한 사랑을 바라보는 여자인지 말이야.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어. 굳이 꼭 한 인물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토마스와 같을 거라고.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여자가 토마스와 그리 다르지 않아. 인생의 많은 사랑을 건너고 갈등하고 방황하고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지. 단 한 가지 상징으로 귀결되지 않고서.”
어릴 적부터 읽은 많은 이야기 속 남자 주인공은 모험과 구원의 길을 떠나면서 숱한 여성을 만나곤 했다. 남자의 방황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다양한 이름을 가졌지만 그 유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은 위험하거나 지루하거나, 저속하거나 성스러운 양날을 오가면서 남자의 구원과 깨달음의 서사에 복무했다.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하나의 로맨스로 끝나는 반면, 남자들의 이야기는 여러 로맨스를 지나 존재의 본질이든 운명의 극복이든 더 거창한 완결을 이루는 듯했다. 영화 <007> 시리즈에서 남자 주인공은 위험에 봉착한 세계를 구하고 임무를 완수했지만, 본드 걸은 그때그때 소모되어 사라졌다.
내가 살아온 삶은 내게 친근한 이야기들과 너무나 달랐다. 나의 삶은 하나의 로맨스로 귀결되지 않았고 숱한 연애와 헤어짐이 있었으며 규정하기 힘든 관계를 지나왔다. 어느 날 생각했다. 어쩌면 내 세상에는 내가 <007>의 주인공이고 그들이 본드 보이는 아닐까? 그저 내 비밀이 국가기밀이 아니고 내 사명이 체제 대변같이 거창하지 않을 뿐. 나는 존재에 회의를 느끼고 삶에 의문을 가지며 나만의 깨달음을 찾아 시리즈를 이어갔고 ‘서희 보이’들 또한 그 시기마다 상징처럼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의 서사 속에서 그들이 토마스이듯, 나의 서사에선 내가 토마스였다. 나마저도 내 존재에 타인의 시선으로 상징을 부여하고 규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 서사 속 방황하는 주인공이 될 충분한 권리와 자유가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두 편의 연애담이 거창한 사건이나 스릴 넘치는 서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로써 마지막인지 앞으로 무언가 더 남아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징후도 암시도 실마리도 없었다. 아마도 결말 같지 않은 결말로, 지나고보니 끝나버린 이야기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도 나와 토마스는 20년이 흐른 뒤 빈이 아닌 쾰른의 기차역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차역을 배경으로 헤어졌다. 이야기 속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경험이자 구체적 감각이었다. 20년 전 기숙사 앞에서처럼, 고요한 눈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서 그가 다시 물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소설과는 다른 상징이 될 토마스</font></font>“너를 다시 한번 안아봐도 될까?”
오래전의 포옹만큼 뜨겁지는 않았으나 위안이 되는 몸짓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기차에 올라타서 닫히는 문 사이로 승강장 위에 있는 토마스를 바라봤다. 나의 토마스는 소설 속 토마스와는 다른 상징이 될 것이다. 20대 중반의 토마스는 마음이 복잡할 때 수학 문제를 풀었고 40대 중반의 토마스는 근처 공원을 달리거나 수영을 한다. 20대 중반의 토마스는 낡은 자동차를 몰고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했고 40대 중반의 토마스는 경비행기 운전을 취미로 삼고 있다. 나는 그를 20대 중반에 처음 만났고 20년 뒤에 잠깐 다시 만났다. 이번이 마지막 만남은 아닐까 생각하며 승강장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40대 중반 남자의 실루엣이 흐릿해질 때까지 바라봤다. 안녕, 나의 토마스. 지난날의 상징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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