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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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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다방, 환하게 빛나던

발각되기보다 내뱉기를 택해야 했던 어린 ‘나’의 악몽
등록 2018-11-23 11:25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오래전의 밤이다. 아마 초등학교를 갓 들어갔거나 다니기 시작할 무렵일 거다. 택시를 타고 밤거리를 가로지르는데 검게물든 거리에서 밝게 빛나는 간판 하나를 보았다. ‘서희’. 내 이름이 어두운 밤하늘에 촌스러운 네온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세로로 밤을 가르던 두 글자는 처연하면서도 엉뚱하게 심각해 보였다.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다방 간판이었다. 당시 다방 이름으로 흔했던 ‘약속’ 같은 명사를 붙여놓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이름일 듯한 ‘서희’가 조금은 수줍게, 조금은 농염하게 밤하늘에서 깜박일 때 나는 오래된 비밀을 들킨 양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그 빛에 홀린 듯 고요해졌다. 엄마가 내 옆에서 중얼거렸다. 다방 이름을 서희라고 짓다니, 주인이 서희인가.

그때만 해도 ‘서희’란 이름은 흔하지 않았다.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반에는 꼭 ‘선희’라든가 ‘성희’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있었지만 ‘서희’ 이름을 가진 아이는 만나지 못했다. 내 이름을 말할 때면 다들, “선희라고?” 혹은 “성희라고?” 이렇게 반복해서 물어오고는 했다. 그때마다 나는 또박또박 “아니요. 그냥 서, 희”라며 내 이름을불러야 했다.

상황이 조금 달라진 건, 박경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가 인기를 얻으면서였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들으면 하나같이 되물었다.

“아, 그 의 서희처럼 말이지?”

<font size="4"><font color="#008ABD">그래도 내게는, 모두의 가슴에 남은</font></font>

의 서희보다는 서울의 변두리 하늘, 생뚱맞게 떠 있던 ‘서희’라는 이름이 더 편안했다. 가끔 떠올리기도 했다. 어느 곳, 어느 밤, 몇 차례의 계절을 살아내고 사라졌을 ‘서희’라는 불빛을. 흘러가는 택시의 창문으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던 그 이름은 밤하늘을 날아가듯 너울거리다 어둠 속에 깜박 삼켜졌다.

초등학교 4학년, 엄마가 다방을 차리면서 내가 얻었던 최대의 혜택은 다방 구석에 자리잡은 레코드들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디제이 오빠에게 레코드판을 빌려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엄마나 오빠 몰래 디제이룸에 들어가서 판을 슬쩍 들고 나오기도 했다. 아빠 책을 훔쳐 읽었던 것처럼, 나는 다방의 노래를 훔쳐 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오후가 지루할 때면 엄마가 일하는 다방을 찾아갔다. 광화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거기서 언니들이 주는 커피를 마시거나, 건물 같은 층에 있는 경양식집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돈을 바로 내지 않아도 들어가서 인사 한 번 드리고 먹을 수 있었다. 계산은 나중에 엄마가 알아서 한다고 했다. 그건 나를 무척이나 우쭐거리게 했다.

밥을 먹고 넉넉한 기분으로 어두운 다방을 들어서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디제이룸이 환하게 빛났다. 벽을 빼곡하게 채운 레코드판은 보기만 해도 짜릿했다. 커버의 비좁은 틈이 열리고 까맣고 매끄러운 비닐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나와 내 손가락에 내려앉던 감촉. 나무의 나이테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던 자리. 레코드 바늘의 섬세한 떨림에 콩닥거리던 가슴. 손가락을 바라보며 그 바늘처럼 음악을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때.

<font size="4"><font color="#008ABD">끝이 보이지 않던 밤의 악몽</font></font>

나의 다방 시절은 낭만적으로 마무리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에 오르면서, 엄마가 다방 마담이면서도 그 사실을 숨긴채 모범생인 양 뻔뻔하게 학교를 다닌다는 이야기가 몇몇 아이들 입에 오르내렸다.

“야, 너희 엄마가 다방 마담이라며? 마담이면 창녀 수준 아니냐? 너도 창녀 될거냐?”

쉬는 시간이면 내 자리로 찾아와 어김없이 질러대는 남자아이들의 비아냥거림은 무시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나에게는 가장 견디지 못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창녀’란 말이었다. 그건 아빠가 엄마를 때릴 때 퍼붓곤 하던 말이었으니까. 엄마의 첫 사업이 망한 때는 초등학교 2학년 말인데 나는 삶이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음을 그때 처음 배웠다. 어릴 적부터 나를 돌봐주던 칠성이 엄마가 울면서 집을 떠났고, 집 앞에 주차돼 있던 차도 기사 아저씨도 사라졌다.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갔고 전학이 거듭됐다. 아빠는 엄마를 거의 매일 밤 때렸고 그래도 분이 덜 풀렸는지 막판에는 삼 남매를 한자리에 불러놓았다. 당장 그 자리에서 엄마와 아빠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빠가 오줌지리게 무서웠음에도 우리의 시선은 거듭 엄마를 향했는데, 그럴 때면 아빠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너희 엄마는 알몸으로 다른 남자 앞에 늘어져 있던 여자야. 알겠니? 창녀란 말 알아? 다른 남자 앞에서 옷 벗고 있는 여자가 바로 창녀야. 이런 창녀는 엄마 자격이 없어.”

아빠의 장황한 설명이 계속될 때마다 엄마는 죄인처럼 쪼그리고 앉아 그게 아니라며 흐느꼈다. 아빠의 적나라한 묘사를 들으면서 자료 화면처럼 머릿속에는 영상이 떠올랐다. 목욕탕에 늘어진 덩어리 째의 알몸이 있다. 내가 엄마의 알몸을 본건 목욕탕에서니까, 나는 엄마를 목욕탕 속 알몸으로 그리고야 말았다. 뽀얗게 서린 김 때문에 세부가 지워진 그 자리 너머, 낯선 사내의 떠나는 등이 보였다.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사내의 얼굴 대신 그의 숱 많은 검은 머리통이 있었다. 상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보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히죽비죽 웃고 있는 남동생의 얼굴이 구석에 박혀 있었다. 쟤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데. 누르려고 할수록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온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목이 말랐다.

끝이 보이지 않던 밤의 악몽이 잦아든건, 그럼에도 엄마가 시작한 작은 생맥줏 집의 기대 이상의 성공과 이후 광화문 근처 어느 빌딩 지하에 문을 열었던 다방 덕택이었다. 나는 건물 한 층의 널찍한 공간이 그녀 차지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음악실 한 면을 다 채운 레코드판을 차례로다 들어볼 계획에 설레는 날들이었다. 친한 친구 명희에게 다방을 구경시켜주기도 했고 경양식집 돈가스를 호기롭게 대접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름방학의 어느 날, 매일같이 걸어대던 두 전화번호를 바꿔 누른 채 습관처럼 말해버렸다. “거기 **다방이죠?” 이미 입력된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처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낯익지만 어딘가 제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불길해하면서도, 저 앞의 불행이 해일처럼 밀려오는데 뒤돌아 도망치지 않고 주저앉듯이. 명희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되물으셨다.

“서희, 아니니?”

<font size="4"><font color="#008ABD">너희 어머니 뭐하시니?</font></font>

당황한 나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동안 같이 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이 명희로부터 전해졌다. 명희의 집 대문을 사이에 두고 명희의 얼굴이 군청색으로 닫히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광경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우리 집 베란다를 가로지르던 빨간 나일론 빨랫줄에서 수십 개의 깃발처럼 휘날리던 소파 덮개들. 하얀 바탕에 파란색으로 찍힌 ‘**다방’이라는 네글자는 어느 때보다 선명해 보였다.

다방의 시절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반짝였던 내 이름처럼 은밀히 빛나다가 쇠락한 건물 위 대낮의 네온사인처럼 스러졌다. 몇몇 아이에게 나는, 정체를 숨긴 죄목으로 가혹한 추궁을 당해야 했다. 숨긴 적도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외부인의 시선은 폭력이었다. 무작정 견뎌야 했는데, 그건 엄마에게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무엇이든 발각되기 전에 먼저 내뱉기를 택했다. 지난한 6학년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신입생 배치고사에서 전체 1등을 했다는 통고와 함께 입학할 중학교의 교무실을 방문했다. 선생들이 나를 둘러쌌고 숱한 질문이 쏟아졌다. 그중에는 부모의 직업에 관한 것도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버지는 선생님이시고 어머니는 다방을 운영하십니다.”

그날 밤, 푸른 새벽빛이 밝아올 때까지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허무하게도 엄마의 다방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엄마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그마저도 부침을 거듭하다 스러졌다. 아빠는 엄마의 사업 자금으로 퇴직금을 날렸고 피 터지는 다툼을 끝으로 두 사람은 이혼했다. 갈 곳이 없어진 아빠는 나와 5년가량을 미국에서 함께 지냈다. 쉽지 않은 동거였지만 그를 품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살가운 동거는 아니었다. 아빠는 마당에 자리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용히 지내는 걸 택했다. 가끔은 능청스럽게 아빠에게 묻기도 했다.

“왜 그렇게 때렸어요? 엄마도, 나도, 언니도, 동생도.”

아빠는 5년 내내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일관하셨다.

“글쎄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질문이 이어지면 아빠는 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차분하고 단정한 말투로.

“그 시절에 그만큼 맞고 자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나의 이혼과 함께 아빠를 떠나보냈고 살 집을 마련해드렸다. 내가 자유롭고 싶어서였다. 이혼 선언과 함께 내 인생에선 두 남자가 사라진 셈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환하게 빛나서 창문 같았던 엄마의 다방</font></font>

그리고 몇 년 전 여름의 오후였다. 약속이 있어 광화문 근처를 지나가는데 익숙한 풍경에 시선이 머물렀다. 낡고 초라한 건물 위에 걸려 있는 낯익은 간판 하나, 그것은 엄마의 다방이 있던 건물의 이름이었고 엄마의 다방 이름이기도 했다. 택시 안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옆에 있던 지인에게 들뜬 목소리로말했다.

“바로 저기, 저 건물 지하에서 엄마가 다방을 운영하셨어요. 디제이룸이 환하게 빛나서 창문 같았던 곳이에요.”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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